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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학술

루소가 뱅센성으로 디드로 면회를 가지 않았다면

등록 :2020-08-01 09:30수정 :2020-09-14 16:04

[토요판] 주명철의 프랑스 역사산책
⑭ 뱅센성

12세기 왕 사냥터에 세운 뱅센성
루이 9세 등이 자주 들러 거주
백년전쟁 때 아성 건축해 요새화

17세기부터는 감옥으로도 사용
계몽철학자 디드로도 한때 수감
면회 간 루소, 디드로 조언으로
자유·평등의 자연권 이론 확립
파리 근교 뱅센 숲에 있는 뱅센성의 아성. 아성은 성을 지키는 지휘관이 머무는 중심 건물로, 뱅센성 아성은 높이가 50m에 이른다. 위키피디아
파리 근교 뱅센 숲에 있는 뱅센성의 아성. 아성은 성을 지키는 지휘관이 머무는 중심 건물로, 뱅센성 아성은 높이가 50m에 이른다. 위키피디아

나는 18세기 해군부(Ministre de la Marine)의 문서를 보려고 뱅센성을 찾았다. 파리 지하철 1호선의 동쪽 종점 ‘샤토 드 뱅센’(Château de Vincennes)역 밖으로 나오자마자 웅장한 뱅센성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호젓한 아성(donjon)의 앞마당에서 상단부를 천으로 덮어놓은 살인기계(단두대)를 봤을 때 루이 16세, 마리 앙투아네트, 당통, 데물랭, 에베르, 쇼메트, 로베스피에르가 잇달아 층계를 오르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 뒤,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단두대의 계단, Marche au supplice)을 들을 때마다 내가 마주쳤던 단두대가 생각난다.

궁(palais)은 도시에, 성(château)은 전원에 세운 것으로 구분한다. 중세의 숲은 종교·정치 지배자의 질서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온갖 귀신이 살고 범법자들이 숨어들기 알맞은 곳이었다. 그런데 왕이 전쟁놀이인 사냥을 다니면서 인근의 숲을 지배하고 기독교 왕권의 질서에 편입했다. 뱅센성은 파리 동쪽 4㎞ 밖의 뱅센 숲을 개간해서 지었다.

12세기 작가들은 ‘뱅센’을 비세노에(Vicenoe, Vicennoe), 비세나(Vicena), 빌세나(Vilcena) 등 다양하게 불렀다. 우리는 그 뜻을 알 길이 없다. 또한 넓이가 2천아르팡(약 663만5천㎡)이라 20(vingt)×100(cent)아르팡을 뜻하는 뱅상(vingt cents)이 어원이라는 설도 있다.

뱅센성에 있는 예배당인 생트샤펠. 위키피디아
뱅센성에 있는 예배당인 생트샤펠. 위키피디아

50m 높이의 아성

12세기의 루이 7세와 필리프 2세 오귀스트가 뱅센 숲을 사냥터로 이용하면서 작은 성을 건축하고 증축했다. 필리프 2세 오귀스트는 1198년에 167아르팡(약 55만5천㎡)의 숲에 울타리를 치고 영국 왕이 선물한 사자와 호랑이, 표범 같은 야수들을 키웠다.

루이 9세(성 루이)는 1228년부터 매년 여러번씩 뱅센성에서 지냈다. 1239년 8월에 그가 동로마제국 황제에게 산 예수의 성유물이 2년의 여정 끝에 파리 동남쪽 120㎞ 밖 상스(Sens)에 도착했다. 그는 배를 타고 5년 전에 결혼식을 올렸던 생테티엔 드 상스 대성당으로 가서 8월11일에 성유물을 가지고 뱅센성으로 돌아갔다. 8월19일에 그는 소박한 옷에 허리띠를 매지 않은 채 맨발로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까지 성유물을 모시고 행진했다.

