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회사회일반

응급·중환자실까지 ‘실력행사’…“필수유지업무 제한해야”

등록 :2020-09-14 04:59수정 :2020-09-14 07:47

[의사 집단행동, 그 이후]

집단적 의사 표시하더라도, 생명은 지켜야
“공공병원 늘려 공익 복무 의사 양성 필요”
대한전공의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가 전공의 전원의 업무 복귀 결정을 내린 가운데 지난 9일 오전 서울 서초구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에서 의료진이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한전공의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가 전공의 전원의 업무 복귀 결정을 내린 가운데 지난 9일 오전 서울 서초구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에서 의료진이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의 의료정책 추진에 반발해 집단휴진을 벌인 의사들은 응급·중환자실 인력 철수도 불사했다. 필수인력이 현장에서 빠지자, 정부는 물론 거대여당까지 나서 ‘의료 공공성 강화’를 목적으로 내건 정책을 ‘원점 재논의’ 하겠다며 물러섰다. 환자를 볼모로 잡은 의사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유감없이 확인시켜준 셈이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등에 따라, 병원의 응급의료와 중환자 치료, 분만, 수술, 투석 등의 업무는 쟁의행위가 금지되는 필수유지업무다. 이조은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간사는 “응급실과 중환자실까지 비운 집단휴진은 노동조합법에 근거가 없는 명백한 불법적 진료 거부”라고 말했다.

한국 노조법이 단체행동권을 유독 제한해서 그런 게 아니다. 국제노동기구(ILO) 결사의자유위원회도 병원이 “생명과 안전, 건강에 긴박한 위협을 줄 수 있는 부문”이어서 파업을 제한할 수 있다고 본다. 세계의사회는 지난 2012년 제63회 총회에서 채택한 ‘의사 단체행동 가이드라인’을 통해 의사들이 단체행동에 나서더라도 “공공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파업 과정에서 기초·응급 의료서비스가 중단되는 일이 없도록 보장해야 한다”며 “가능하다면 비폭력적 시위나 로비, 홍보, 캠페인, 협상, 조정 등을 통해 개선을 요구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집단적인 의사 표시를 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을 지키는 선이어야 한다는 게 국제적인 상식인 셈이다.

‘전교 1등에게 진료받으라’는 한국의 의사들이 가운을 벗어던진 동안 환자 피해는 잇따랐다. 지난달 26일 부산에서 40대 남성이 응급처치를 받을 병원을 찾아 3시간가량 헤매다 뒤늦게 치료를 받았지만 숨졌다. 같은달 28일 경기 의정부시에선 심장마비로 쓰러진 30대 남성이 병원 4곳에서 ‘수용 불가’ 통보를 받고 응급실에 제때 못 가 목숨을 잃었다. 양현정 한국환자단체연합회 이사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실제로 중요한 암 수술이나 신장질환 수술을 미루게 된 환자들이 많다. 전공의들이 복귀했어도 일정이 정상화되려면 몇주 더 가야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배짱을 부릴 수 없는 건 정부·여당이었다. 전공의단체가 무기한 집단휴진을 벌인 지 2주 만에 정부와 여당은 의료정책의 ‘원점 재논의’를 약속했다. 업무개시명령에 응하지 않은 전공의 고발을 취하해, ‘원칙적 대응’은 으름장으로 끝났다. 의사 국가고시는 시험 자체를 일주일 순연하고, 두 차례나 응시 접수일을 미뤄줬다. 백기 투항이나 다름없었다.

시민사회에선 이런 사태의 재발을 막을 대책이 절실하다고 지적한다. 핵심은 공공성 강화를 통한 공적·사회적 통제다. 정형준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은 “집단행동을 하더라도 응급실, 중환자실을 비워선 안된다는 건 기본적인 윤리의 문제”라며 “공공의료기관을 늘리고 최소한 이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공적 지위와 책임을 부여해야 (집단휴진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시장에서 경쟁해 살아남을 의사가 아니라, 공익에 기여하는 의사를 길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김창엽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병원 안에서 전공의의 역할과 비중이 줄면, 이들이 집단행동을 해도 영향이 줄어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공의들은 현재 주 80시간 이상 근무하며 환자 진료와 치료, 수술 등 거의 대부분 업무를 보조한다. 명목은 ‘수련’이지만, 병원들이 비용을 줄이려고 전문의 채용을 늘리지 않아 생기는 일이기도 하기에 전문의 채용을 정상화하자는 얘기다. 김민제 권지담 기자 summe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