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베스의 베네수엘라가 격동하고 있다. 사회를 민중 중심으로 바꾸고 라틴제국을 묶어 신자유주의와 미국과 한판 겨루겠다는 기세다. 거리벽화는 소베뜨의 낫과 ‘제국주의와 맞서자’는 구호로 가득하다. 세계사회포럼 벽화를 그리던 화공 루이스 미구엘 일행과 필자(왼쪽에서 세번째).
독립 영웅 시몬 볼리바르 ‘환생’
빈민 압도적 지지로 49개 개혁입법
핵심은 석유 이윤 민중 배분
토지배분·무료병원·생필품 원가 제공…
“미래가 인간적일 것” 믿음의 불빛 출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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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인간적일 것” 믿음의 불빛 출렁
커버스토리 카라카스에서는 불빛이 다 산을 타고 오른다. 오후 6시 이후 카라카스 리몬마을이나 라베가 비탈에 서 보면 안다. 불빛은 잃어버린 기호인줄 알았던 소베뜨의 낫과 라틴 형제애로 제국주의에 맞서자는 구호가 가득한 벽화를 타고 골목과 골목을 비추고 연결하며 집과 담장을 넘는다. 골목 어귀에서는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이 한솥밥 식구로 몰켜 앉아 새로운 토지분배와 마을병원 운영에 관한 민중회의를 열고 있다. 술 취한 가객이 체 게바라를 기리는 노래를 주절거리고, 거리에서는 주머니 책으로 만든 제헌의회 헌법이 기념품으로 팔리고 있다. 나부끼는 현수막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현재는 모두의 것이다.’ 거기가 베네수엘라다. 카리브해안가 공항에서 카라카스 시내로 이어지는 1번 다리가 끊겨 별빛 뿌리는 엘 아빌라 산길을 넘자 다시 거대한 불빛 벽화가 눈앞에 펼쳐졌다. 카라카스를 포위하듯 에우고 있는 빈민촌에서 내뿜고 있는 불빛이었다. 불빛은 가난과 가난을 이으며 어둑신한 도시 비탈에서 돋아나고 있었다. 지금 그들에게는 다른 불빛 하나가 더 있었다. 인디오와 흑인의 피가 섞인, 그 불빛 이름이 차베스다. 차베스를 중심으로 오늘 베네수엘라 사회가 격동하고 있다. 사회를 민중 중심으로 고치고 라틴 제국을 하나로 묶어 신자유주의와 미국에 맞서겠다는 기상으로 용트림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 변화를 볼리바리안 혁명이라 부른다. “조심해라, 조심해라, 볼리바르의 칼이 라틴 아메리카를 도려낸다.” 집회장에서 가장 흔히 들을 수 있는 구호에서 짐작할 수 있듯 라틴아메리카를 해방시킨 독립영웅 시몬 볼리바르가 다시 부활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구호도 혁명도 살사 분위기를 띤다. 라틴 특유의 가락을 타고 한껏 고조되어 분노가 정점에 맺히는가 싶으면 이내 풀려나간다. 그 유연성은 경직된 구호가 귀에 박혀 있는 사람에게 신선하기만 했다. “볼리바르는 원주민과 흑인들의 지원 속에 스페인과 해방투쟁을 전개했다. 차베스의 지지층과 잘 맞아떨어진다. 이 자체가 상징하는 바가 있지 않은가.”