그는 일요일에는 뱅센 숲의 도토리나무 밑에서 평민의 민원을 해결해주었다. 평소에도 그는 시중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없다고 말할 만큼 소박했으나 신앙생활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뱅센성에서 파리로 돌아갈 때 탁발수도회에 보시를 했다. 그는 시테궁에 호화로운 생트샤펠을 짓는 동안 예수의 가시관을 뱅센성에 모셨다.

‘미남왕’ 필리프 4세도 뱅센성을 자주 찾았다. 그가 1314년에 죽고 세 아들(루이 10세·필리프 5세·샤를 4세)이 차례로 왕위를 이었지만 결국 1328년에 카페 직계손은 끊겼다. 14년 동안 거물급 귀족들은 뱅센성에 자주 모여 왕위 계승 문제를 논의했다.

필리프 6세(1328~1350 재위)는 백년전쟁이 일어나자 1337년에 아성(donjon·장수가 머물며 전투를 지휘하는 중심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공사는 중단되었다가 1361년부터 ‘현명왕’ 샤를 5세가 재개해서 1370년에 지상 50m로 완공했다. 그리고 아성 주위에 1㎞의 담장을 두르고 아홉개의 탑을 세웠다.

샤를 5세는 1338년 1월21일에 뱅센성에서 태어났다. 1356년 장 2세 르봉이 영국에 인질로 잡혔을 때, 샤를은 섭정의 자격으로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질서를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매제인 나바라의 왕 샤를 2세(Charles Ⅱ le Mauvais)를 지지하는 파리 상인 대표 마르셀이 시테궁에 3천명을 이끌고 들어가 그의 앞에서 노르망디 원수 로베르 드 클레르몽과 샹파뉴 원수 장 드 콩플랑을 살해했다. 그는 두 측근의 피로 옷을 적신 끔찍한 기억을 떨치고 싶었다. 그는 시테궁을 떠나 생폴 교회 근처의 생폴 저택(Hôtel de Saint-Pol)으로 거처를 옮겼고, 그 거처를 지켜줄 ‘바스티유 생탕투안’(Bastille Saint-Antoine) 요새를 짓도록 명령했다.

〈베리 공작의 호화 기도서〉에 나오는 ‘12월’ 그림. 멀리 뒤로 뱅센성의 아성이 보인다. 위키미디어
〈베리 공작의 호화 기도서〉에 나오는 ‘12월’ 그림. 멀리 뒤로 뱅센성의 아성이 보인다. 위키미디어

1379년에 샤를 5세는 시테궁의 생트샤펠에 모신 예수 수난의 성유물을 나눠서 모시려고 뱅센궁에도 생트샤펠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완공을 보지 못한 채 이듬해 42살로 죽었다. 결국 16세기에 완공한 생트샤펠은 시테궁의 생트샤펠보다 작았지만, 후기 고딕 양식인 ‘플랑부아양’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20세기 초에 앙라르(C. Enlart)가 이 양식의 기원이 영국이라고 주장했을 때, 고고학자·중세사가인 생폴(Anthyme Saint-Paul, 1843~1911)은 고고학적 근거로 봐서 프랑스 양식이라고 반박했다. 아무튼 생트샤펠은 시테궁의 생트샤펠, 뱅센성의 생트샤펠, 그리고 비비에앙브리 성(Château de Vivier-en-Brie)의 생트샤펠처럼 왕궁의 예배당을 일컫는 이름이 되었다.

‘미친 왕’(Le Fou) 샤를 6세는 1380년부터 1422년까지 줄곧 파리의 생폴궁에 살았지만, 레이몽 뒤 탕플(Raymond du Temple)을 건설총감에 임명하고 루브르궁·생폴궁·뱅센성을 진정한 궁전으로 바꾸는 공사를 맡겼다. 레이몽은 뱅센성을 더욱 웅장하고 화려하게 바꿔놓았다. 왕은 바스티유 생탕투안 덕택에 생폴궁에서 뱅센성을 안전하게 오갈 수 있었다.

