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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귀 난의 ‘성적 기만’…성호르몬으로 하늘소 유혹해 생식

등록 :2021-04-06 14:38수정 :2021-04-06 16:53

[애니멀피플]
난(蘭)의 성적 기만술 대상 딱정벌레 첫 사례…희귀한 식물의 번식법
남아프리카 케이프 식물구계의 희귀 난 꽃이 암컷 하늘소의 형태와 페로몬으로 수컷 하늘소를 유인한 뒤 하늘소가 짝짓기 행동을 하고 있다. 난 꽃잎 끄트머리가 더듬이처럼 생겼다. 캘런 코헨 외 (2021) ‘커런트 바이올로지’ 제공
남아프리카 케이프 식물구계의 희귀 난 꽃이 암컷 하늘소의 형태와 페로몬으로 수컷 하늘소를 유인한 뒤 하늘소가 짝짓기 행동을 하고 있다. 난 꽃잎 끄트머리가 더듬이처럼 생겼다. 캘런 코헨 외 (2021) ‘커런트 바이올로지’ 제공

난의 기발한 가루받이 전략의 하나는 암컷 곤충을 흉내 내는 것이다. 오프리스 속 난은 꽃이 벌 암컷의 형태를 빼닮은 데다 성호르몬까지 분비해 흥분한 매개곤충 수컷이 가루받이를 하도록 유도한다.

처음으로 벌이나 말벌이 아닌 하늘소를 유인해 가루받이하는 난이 발견됐다. 성적 기만이 극도로 희귀한 식물이 살아남을 수 있는 생식 전략으로 주목된다.

오프리스 속 난의 하나. 꽃이 암컷 벌이나 말벌을 닮았고 성호르몬을 방출해 수컷을 유인한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오프리스 속 난의 하나. 꽃이 암컷 벌이나 말벌을 닮았고 성호르몬을 방출해 수컷을 유인한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남아프리카 페른클루프 자연보호구역에서는 2018년 난 한 포기가 발견돼 식물학계의 화제가 됐다. 디사 포르피카리아(Disa forficaria)란 이름의 이 난은 1966년 마지막으로 관찰된 뒤 멸종한 것으로 여겨졌다.

지난 200년 동안 전 세계에 오직 11개의 표본만 남긴 이 희귀한 난이 개화한 모습을 지켜보던 캘런 코헨 케이프타운 대 생물학자는 특별한 광경을 목격했다. 꽃에 들어간 하늘소가 짝짓기하는 동작을 이어갔다.

이 난의 연한 바깥 꽃잎 안쪽에 있는 자줏빛 속 꽃잎의 끄트머리는 양쪽으로 길게 갈라져 털이 나 하늘소의 더듬이처럼 생겼다. 몸이 꼭 들어갈 크기의 꽃 속 움푹 팬 곳에서 수컷 하늘소는 암컷과 짝짓기하듯 더듬이 모양의 꽃잎을 물고 배를 움직였다.

코헨은 나중에 하늘소의 배 끝이 닿은 곳에서 1만 마리 이상의 하늘소 정자를 확인했다. 난이 곤충을 성적으로 유인해 가루받이를 시도하는 사례는 많아도 이처럼 사정까지 이뤄진 사례는 극히 드물다.

코헨 등은 과학저널 ‘커런트 바이올로지’ 최근호에 실린 논문에서 이런 사실을 보고하면서 “딱정벌레도 성적 기만을 통해 난의 가루받이에 이용될 수 있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희귀 난을 가루받이하는 하늘소 수컷의 배에 난의 꽃가루가 달려 있다. 캘런 코헨 외 (2021) ‘커런트 바이올로지’ 제공
희귀 난을 가루받이하는 하늘소 수컷의 배에 난의 꽃가루가 달려 있다. 캘런 코헨 외 (2021) ‘커런트 바이올로지’ 제공

연구자들은 이 난이 하늘소를 유인하는데 쓴 성호르몬인 페로몬을 화학분석을 통해 규명하고 ‘디살락톤’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고유종 난이 발견된 지역은 유네스코 자연유산으로 지정된 케이프 식물 구계에 포함되는 세계적 생물 다양성의 보고이다. 그러나 반세기 만에 발견된 이 난은 이듬해인 2019년 감쪽같이 사라졌다. 난이 자라던 곳에는 사람이 캐갔는지 동물이 파헤쳤는지 구멍이 남았을 뿐이었다.

희귀 난 꽃의 구조. 가운데 꽃가루가 달려 짝짓기하려는 수컷의 배에 쉽게 묻는다. 캘런 코헨 외 (2021) ‘커런트 바이올로지’ 제공
희귀 난 꽃의 구조. 가운데 꽃가루가 달려 짝짓기하려는 수컷의 배에 쉽게 묻는다. 캘런 코헨 외 (2021) ‘커런트 바이올로지’ 제공

2020년 또 다른 반전이 일어났다. 연구자들이 디살락톤의 효과를 검증하기 위해 현장에서 냄새를 퍼뜨렸더니 하늘소가 몰려들었는데 그 가운데 수컷 3마리의 배 밑에 사라진 난의 꽃가루가 붙어 있었다.

연구자들은 “꽃가루의 디엔에이(DNA) 분석 결과 사라진 난으로 확인됐다”며 “사람이 찾을 수는 없지만 이 근처 어딘가에 난이 생존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고 밝혔다.

세계적 희귀 난인 디사 포르피카리아와 가루받이 곤충인 하늘소. 캘런 코헨 외 (2021) ‘커런트 바이올로지’ 제공
세계적 희귀 난인 디사 포르피카리아와 가루받이 곤충인 하늘소. 캘런 코헨 외 (2021) ‘커런트 바이올로지’ 제공

이번 연구를 통해 이 난처럼 극도로 희귀한 식물이 가루받이를 위해 성적 기만술을 진화시켰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연구자들은 “워낙 개체수가 적은 식물은 가루받이 동물에게 먹이를 제공하는 전통적인 방식은 먹히지 않는다”며 “성적 기만술을 통해 이 난은 개체군 밀도가 낮으면서도 높은 수준의 가루받이를 달성해 성공적으로 씨앗을 맺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하늘소가 포함된 딱정벌레는 동물 종의 25%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다양하고 꽃을 찾는 종도 7만7000종에 이른다. 그런데도 벌이나 말벌과 달리 이번 하늘소처럼 딱정벌레의 극히 일부만이 성적 기만술의 대상이 된 이유는 뭘까.

연구자들은 “식물이 딱정벌레 페로몬 체계에 맞는 화학물질을 만드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일 수 있다”고 밝혔다.

인용 논문: Current Biology, DOI: 10.1016/j.cub.2021.03.037

조홍섭 ecothin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