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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기사만도 못한 시” “가장 경멸”…애증의 대상 박인환

등록 2021-07-04 17:14수정 2021-07-05 02:34

[거대한 100년, 김수영] ⑦ 박인환

박인환이 ‘신시론’ 만들 때
자신 빼고 만들자 불만
산문 다섯 편, 시 한 편에
못마땅한 어조로 언급

이념무관 예술인 아지트인
‘마리서사’ 만들고
새 시어에 대한 열정 인정

자신이 불만을 터뜨려도
웃음 건네리라는 믿음 있어
김수영(왼쪽)과 박인환. 조병화문학관 제공
김수영(왼쪽)과 박인환. 조병화문학관 제공

어느덧 많은 독자들은 김수영 시인과 박인환 시인을 마치 라이벌 관계라도 되는 듯 여기고 있다. 두 시인의 관계를 이와 같이 만든 장본인은 김수영이다. 작품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엄격한 그가 다섯 편의 산문과 한 편의 시에서 박인환을 호명한 것은 아주 예외적인 일이다. 더욱이 매우 못마땅한 어조로 박인환을 언급하고 있으므로 독자들은 왜 그랬을까 하고 궁금해하는 것이다.

김수영이 산문 ‘마리서사’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박인환을 처음 만난 것은 해방 직후 극단 ‘청포도’의 사무실에서였다. 박인환이 들뜬 목소리로 연극에 관심을 보이자 김수영은 만주에서 힘들게 연극을 하다가 돌아온 뒤라서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박인환의 첫인상에도 호감을 갖지 않았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박인환은 종로의 낙원동에 ‘마리서사’라는 서점을 열고 예술가들의 아지트로 만들었다. 김수영도 해외에서 수입한 책들을 구경하거나 헌책을 팔려고 그곳을 드나들었다. 훗날 김수영의 부인이 된 김현경의 추억에 따르면 그곳에서 박인환이 사주는 짜장면을 어울려 먹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김수영은 박인환이 일본의 전위 시인들에게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의 습작 시를 읽기도 했다. 그가 일본말에 서툴고 우리말조차 잘 구사하지 못한다고 여기면서도 식물·동물·기계·정치·경제·수학·철학·천문학·종교와 관계된 용어를 멋지게 쓰는 작품들을 보면서 흥미를 가졌다.

자유문학상 시상식장에서. 오른쪽 둘째가 박인환. 그 왼쪽이 시인 조병화다. 출처 <세월이 가면>(근역서재, 1982)
자유문학상 시상식장에서. 오른쪽 둘째가 박인환. 그 왼쪽이 시인 조병화다. 출처 <세월이 가면>(근역서재, 1982)

전쟁 중이던 1951년 4월 부산에서. 앞줄 왼쪽 셋째가 박인환. 뒷줄 맨 오른쪽에 영화배우 최은희가 보인다. 출처 &lt;세월이 가면&gt;(근역서재, 1982)
전쟁 중이던 1951년 4월 부산에서. 앞줄 왼쪽 셋째가 박인환. 뒷줄 맨 오른쪽에 영화배우 최은희가 보인다. 출처 <세월이 가면>(근역서재, 1982)

그렇지만 박인환의 시에 대한 김수영의 호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박인환에게 마리서사를 만들어주고 전위 시인으로 꾸며준 박일영으로부터 진정한 모더니즘을 배우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초현실주의 화가인 박일영은 박인환에게 예술가의 양심과 세상의 허위를 가르쳐주었는데, 박인환이 시를 얻지 않고 겉멋만 얻었다고 본 것이다.

1946년 3월 김수영은 <예술부락> 제2집에 ‘묘정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박인환 역시 ‘신시론’ 동인을 구성하고 1948년 동인지 <신시론>을 발간했다. ‘신시론’ 동인을 주도한 박인환은 김수영을 제외하고 김경린·김경희·김병욱·임호권과 함께했는데, 김수영은 이에 불만을 가졌다. 산문 ‘연극하다가 시로 전향’에서 불만을 좀 더 구체화해 자신의 등단작이 보수적이지 않은 잡지에 실렸다면 마리서사를 드나드는 모더니스트 시인들의 푸대접을 받지 않았을 테고, 그 일로 콤플렉스를 갖지 않았을 것이라고 항변했다. 결국 작품 자체를 읽지 않고 잡지가 가진 외형적인 면만 보고 자신의 시를 낡았다고 단정한 박인환에게 불만을 토로한 것이다.

