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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욕된 시간”과 “벌거벗은 긍지” 사이 생활고의 설움

등록 2021-06-28 04:59수정 2021-06-28 08:21

[거대한 100년 김수영] ⑥ 설움

생활고 속 비애를
낱낱이 의식하면서도
노동을 거부하고
정신의 ‘위치’를 찾는 것
여기서 설움이 촉발돼

성직자나 예술가처럼
‘세속적 속물근성’ 경계는
자신에 대한 긍지로
가득한 자가 취하는
자발적인 소외였다
‘돈’ 초고. 김현경 제공
‘돈’ 초고. 김현경 제공

특정 정념이나 감정은 그것을 촉발시키는 대상과의 마주침에 의해 발생한다. 대상은 정념의 원인이며 그 대상과의 마주침에는 구체적이고 인접적인 여건이 주어진다. 다시 말해 정념은 우리의 정신에 구축되어 있는 추상적 관념의 다발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한편 연민, 공포, 사랑, 분노, 슬픔, 외로움 등과 같이 세분화되어 지칭되는 정념은 각각 하나의 낱말로 표현되곤 하지만 대부분의 정념은 하나의 낱말로 표현될지라도 언제나 하나 이상의 정념과 연합된다는 점에서 그 실상은 복합적이다. 이와 같은 정념의 특성은 김수영 시인이 드러낸 대표적 정념이라 할 수 있는 ‘설움(비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김수영의 시에 종종 적시된 ‘설움’은 한마디로 말해 ‘일상생활’로부터 배태된 정념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설움’은 1950년대 중반에 집중적으로 표현되지만 생활과 연동된다는 점에서 시 전반에 배어 있는 근본적 감정이며 그의 사상을 구축하는 데 크게 영향을 끼친 바탕이기도 하다. 일상생활을 꾸려나간다는 것은 거칠게 말해 생존의 조건, 즉 빈곤과 풍요의 기반과 맞물린 상황에서의 대응 방식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김수영이 생활에 대해 가졌던 태도는 어떠했는가? 그는 남들처럼 어려운 생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동을 하거나 해결책을 궁리하는 것을 유보한다. 생활고와 깊게 관련된 산문 ‘일기초(抄) 1’(1954. 12. 30)을 읽어보면 생활인으로서 기꺼이 일을 해야 한다는 당위에 대해 “돈을 버는 일에 게을러야 한다는 것이 하나의 의무”, “일을 시작하는 시간은 제일 불순한 시간”이며 “제일 욕된 시간이라고 단정”하기까지 한다.

이와 같은 의식은 조부를 비롯한 가족들의 특별 대접을 받으며 성장했던 그의 전기와 맞물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일례로 1944년 김수영은 생활고의 어려움 때문에 길림을 오가던 어머니를 따라 길림에 머물며 연극 활동을 하다 1945년 길림의 상황이 흉흉해지자 천신만고 끝에 서울로 돌아온 적이 있다. 그 험난한 귀향길에서 그의 어머니가 거지꼴로 식량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동안 김수영은 처마 밑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고 최하림 시인은 평전에 기록하고 있다. 25살 청년의 이러한 행동은 극단적 이기주의인가 아니면 이미 그의 정신에 각인된 선비적 기질인가? 이러한 태도를 단숨에 김수영이 생활에 대해 무관심했다거나 초연했다고 오인해서는 안 된다. 1963년에 쓴 시 ‘돈’에는 “그러나 내 돈이 아닌 돈/ 하여간 바쁨과 한가와 실의와 초조를 나하고 같이한 돈/ 바쁜 돈―”이라고 쓰고 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그가 생활에 대해 그만큼 예민하게 정신적으로 시달렸음을 말해준다.

시집 <달나라의 장난> 출간을 위해 김수영의 부인 김현경 여사가 원고지에 정서한 김수영 시인의 시 ‘헬리콥터’ 첫 장. 김현경 제공
시집 <달나라의 장난> 출간을 위해 김수영의 부인 김현경 여사가 원고지에 정서한 김수영 시인의 시 ‘헬리콥터’ 첫 장. 김현경 제공

