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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관자였던 우리에게…‘무얼 하고 있는가’ 묻고 떠난 친구 김의기”

등록 2021-11-25 20:59수정 2021-11-26 02:33

[전두환 사망 - 사과받지 못한 사람들]
5·18 때 상무대 근무한 정수연씨
당시 참옥한 학살현장 간접 경험
전씨 사망 듣고 친구 김의기 떠올려
1980년 5월27일 광주가 강제로 진압되고 사흘 후 광주 학살을 알리다가 투신해 숨진 김의기 열사와 대학 동기 정수연(왼쪽)씨가 1978년 11월에 찍은 사진. 정수연씨 제공
1980년 5월27일 광주가 강제로 진압되고 사흘 후 광주 학살을 알리다가 투신해 숨진 김의기 열사와 대학 동기 정수연(왼쪽)씨가 1978년 11월에 찍은 사진. 정수연씨 제공

끝내 반성하지 않고 세상을 뜬 전두환씨는 5·18민주화운동 생존자나 희생자 유족 등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사과받지 못한 이들’의 아픔은 상흔으로 남게 됐지만, 트라우마는 피해자들만의 것은 아니다. ‘목격자’로서 당시 상황을 지켜봐야만 했던 이들에게도 치유될 수 없는 고통을 남겼다.

5·18 시민군으로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가 고초를 겪었던 염동유씨 인터뷰 기사(<한겨레> 24일치 4면)를 보고 연락해온 정수연(65·경기 용인시)씨도 그런 이 가운데 한명이다.

“피비린내 났던 비극적인 1980년 5월, 광주 군 상무대에서 일등병 군인으로 근무 중이었다”는 그는 25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군부대로 출퇴근하는 단기사병들한테 군인들이 총검으로 부녀자들을 찌른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육군 최대 군사교육시설인 상무대는 당시 전남 장성으로 이전하기 전이어서 광주에 있었다. 57통신대대 의무병이자 대대장 당번병이었던 정씨는 당시 지원부대 소속이어서 총알 없는 카빈총을 들고 야간보초를 섰다.

“그때 사람들이 죽어 왔다고 해서 (직접) 가서 본 거죠. 눈알이 튀어나오고, 복부의 창자가 나오고…. 총상이 상처가 크잖아요.” 정씨는 5월27일 5·18항쟁이 진압된 뒤의 상황도 기억이 생생하다. “잡혀 온 이들의 윗옷을 다 벗겼어요. 총알이 나오면 등바닥에 (매직으로) 총기소지라고 쓰고요. 총알을 입에 넣어 물게 하고 종아리를 밟고 두들겨 팼어요. 기절하고 난리가 났지요. 군인들이 인간이 아니구나 생각했어요.”

그렇게 영내에서 광주학살을 간접경험한 정씨는 일기장에 그때의 충격적인 심경을 담은 시 5편을 남겼다.

“…함성/ 총성/ 아우성/ 그리고,/ 어둠이.// 밤이 갔다./ 하늘이 밝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늘은 시치미다./ 젖은 땅 축축한 세상/ 그리고, 죽음이 아침을 노려본다//…”(1980년 5월22일·‘함성과 총성’)

경기도 용인에 사는 정수연씨는 1980년 5월 상무대에서 군 생활을 하며 광주의 참상을 목격했다. 정수연씨 제공
경기도 용인에 사는 정수연씨는 1980년 5월 상무대에서 군 생활을 하며 광주의 참상을 목격했다. 정수연씨 제공

국립5·18민주묘지에 있는 김의기 열사 묘. 김의기기념사업회 제공
국립5·18민주묘지에 있는 김의기 열사 묘. 김의기기념사업회 제공

지난 23일 전씨 사망 뉴스를 듣고 정씨는 서강대 무역학과 76학번 동기인 김의기(1959~80)가 가장 먼저 생각났다고 했다. 김의기 열사는 5·18항쟁이 피로 진압된 직후인 5월30일 서울 종로 기독교회관에서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적힌 유인물을 뿌리고, 창문 밖으로 몸을 던져 숨졌다.

농민운동 행사에 참석하려고 광주를 찾았다가 그날의 참상을 직접 목격한 김의기 열사는 유인물에서 “무참한 살육으로 수많은 선량한 민주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오월의 하늘 아래 뿌리게 한 남도의 공기가 유신 잔당들의 악랄한 언론탄압으로 왜곡과 거짓과 악의에 찬 허위선전으로 분칠해지고 있는 것을 보는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물었고, 5·18 뒤 패배감에 빠져 있던 많은 이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제목의 유인물.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정씨는 “5·18 직전에 휴가를 나와 교정에서 만났던 김의기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다”며 “군인이었던 나는 그때(5·18민주화운동 때) 방관자였을 뿐인데, 시민군으로 참여했던 염동유씨를 한번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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