김수영과 박인환이 함께 참여한 ‘신시론’ 동인 2집 &lt;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gt;(도시문화사, 1949)의 목차. 맹문재 제공
김수영과 박인환이 함께 참여한 ‘신시론’ 동인 2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도시문화사, 1949)의 목차. 맹문재 제공

김수영은 1949년 박인환의 제안을 받아들여 신시론동인지 제2집에 해당하는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 ‘아메리카 타임지’ 및 ‘공자의 생활난’을 실었다. 문단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청록파류의 시인들이 노래하는 서정시를 부정하고, 새로운 시대와 사회를 새로운 시로 담아내려는 박인환의 모더니즘 시 운동에 동참한 것이다.

그렇지만 두 시인의 모더니즘 시 운동은 한국전쟁 발발로 말미암아 지속되지 못했다. 김수영은 의용군으로 끌려갔다가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됐고, 박인환은 <경향신문>의 종군기자로 활동하게 됐다. 휴전 뒤에도 삶의 길이 달라 ‘신시론’ 동인 무렵처럼 어울리지 못했다. 김수영은 주간지 <태평양>을 거쳐 <평화신문>에 근무하다가 1955년 마포구 구수동으로 이사해 번역과 양계 일에 매진했다. 박인환은 한국영화평론가협회를 발족해 영화평론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고, 195535일부터 410일까지는 미국 여행을 했으며, 1015일 개인 시집 <선시집>을 간행했다. 그러던 1956320일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자택에서 사망하고 만 것이다.

1947년 3월 마리서사 앞에서 박인환(오른쪽)과 동료 시인 임호권. 출처 박인환 추모 산문집 &lt;세월이 가면&gt;(김광균 외 지음, 근역서재, 1982)
1947년 3월 마리서사 앞에서 박인환(오른쪽)과 동료 시인 임호권. 출처 박인환 추모 산문집 <세월이 가면>(김광균 외 지음, 근역서재, 1982)

김수영은 박인환이 세상을 뜬 뒤 10년 가까이 돼서야 그를 호명하기 시작했다. 직접적인 계기는 박인환을 요절한 천재 시인으로 평가하는 문단의 분위기에 공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김수영은 박인환과 관련한 원고 청탁에 응하지 않았고, 시란 무엇인가를 종종 생각했다. 때로는 박인환의 시를 호의적으로 대하려고 <선시집>에 수록된 시들과 후기를 다시 읽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유치한’ 시라는 그의 본래 생각을 바꿀 수 없었다.

결국 김수영은 평론 ‘참여시의 정리’에서 박인환의 모더니즘 시 운동을 평가절하하기에 이르렀다. 4·19혁명 이후 소위 참여시가 정치이념 내지 행동주의로 기우는 것을 경계하면서 박인환이 주도한 모더니즘 시 운동을 실패의 사례로 든 것이다. 상식을 결한 비이성적인 박인환의 시가 당시에는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졌지만, 반향이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김수영은 이를테면 풍자의 촉수가 소시민 생활 내면으로 접근해 들어가는 김재원의 풍자시를 포함해, 강인한 참여의식과 시적 경제를 추구할 줄 아는 기술과 세계적 발언을 할 수 있는 지성을 갖춘 신동엽의 참여시를, 즉 진정한 모더니즘 시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김수영은 좌우 이념의 구별이 없고 글 쓰는 사람과 그밖의 사람들이 문명(文名)이 아니라 인간성을 중심으로 어울릴 수 있는 마리서사를 마련해준 면에서는 박인환의 모더니즘 시 운동을 인정했다. 또한 새로운 시어의 사용에 대한 박인환의 열정도 인정했다. 포로수용소에서 나온 뒤 어느 날 박인환이 보여주는 시를 읽게 되었는데, 작품에 쓰인 어색한 낱말을 지적하자 박인환이 “이건 네가 포로수용소 안에 있을 동안에 새로 생긴 말이야.”(산문 ‘박인환’)라고 반격한 일이 있었다. 김수영은 박인환의 그런 언행에 증오심을 품으면서도 시어에 대한 열정만은 새롭게 이해했다.