노동을 거부하면서 동시에 생활로부터 비롯된 한가와 실의와 초조를 낱낱이 의식했던 것이 김수영의 의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생활과 “의지의 저쪽에서 영위하는 아내”(‘사치’, 1958)가 자신의 자존심을 실추시킬 때 그것을 윤택하게 만드는 일에 전념하기보다 오히려 생활과 거리를 두며 생활과 자신을 구별해줄 수 있는 ‘정신의 위치’를 확보하는 쪽으로 태도를 강화한다. 김수영의 화자는 ‘나의 가족’(1954)에 “차라리 위대한 것을 바라지 말았으면/ 유순한 가족들이 모여서/ 죄 없는 말을 주고받는/ 좁아도 좋고 넓어도 좋은 방 안에서/ 나의 위대의 소재(所在)를 생각하고 더듬어 보고 짚어 보지 않았으면”이라고 고백하고 있는데, 이러한 고백은 그가 가족과 생활하는 가운데 무엇을 열망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예이다. 즉 그에게 생활의 하중은 가난에 있는 것이라기보다 자신의 정신의 ‘위치’에 있는 것이다. 김수영의 설움의 정념은 바로 이 지점에서 촉발된다.

“남의 일하는 곳에 와서 덧없이 앉았으면 비로소 설워진다/ 어떻게 하리/ 어떻게 하리”(‘사무실’, 1954), “돈 없는 나는 남의 집 마당에 와서/ 비로소 마음을 쉬다/ (…) / 마음을 쉰다는 것이 남에게도 나에게도/ 속임을 받는 일이라는 것을/ (쉰다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면서)/ 쉬어야 하는 설움이여”(‘휴식’, 1954)와 같은 구절을 보면 김수영의 설움은 노동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이 일하지 않는 상태로 있을 때, 혹은 휴식할 때 촉발된다. 주목을 요하는 심리상태라 할 수 있다. 이때 그에게 휴식한다는 것, 마음을 쉰다는 것은 “속임을 받는 일”과 등가적이다. 쉬는 행위가 거짓 행위와 동일한 것으로 자의식을 찌를 때 설움의 정념이 쏟아지는 것이다. 여기에는 돈을 벌기 위한 노동을 거부하면서 동시에 마음을 쉬어서는 안 된다는 모순이 집산되어 있다. 그로부터 배출되는 것이 설움이다.

한편 이 설움은 ‘고절’의 정념과 연합된다. 시 ‘생활’(1959)을 보면 “무위와 생활의 극점” 사이를 왕복하며 “생활은 고절(孤絶)이며/ 비애였다”고 고백하는 화자와 만나게 된다. “남의 일하는 곳에 와서 덧없이 앉았”(‘사무실’)는 어긋남의 상황이 바로 심리적 ‘고절’이 생성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이 고절의 지점은 생활(노동)을 무위(無爲)로 응대할 때 생겨나는 심리적 공간이며 이 공간에 들어서는 것이 설움인 것이다. 그렇다면 김수영의 ‘무위’로서 설움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시 ‘거미’(1954)의 첫 행에 보이는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은 앞서 소개했던 위대함을 꿈꾸는 자아(‘나의 가족’)와 동일한 의식을 드러낸다. 김수영의 설움은 생활 속에서 생활과는 다른 차원의 것을 소망하는 데서, 자신의 위대함을 입증하려는 열망에서 비롯된다. 그것이 다른 사람의 관점으로는 생활과 직접 관련된 가시적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위로 판단되며 ‘나’의 관점으로는 생활과 마찰하는 자의식의 고통을 거느리기 때문에 설움의 정념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순을 감내하면서 설움의 감정을 토로하는 태도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것은 생활에 대한 무능이나 무책임, 혹은 회피와는 전혀 다른 자발적 선택으로 읽힌다.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아울러 그의 시편 곳곳에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자기애(自己愛)가 강하게 노출되곤 한다. 이 같은 자기이해와 더불어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촉발되는 설움은 그 안에 이미 긍지를 내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김수영의 설움은 긍지로 나아가기 위한 단계가 아니라 이미 긍지를 포함한 정념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시 ‘긍지의 날’(1953)의 “모든 설움이 합쳐지고 모든 것이 설움으로 돌아가는/ 긍지의 날”이라는 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수영의 생활과의 거리두기, 그로부터 야기되는 설움은 자신에 대한 긍지로 가득한 자가 취하는 자발적 소외라 할 수 있다.