미라보 백작과 사드 후작, 같은 시기 수감

뱅센성은 감옥 노릇도 했다. 17세기에 루이 14세가 친정체제를 구축하지 못했을 때, 귀족들은 총리대신 마자랭 추기경(Jules Mazarin)에게 반대해서 ‘프롱드의 난’을 일으켰다. 그 때문에 콩데 공(prince)이 뱅센성에 갇혔다가 13개월 뒤에 석방되었다.  

1660~1661년 사이 겨울에 루브르궁에서 연회를 준비하다 화재가 났다. 루이 14세는 뱅센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노환과 통풍에 걸린 마자랭도 뱅센궁으로 갔다가 3월9일에 세상을 떴다. 이렇게 해서 22살의 루이 14세가 친정체제를 선포했다. 그는 마자랭이 죽기 전에 천거한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를 기용했다.

콜베르는 왕보다 부자였던 재무총관 푸케(N. Fouquet)의 장부를 조사했다. 1661년 8월에 루이 14세는 푸케의 ‘보르비콩트’(Vaux-le-Vicomte) 성에 초대받아 극진한 대접을 받고서도 푸케를 부정축재 혐의로 체포하려다가 꾹 참았다. 9월5일에 그는 총사 다르타냥(d’Artagnan, Charles de Batz de Castelmore)에게 푸케를 체포하고 밀착 감시하라고 명령했다. 푸케는 뱅센 감옥에 갇혔다가, 이듬해 바스티유 감옥에서 재판을 받았고 토리노의 피뉴롤로 추방되어 1680년에 65살로 죽었다.

푸케에게 했던 것처럼 부정한 돈을 쓰지 못하게 하는 벌을 우리나라에 도입하고 싶다. 29만원이 전재산이라는 부정축재자와 아들이 생각난다. 감옥에서의 ‘황제노역’은 최저임금제로 바꾸자고 제안한다. 그렇게 되면 국회의원·재벌이 앞장서서 최저임금을 올리자고 할지 모른다. 수형자는 사식을 반드시 조달청에서 구하게 하자. 공무원은 내 말뜻을 이해할 것이다.

18세기 초 뱅센 숲과 뱅센성의 모습을 그린 프랑스 화가 장바티스트 마르탱의 그림. 1724년 작품. 위키피디아
18세기 초 뱅센 숲과 뱅센성의 모습을 그린 프랑스 화가 장바티스트 마르탱의 그림. 1724년 작품. 위키피디아

디드로(D. Diderot)는 1749년에 세태를 풍자한 <맹인들에 대한 편지>를 쓰고 뱅센의 아성에 갇혔다가 당국의 배려로 정원을 자유롭게 산책할 수 있었다. 제네바 태생으로 파리에 와서 살롱을 드나들던 장자크 루소는 어느 날 그를 면회하러 가는 길에 뱅센 숲에서 잠시 쉬면서 신문을 읽다가 디종 아카데미가 내건 “학문과 기예의 발전은 인간 본성을 순화하는 데 이바지했는가?”라는 현상 논제를 보았다. 그때까지 그가 막연히 생각하던 체계가 한순간에 질서를 갖추었고, 무아지경에서 흘린 눈물로 앞섶을 흠뻑 적셨다.

그는 디드로를 만나서 논제에 대해 얘기했다. 디종 아카데미는 진보에 대한 낙관론을 예상했을지 모르지만, 부정적으로 답해보라는 디드로의 충고를 받아들인 루소는 사회가 발달할수록 인간 본성이 자연에서 비극적으로 멀어졌다고 설파해서 상을 받았다. 루소는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이기심을 버리고, 본성(자연)이 가지는 자기애와 동정심을 잘 보전해야 한다는 주장을 그 후의 모든 작품에서 발전시켰다.