김수영 시 ‘거대한 뿌리’ 초고 첫 장.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김현경 제공
김수영 시 ‘거대한 뿌리’ 초고 첫 장.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김현경 제공

박인환을 호명한 시 작품 ‘거대한 뿌리’에서 그와 같은 면을 볼 수 있다. 김수영은 이 작품에서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등의 시어를 의도적으로 쓰고 있다. 박인환이 추구한 모더니즘 시어에 민중성을 보태어 “썩어 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고 노래한 것이다. 김수영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대학을 다니면서도 4년 동안 제철회사에서 일한 김병욱과, 영국 왕립지리학회 회원으로서 65살을 넘긴 나이에 조선을 네 차례나 방문한 엘리자베스 버드 비숍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은 물론 박인환의 시어 인식을 수용해 확장한 것이다.

박인환은 모더니즘 시 운동을 추구하는 신념에 흔들림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어떠한 험담을 들어도 넉넉하게 받아들일 자신감이 있었다. 그와 같은 면은 “박인환과 김수영이 다섯살 차이인데, 박인환이 조금도 지지 않았어요. 완전히 동등하게 놀았어요. 그만큼 인환이 조숙했어요. 수영도 용했지요”라는 김규동 시인의 회고에서도 엿볼 수 있다.

김수영은 박인환의 그러한 면모를 익히 알고 있었기에 그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박인환의 비석을 제막할 때는 망우리 산소에 갔었다.) 또한 부부란 자식 때문에 사는 거야.”(‘벽’)라고 해놓고 정작 자신은 실천하지도 않고 세상을 일찍 떠난 박인환을 나무랐다. 시인으로서 소양이 없고 경박한데다 유행 숭배자라며 경멸한 적도 있었다. 심지어 “인환! 너는 왜 이런, 신문 기사만큼도 못한 것을 시라고 쓰고 갔다지?”(‘박인환’) 하고 조롱했다.

김수영은 이런 힐난에도 박인환이 화를 내거나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빙긋이 웃으며 덕담을 건넬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야아 수영아, 훌륭한 시 많이 써서 부지런히 성공해라!”(‘박인환’)

맹문재 교수.
맹문재 교수.

맹문재 안양대 교수·시인

나는 인환을 가장 경멸한 사람의 한 사람이었다. 그처럼 재주가 없고 그처럼 시인으로서의 소양이 없고 그처럼 경박하고 그처럼 값싼 유행의 숭배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죽었을 때도 나는 장례식에를 일부러 가지 않았다. 그의 비석을 제막할 때는 망우리 산소에 나간 기억이 있다. (중략)
인환! 너는 왜 이런, 신문 기사만큼도 못한 것을 시라고 쓰고 갔다지? 이 유치한, 말발도 서지 않는 후기. 어떤 사람들은 너의 ‘목마와 숙녀’를 너의 가장 근사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 눈에는 ‘목마’도 ‘숙녀’도 낡은 말이다. 네가 이것을 쓰기 20년 전에 벌써 무수히 써먹은 낡은 말들이다. ‘원정(園丁)’이 다 뭐냐? ‘배코니아’가 다 뭣이며 ‘아포롱’이 다 뭐냐? (후략)

- 김수영 산문 ‘박인환’(부분)

김수영 시 ‘거대한 뿌리’ 초고 두 번째 장. 김현경 제공
김수영 시 ‘거대한 뿌리’ 초고 두 번째 장. 김현경 제공

김수영 시 ‘거대한 뿌리’ 초고 세 번째 장. 김현경 제공
김수영 시 ‘거대한 뿌리’ 초고 세 번째 장. 김현경 제공

&lt;사상계&gt; 1964년 5월호에 실린 김수영 시 ‘거대한 뿌리’ 앞부분. 맹문재 제공
<사상계> 1964년 5월호에 실린 김수영 시 ‘거대한 뿌리’ 앞부분. 맹문재 제공

&lt;사상계&gt; 1964년 5월호에 실린 김수영 시 ‘거대한 뿌리’ 뒷부분. 맹문재 제공
<사상계> 1964년 5월호에 실린 김수영 시 ‘거대한 뿌리’ 뒷부분. 맹문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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