시집 &lt;달나라의 장난&gt; 출간을 위해 김수영의 부인 김현경 여사가 원고지에 정서한 김수영 시인의 시 ‘휴식’ 첫 장. 김현경 제공
시집 <달나라의 장난> 출간을 위해 김수영의 부인 김현경 여사가 원고지에 정서한 김수영 시인의 시 ‘휴식’ 첫 장. 김현경 제공

자발적 고절로서의 소외를 감수하는 자는 사회 속에서 일반적으로 높이 평가되는 목표나 신념에 대해 큰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진정한 지식인, 성직자, 교육자, 예술가가 그러한 부류에 속한다. 시인 또한 늘 세속적 속물근성을 경계하는 자이다. 김수영이 자신의 소시민적 속물근성을 자학적으로 폭로하는 이유도 자기검열과 연관된다. 그는 생활을 잘 영위하기 위해 행하는 노동이나 그것에 의한 부의 축적, 일상적 안락과 화목을 위한 행위를 통해 만족스러운 정신적 보상에 이르지 못한다. 그의 정신적 보상을 가능케 하는 것은 생활과는 다른 차원의 ‘위대함’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위대함을 꿈꾸며 사유할수록 생활의 하중은 그를 괴롭힌다. 이때 김수영의 화자는 일상적 활동에 적극성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위와 고절이라는 독특한 위치를 점함으로써 생활로부터 자신을 떼어낸다. 이 소외의 위치는 정신적 보상을 얻기 위한 고통의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시집 &lt;달나라의 장난&gt; 출간을 위해 김수영의 부인 김현경 여사가 원고지에 정서한 김수영 시인의 시 ‘사무실’ 첫 장. 김현경 제공
시집 <달나라의 장난> 출간을 위해 김수영의 부인 김현경 여사가 원고지에 정서한 김수영 시인의 시 ‘사무실’ 첫 장. 김현경 제공

“헬리콥터여 너는 설운 동물이다”// ―자유/ ―비애// 더 넓은 전망이 필요 없는 이 무제한의 시간 위에서/ 산도 없고 바다도 없고 진흙도 없고 진창도 없고 미련도 없이/ 앙상한 육체의 투명한 골격과 세포와 신경과 안구까지/ 모조리 노출 낙하시켜 가면서/ 안개처럼 가벼웁게 날아가는 과감한 너의 의사 속에는/ 남을 보기 전에 네 자신을 먼저 보이는/ 긍지와 선의가 있다

― ‘헬리콥터’(1955) 부분

김수영은 헬리콥터의 비행을 보며 시·공간의 제한성으로부터 벗어난 자유, 삶의 질곡을 의미하는 진흙과 진창과 미련을 떨쳐낸 홀가분함, 그리고 골격과 세포와 신경과 안구가 함의하는 육체성의 무게감을 덜어내는 노출 낙하의 가벼움의 상태를 사유한다. 여기에는 생활의 차원을 과감하게 벗어나는 ‘의사’(意思)의 힘이 내포되어 있다. 이는 자신의 정신과 육체를 한정지으려 하는 일체의 것으로부터의 ‘고립’을 시사한다. “남을 보기 전에 네 자신을 먼저 보이는” 당당한 고립, 그것은 벌거벗은 긍지이며 선의이며 자유이며 비애다. 생활에 좌우되지 않는 소외의 위치를 만듦으로써 그의 ‘설움의 긍지’는 생성된다. 이러한 정신의 결연함을 통해 김수영은 생활 속에서의 뚜렷한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고자 했으며 생활에 흡수되지 않는 자의 정신세계를 보존하고자 했던 것이다.

엄경희 문학평론가, 숭실대 교수

서울시 도봉구 김수영문학관에 있는 시인의 휴상.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서울시 도봉구 김수영문학관에 있는 시인의 휴상.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lt;지성계&gt; 1호(1964. 8.)에 발표된 시 ‘돈’ 앞부분. 맹문재 제공
<지성계> 1호(1964. 8.)에 발표된 시 ‘돈’ 앞부분. 맹문재 제공

엄경희 교수.
엄경희 교수.

긍지의 날

너무나 잘 아는
순환의 원리를 위하여
나는 피로하였고
또 나는
영원히 피로할 것이기에
구태여 옛날을 돌아보지 않아도
설움과 아름다움을 대신하여 있는 나의 긍지
오늘은 필경 긍지의 날인가 보다

내가 살기 위하여
몇 개의 번개 같은 환상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꿈은 교훈
청춘 물 구름
피로들이 몇 배의 아름다움을 가하여 있을 때도
나의 원천과 더불어
나의 최종점은 긍지
파도처럼 요동하여
소리가 없고
비처럼 퍼부어
젖지 않는 것
그리하여
피로도 내가 만드는 것
긍지도 내가 만드는 것
그러할 때면은 나의 몸은 항상
한 치를 더 자라는 꽃이 아니더냐
오늘은 필경 여러 가지를 합한 긍지의 날인가 보다
암만 불러도 싫지 않은 긍지의 날인가 보다
모든 설움이 합쳐지고 모든 것이 설움으로 돌아가는
긍지의 날인가 보다
이것이 나의 날
내가 자라는 날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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