경제학자이며 <인간의 친구, 또는 인구론>(L’Ami des hommes ou Traité de la population, 1756)의 저자인 미라보 후작과 장차 입헌군주제 헌법에 이바지할 맏아들 미라보 백작도 각각 뱅센성에 갇힌 적이 있다. 아버지 후작은 고대하던 맏이가 태어나자마자 아내에게 “부인, 놀라지 마세요”라고 경고했다. 아기는 머리가 유난히 크고 못생겼다. 더욱이 아기가 설소대 장애(혀 밑에 있는 주름 모양의 근육이 짧아 발음이 분명하지 못한 것)를 안고 태어났기 때문에 수술한 뒤에야 제대로 말할 수 있었다. 그가 다섯살 때인 1754년에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오를레앙 공작의 자녀들에게 우두접종을 했는데, 그는 그 혜택을 받지 못하고 천연두에 걸려 평생 얼굴에 상처를 가지고 살았다.

그럼에도 그는 교양과 글재주와 함께 유부녀까지 연인으로 만드는 재주를 발휘했다. 그 때문에 아버지는 아들을 가두는 봉인장을 요청했다. 미라보 백작은 1777년 6월7일부터 42개월 동안 뱅센에 갇혔다. 그는 <들춰진 커튼, 또는 로르의 교육>(Le rideau levé ou l’éducation de Laure) 같은 ‘엿보기’(voyeurisme) 작품을 남겼다. 당시에는 금서를 ‘철학책’이라고 불렀는데, 그가 익명으로 남긴 작품은 ‘여성교육’을 표방했으니 ‘철학책’으로 인정해줄 만하다. 로르가 ‘엿보기’로 성에 눈뜨고, 자기 몸에 대해 스스로 알아가는 과정은 칸트의 말대로 “감히 알려고 하라”(sapere aude)는 계몽주의에 부합했다.

뱅센성의 남문. 위키피디아
뱅센성의 남문. 위키피디아

마타 하리가 처형된 뱅센 숲

19세기에 생긴 ‘포르노그래피’라는 영역의 효시라 할 작품을 쓰고 ‘사디즘’으로 영원히 이름을 남긴 사드 후작(1740∼1814)은 ‘성매매 여성’들에게 약을 먹이고 학대했다. 그는 37살인 1777년 2월13일에 뱅센 감옥에 갇혔다. 그와 미라보 백작은 거의 3년을 뱅센성에서 함께 보냈지만, 두 사람이 만났는지 알 수 없다. 사드는 1784년 2월29일에 바스티유로 이감되었고, 1785년 10월 하순부터 한달 동안 <소돔의 120일>을 몰래 써서 감방 벽 틈에 감췄다. 그는 1789년 7월1~2일 사이에 발작했다. 이틀 뒤에 바스티유 요새 사령관은 그를 샤랑통 정신병원으로 보냈다. 그리고 빈 감방을 수색할 때 12m짜리 두루마리 원고를 찾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달했을 때 뱅센성 근처 숲에서 부역자와 간첩을 처형했다. 1917년 10월15일에 마타 하리가 처형되었다. 마타 하리를 뱅센성의 안마당이나 해자 또는 숲 어딘가 포격장에서 처형했다는 설과 증거 사진이 있지만, 아직도 마타 하리가 독일 간첩이라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정확한 처형 장소를 몰라서 안타까워한다.

뱅센성을 하루에 둘러보기도 벅차다. 나중에라도 넓은 뱅센 숲에서 동물원·수족관·마차경주장을 찾아도 좋다. 루소처럼 나무 아래서 무아지경에 빠져 그가 바라던 대로 겉과 속이 일치하는 기적을 바라도 좋겠다. 루소가 바라는 것은 위선이 없는 인간관계였다. 그의 바람대로 된다면, 얼굴에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날 테니, 모든 관계가 투명해질 것이다.

▶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바스티유의 금서>와 <파리의 치마 밑> 등 프랑스 사회 및 문화사에 관한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한국 역사가의 눈으로 해석한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을 지난해 완간했다. 현대 민주주의를 개척해온 프랑스사를 장소와 인물 중심으로 풀어보려고 한다. 격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