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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타자의 시선으로 다시 읽는 셰익스피어

등록 2021-09-24 04:59수정 2021-09-24 14:32

탈식민주의 관점으로 작품 세계 안팎 탐구
극찬받는 탁월한 ‘근대성 재현’ 이면에
인종주의·제국주의 등 식민성 드러내
제국의 정전 셰익스피어

‘이방인’이 본 ‘민족시인’의 근대성과 식민성

이경원 지음 l 한길사 l 4만8000원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는 ‘잉글랜드의 민족시인’을 넘어 세계적으로도 가장 뛰어난 문학적 성취를 이룬 ‘대문호’로 오랫동안 자리매김해왔다. 1994년 영문학자 해럴드 블룸은 <서구의 정전>에서 중세부터 현대까지 26명의 서구 작가들을 ‘정전’(正典, the Canon)이라 일컫고,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문학의 기준과 한계를 설정한다”며 셰익스피어를 “정전 그 자체”의 자리에 놓았을 정도다. 그러나 정전의 지위는 날이 갈수록 흔들리고 있다. 미국 예일대 영문학부 학생들은 2016년 셰익스피어 등 ‘주요 영국 시인’들을 필수로 포함한 입문 커리큘럼을 “탈식민”(decolonize) 해달라는 청원을 냈다. 비슷한 시기 펜실베니아대 학생들은 학교 벽에 걸려있던 셰익스피어의 초상을 급진적인 흑인 여성 시인 오드리 로더의 사진으로 바꿔놓았다. 더이상 ‘아이비리그’ 대학들에서는 학부생들에게 셰익스피어를 필수 커리큘럼으로 강요하지 않는다. 심지어 셰익스피어의 터전이었던 영국 글로브극장에서도 “모두를 위한 셰익스피어”를 앞세워 반인종주의 세미나를 여는 등 그의 작품을 ‘탈식민’하는 작업을 펴고 있다.

<제국의 정전 셰익스피어>는 탈식민주의와 셰익스피어를 깊이 연구해온 이경원 연세대 교수(영문학)가 셰익스피어의 ‘안과 밖’을 두루 살피며 신화의 자리에까지 오른 이 작가를 비판적으로 읽는 방법을 제시하는 책이다. 지은이는 셰익스피어가 재현한 근대성은 인종주의·제국주의를 담고 있으며, 영국-미국 제국주의의 패권 구축에 불가결한 이데올로기적 토대를 제공했기 때문에 정전이 될 수 있었다고 지적한다. 프란츠 파농, 에드워드 사이드, 호미 바바 등 탈식민주의 사상가들을 이정표로 삼아, 지은이는 작품 내부에 대한 비평적 독해와 시대적 배경·역사에 대한 풀이를 씨줄과 날줄로 탄탄하게 엮어 나간다.

셰익스피어의 활동 무대였던 영국 글로브극장은 “모두를 위한 셰익스피어”를 내걸고 반인종주의 세미나를 여는 등 셰익스피어를 ‘탈식민화’ 하는 작업을 펴고 있다. 글로브극장 누리집 갈무리
셰익스피어의 활동 무대였던 영국 글로브극장은 “모두를 위한 셰익스피어”를 내걸고 반인종주의 세미나를 여는 등 셰익스피어를 ‘탈식민화’ 하는 작업을 펴고 있다. 글로브극장 누리집 갈무리
실증주의적 관점을 앞세운 이들은 “인종주의와 제국주의 개념은 18세기 이후에나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에 16세기 ‘초기 근대’를 살았던 셰익스피어에게 이런 담론을 적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탈식민주의적 오류’를 주장한다. 그러나 지은이는 엘리자베스 여왕 치하의 잉글랜드 르네상스 당시에도 이미 ‘무어’, 유대인, 이교도, 야만인 등 피부색이나 국가, 민족, 종교 등의 차이를 이유로 타자를 구분하고 차별하는 인종주의가 유효했다고 주장한다. 실제 정치공동체로서 영국 제국이 구축된 것은 18세기 이후지만, 이미 16세기에 스코틀랜드와 갈등하고 웨일스 합병이 진행되는 등 잉글랜드에선 당시 민족국가 만들기와 더불어 제국으로서의 담론과 이데올로기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제도화된 인종차별주의는 없었지만 인종주의는 있었고, 제국은 없었지만 제국주의는 있었다는 얘기다.

