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오피니언칼럼

[한겨레 프리즘] 어떤 침묵이 열 미래 / 김경락

등록 :2020-08-04 17:48수정 :2020-08-05 02:11

6월18일 서울 송파구 잠실동의 한 부동산중개업소에 아파트 매매 전단이 붙어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6월18일 서울 송파구 잠실동의 한 부동산중개업소에 아파트 매매 전단이 붙어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김경락 ㅣ 산업팀장

연수를 마치고 업무에 복귀한 지난해 10월 당시 조국 법무부 장관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한창이었다. 이를 둘러싼 논란 속 한국 사회는 ‘1년 전 내가 알던 우리나라가 맞나’란 의문이 들 정도로 낯설었다. 한국 사회의 속살에 무심했던 것인지, 연수 기간 동안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좀 더 섬세해진 덕택인지, 아니면 우리 사회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고 있는지 종잡기 어려웠다. 점잖은 취재원들도 어느 지점에선 서로 다른 방향에서 발끈했고, 비슷한 생각을 가진 무리라고 여겨온 곳도 심각한 내홍을 겪고 있었다. 드문드문 메시지가 올라오던 어릴 적 친구들의 단톡방에서도 날 선 토론이 제법 길게 이어졌다.

코로나19 확산이 본격화될 즈음이던 지난 2월 말 국내 벤처 1세대에 속하는 한 아이티(IT)·플랫폼 업계 인사는 ‘재난 기본소득’ 도입을 요구하는 국민 청원글을 올렸다. 이 주장은 21세기 여론 주전장인 에스엔에스(SNS)를 뜨겁게 달구더니 이내 코로나19 대응에 굼뜨던 정부와 정치권 중심에까지 파고들었다. 빛처럼 빠른 전개인 터라 ‘코로나19로 더 많은 돈을 벌고 있는 이에게도 세금을 줘야 하나’, ‘필요한 사람에게 더 많은 지원을 해야 하지 않나’ 등의 당연한 물음은 생략되다시피 했다.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보듬으려는 순정한 마음이 너무 커, 부작용을 살피거나 다른 목소리를 들을 여유가 없는 듯싶었다.

최근 미디어와 인터넷, 정치권 등 공론장은 주택 시장 불안이 집어삼키고 있다. 백가쟁명식 진단과 주장이 넘친다. 검찰 개혁을 외치던 법무부 장관도 국무위원 자격으로 ‘금부분리(금융과 부동산의 분리)론’이란 독특한 식견을 드러냈다. 모두 서민·중산층의 주거 안정을 강조한다지만,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례가 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서울 특정 지역 아파트 매매·전월세 값이다. 공론장에선 보증금 8억~10억원 하는 고가 전세 세입자도 공적 보호가 필요한 계층이 돼 있다.

부동산 공방이 시야를 가리던 지난달 31일 늦은 시각 보건복지부는 내년에 적용할 ‘기준 중위소득’ 산정 결과를 내놨다. 기준 중위소득은 생계·의료·주거·교육급여 등 우리 사회 빈곤층이 받는 공적 급여액과 지원 범위를 정하는 기준값이다. 이번부터 가구 소득 실태를 좀 더 엄정하게 반영하는 ‘가계금융복지조사’를 토대로 기준 중위소득을 산출하기로 한 터라 어느 때보다 기초수급 범위가 크게 넓어지고 급여액도 오를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의아할 정도로 낮은 인상률이 나왔다. 기준 중위소득(4인가구 기준)은 한 해 전에 견줘 2.68% 오르는 데 그쳤다. 지난해 인상률(2.94%)보다도 낮다. 이에 기준 중위소득의 30%가 책정되는 최대 생계급여액도 한해 전보다 3만8천원만, 기준 중위소득 40% 이하 가구가 수급 대상인 의료급여는 5만원만 인상됐다. 빈곤 실태를 고스란히 반영해 기준 중위소득을 끌어올릴 경우 늘어날 재정 부담을 정부가 호소했다는 뒷말이 들려왔다. 늦은 시각 발표인 탓인지 <한겨레> 등 일부 매체를 빼면 이 사안을 충분히 다룬 언론은 드물었다. 그로부터 나흘이 흐르는 동안 쥐꼬리 급여액 인상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질타하는 정치인이나 국무위원, 벤처기업가, 지식인들도 없다. 기이한 공론장의 침묵, 무심함이다.

여기에 이르면 누가 의도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한국 사회의 공론장이 진보와 보수가 뒤엉켜 전투를 벌이는 듯하나 실은 특정 계층의 관심사를 중심으로 의제를 선택하고 나머지 계층은 체계적으로 소외시키고 있는 건 아닌가 의구심이 든다. 소외의 영역이 커질수록 포퓰리즘이 분출될 토양은 넓어진다. 2016년 영국의 브렉시트(유럽연합 탈퇴) 결정이나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을 서구 사회는 포퓰리즘의 승리라고 평가하는데, 그 이전에 수년간 공론장에서 ‘잊힌 사람들’이 있었다.

sp96@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