이 같은 시기에 피어오르던 불안과 혼란을 탁월하게 ‘재현’했기 때문에 셰익스피어는 잉글랜드 제국의 ‘민족시인’이 될 수 있었다. 지은이는 셰익스피어식 재현의 특징으로 ‘양가성’에 특히 주목한다. 셰익스피어는 중세 봉건주의와 근대 자본주의의 불협, 남성성과 여성성, 귀족과 평민, 기독교인과 이교도, 문명과 야만 등 당대의 불안을 일으키는 경계선들을 확장하고 이를 양가적으로, 또 복합적으로 드러내어 변주하는 데 능한 작가였다. “사극에서는 중세 잉글랜드의 분열과 혼란을 반추하고, 로마 극에서는 과거의 제국 로마와 미래의 제국 잉글랜드의 유비 관계를 탐색한다. 비극에서는 주체와 타자의 만남이 파국으로 치닫는 원인을 분석하고, 낭만 희극과 후기 로맨스에서는 탈역사적 공간 속에서 이방인을 포섭하면서 또한 배제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셰익스피어의 양가성은 그가 동시대 다른 작가들처럼 잉글랜드 민족주의와 식민주의를 대놓고 옹호하는 수준에 머무르도록 하지 않게 만드는 핵심 요소다. 그러나 지은이는 “불안과 욕망, 균열과 통합, 전복과 봉쇄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하던 셰익스피어의 양가성은 결국 한쪽으로 무게중심이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고 짚는다. 탈식민주의 사상가 월터 미뇰로가 지적한 것처럼 “근대성과 식민성은 동전의 양면”이며, “타자의 차이를 만들어내어 주체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근대성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빼어난 ‘이중 서사’ 전략은 결국 타자를 활용해 ‘우리’의 내부 모순과 균열을 봉합하는 방향으로 귀결될 따름이다. 그리고 타자는 폐기처분된다.

셰익스피어 초상. 위키미디어 코먼스, 게티이미지뱅크. 그래픽 동혜원 hwd@hani.co.kr
셰익스피어 초상. 위키미디어 코먼스, 게티이미지뱅크. 그래픽 동혜원 hwd@hani.co.kr
영국 제국의 양면성을 풍자한 아틀라스 지도. 아우구스토 그로시, 1878년. 한길사 제공
영국 제국의 양면성을 풍자한 아틀라스 지도. 아우구스토 그로시, 1878년. 한길사 제공
민중문화의 활력과 해학을 보여줬던 가난한 이스트칩의 ‘주변부’ 인물들은 <헨리 5세>에서 프랑스와의 전쟁을 통해 새로운 민족국가 건설을 향해 치닫는 목적론적 서사 속에서 배제와 처벌의 대상으로 재배치된다. <베니스의 상인>에서 유대인 샤일록은 종교적·문화적 타자로서 자신이 받는 사회적 차별과 멸시를 신랄하게 폭로하지만, 그는 끝내 보편적인 기본법보다도 앞서는 기독교 민족주의에 기댄 특별법에 의해 처벌받는다. “셰익스피어가 샤일록을 통해 유대인의 ‘인간다움’을 부각하는 목적은 유대인과의 비교 우위를 통해 구축된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데 있다.” 가부장적 억압에 도전하는 여성인 포샤는, ‘성적 타자’로서 종교적 타자인 샤일록에 대한 잔혹한 보복을 하는 책임과 부담을 떠안아야 한다.

<오셀로>에서 오셀로는 ‘고귀한 야만인’이라는 모순된 정체성을 지니고 당시로선 파격적으로 성적·계급적 주체로 등장한다. 그러나 끝내 인종적 타자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채 야만인으로서 죽는다. 지은이는 “셰익스피어는 햄릿이나 리어와 다르게 오셀로에게는 사유와 성찰의 능력을 부여하지 않았다”고 꼬집는다.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작품 <태풍>은 식민담론이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텍스트로, 극중 권력의 정점에 있는 프로스페로는 계급·젠더·인종의 층위에서 다양한 피지배자와 마주치는 상황에 처한다. 특히 인종적 타자인 캘리반은 그와 대척점에 서서 억압과 저항의 변증법을 그려낸다. 그러나 혼란스러운 상황이 “말끔하게 정돈”된 뒤 캘리반은 ‘제자리’로 돌아갈 뿐이다.

지은이는 “사심 없음이나 초연함 혹은 불편부당으로 오독될 수 있는 셰익스피어의 정치적 둔사(遁辭·관계나 책임 등에서 빠져 나가려 꾸며대는 말)는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성공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지적한다. 블룸처럼 미학적 형식주의 입장에 서면, 셰익스피어의 양가성은 정치적으로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고 ‘보편적 인간’을 그대로 그려낸 탁월함으로 풀이된다. 이런 특징 때문에 셰익스피어는 동서고금, 시대를 초월해 언제든 갖다 쓸 수 있는 ‘원형적’ 자원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그러나 ‘보편적 인간’의 범주가 ‘유럽 백인 남성까지’라는 사실을 직시하면, 셰익스피어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에둘러서 잘” 옹호한 작가에 그치게 된다. 셰익스피어가 끊임없이 소환되는 현상 역시 “그가 재현한 근대성(자본주의와 식민주의)의 징후적 모순이 현재도 여전히 계속되는 현상”으로 풀이할 수 있다. 지은이는 정치철학자 웬디 브라운을 인용하며, 셰익스피어의 양가성은 “서구 근대성의 가장 두드러지는 성취이자 한계인 ‘관용’(tolerance)”이라는 ‘제국의 통치술’을 보여준다고 짚는다. “관용은 겉으로는 차이와 포용과 포섭을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차이를 차별의 명분으로 이용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보여주듯, 서구 근대성·식민성 아래 타자는 ‘우리’를 위해 활용된 뒤 폐기처분되는, 단지 변증법적 상대로만 존재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태풍’을 표현한 그림 <프로스페로 암자 앞의 마법의 섬>을 바탕으로 만든 동판화. 1786년. 한길사 제공
셰익스피어의 작품 ‘태풍’을 표현한 그림 <프로스페로 암자 앞의 마법의 섬>을 바탕으로 만든 동판화. 1786년. 한길사 제공
그렇다면 이처럼 인종주의와 제국주의를 품고 있는 셰익스피어를, 이제 우리는 문학의 명단에서 ‘지워야’(cancel) 하는 걸까? 지은이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는 “억압의 기제로 작용해온 셰익스피어를 저항의 수단으로 전유할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 이는 셰익스피어를 억압과 저항이 공존하는 텍스트로 간주하고 그 속에 들어가서 모순과 틈새를 드러내는 작업이다.” ‘제국의 정전’이라는 신화를 걷어내고 감춰졌던 정치적 편향성을 드러내기 위해선, 셰익스피어를 더욱 철저하게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태풍>에서 캘리반은 프로스페로가 부리는 마법의 원천인 그의 책을 두려워한다. “‘프로스페로의 책’은 늘 우리 곁에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할 수 있고 또한 해야 하는 일은 그 책을 캘리반의 시각으로 다시 읽는 작업이다. 캘리반이 프로스페로의 힘을 두려워하면서도 ‘배워서 욕하는’ 전략을 고수하는 한, 프로스페로가 구축하려는 제국의 위계질서는 공고해질 수 없고 영구적일 수도 없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셰익스피어가 등장한 엘리자베스 시대 잉글랜드는 제국 건설의 야망은 부풀어 있었으나 그것을 실현할 물적 기반이 다져지지 않은 ‘가상의 제국’이었다. 그러나 청교도혁명으로 시작된 일련의 사회적 지각변동을 겪고 난 이후 잉글랜드는 셰익스피어의 동시대인들이 문학작품과 연극무대에서만 그려보았던 위대한 제국의 꿈을 가시적 현실로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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