제헌의회 헌법 기녀품으로 소설가이자 역사학자인 루이스 가르시아는 베네수엘라 지식사회의 상당수가 차베스를 지지하는 건 틀림없다고 했다. 살사 가락 중 최고는 필시 차베스의 장광설일 게다. 새로운 미션을 시작하는 발대식에서 본 차베스는 행사 자체를 스스로 이끌어가면서 거의 마술적 연설로 대중을 흔들어댔다. 높은가 하면 낮고 비장한가 하면 여유를 되찾는 그 살사 가락 열기가 국경을 넘고 있다. 6차 세계사회포럼 현장에서도,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 취임식 앞뒤로 안데스에서도 남미 민중은 차베스와 혁명을 외쳐댔다. 포럼에서 만난 콜롬비아에서 온 아마존 인디오 출신 배우 레나는 “우리는 차베스 개인보다 라틴 아메리카의 자유와 해방과 자주성을 지지하는 것이다, 그가 새 길을 열고 있다, 라틴 제국은 형제이고 따라서 연대는 자연스런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라틴 사람들은 인종 언어 문화 종교, 노래 가락과 해방의 뿌리를 공유하고 있고, 무엇보다 미국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연대의 근거로 갖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차베스는 석유를 형제애의 구체적 매개물로 새롭게 제시했다. 더불어 미국 중심의 자유무역지대를 분쇄하고 이를 대체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차베스의 집권 배경에는 베네수엘라 사회의 극심한 양극화가 자리잡고 있다. 80년대 후반 베네수엘라는 IMF(국제통화기금) 등이 요구한 대로 시장을 전면 개방한 결과 버스삯이 노동자 일당과 맞먹을 정도로 사회 전체가 요동쳤다. 사태가 민중폭동으로 발전한 유명한 엘 까라까소(1989)다. 이는 신자유주의에 대항해 치열하게 전개된 계급전쟁이었다. 신자유주의가 한 나라를 순식간에 어떻게 붕괴시켜버리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신자유주의는 차베스의 저주받은 어머니 역할을 한 셈이다. 92년 쿠데타 실패 뒤 감옥을 다녀온 차베스는 선거를 통한 제도혁명으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 여느 정치범들처럼 감옥은 그에게 대학 노릇을 했다. 현재 그의 참모들 중 상당수는 감옥동지들이다. “차베스가 걸어온 궤적은 민중들에게 믿음을 주고 있는 중요한 근거다.” 칠레 출신으로 쿠바에 건너가 활동하다 근래 베네수엘라에 와 있는 노여성 혁명가 마르따 하르네커는 혁명의 정당성을 차베스의 삶에서 찾고 있었다. 거의 6할에 이르는 빈민의 지지로 집권에 성공한 차베스는 새 헌법에 따른 제헌의회를 구성한 뒤 전격적으로 49개 개혁법안을 만들어 발동한다. 그 핵심에 국영석유회사 PDVSA(뻬데배사) 개혁이 들어 있었다. 석유는 세계5대 산유국 베네수엘라 살림의 반을 차지하고 있다. 현재는 모두의 것이다 “자기 땅에서 나오는 자원이익을 그 민중에게 돌리는 일은 지극히 당연하다.” 차베스 정권에서 기획부 차관을 지낸 로란드 데이비스의 말처럼 되기까지는 신산스런 세월이 필요했다. 지난 1백년 동안 민중에게 석유는 그저 검은 눈물이었을 뿐이다. 석유기득권을 박탈당할 위기에 처하자 국가 속의 국가 뻬데베사를 중심으로 반차베스 투쟁이 일어났다. 미국의 사주를 받은 세력은 쿠데타로 차베스를 대통령에서 쫓아냈으나 민중은 유혈투쟁을 통해 사흘만에 그를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반혁명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곧이어 자본가들이 공장 기계를 세우고 파업을 감행한, 세계자본주의 역사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뜻과 달리 베네수엘라는 무너지지 않았다. 이태 전 여름에는 소환투표로 차베스를 다시 한번 끌어내리려 했지만 역시 실패하고 만다. 반혁명과 싸우는 과정에 얻은 가장 큰 성과는 차베스의 지지기반이 튼튼해진 것과 더불어 광범한 민중의 각성이었다. 교실이 아니라 거리와 광장이 그들에게 교과서 역할을 했던 것이다. 어셈블리라 부르는 다양한 민중회의체는 이 시기에 널리 조직되었다. 이들이 베네수엘라 개혁의 핵심세력들이다. 사회활동가들도 현장으로 들어가 결합했다. 집권 이후 차베스 정부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과업은 석유이익을 민중에게 돌리는 일이었다. 요컨대 베네수엘라 사회동력은 간명하게 말해 민중과 석유다. 그 구체적 사업이 미션이다. 의무교육이 없는 베네수엘라에서 문명퇴치와 사회학습을 위한 미션 로빈슨, 미션 리바스, 미션 스쿠레를 비롯하여, 쿠바 의사 1만 명 이상이 투입되어 설립된 민중병원 미션 바리오 아덴뜨로(마을 속으로)에서는 24시간 3명의 의사가 무료진료를 하고 있다. 자본가 파업시기에 자연스레 형성된 민중시장을 토대로 세우게 된 미션 메르깔은 유통과정의 이익 없이 민중들에게 생필품을 제공하고 있다. 그밖에 무관심 속에 거리에 방치된 사람들을 사회로 복귀시키는 프로그램인 미션 네그라 이뽈리따, 토지개혁 미션 자모라, 원주민 지원사업 미션 과이콰이프로까지 사회개혁사업은 폭 넓게 진행되고 있다. “이전에는 병원에 가는 것 자체를 포기할 정도였다. 지금은 아무 때나 갈 수 있다. 나 또한 병원운영회의에 참여하고 있다.” 대표적인 빈민촌 라베가 민중병원에서 만난 아주머니의 말이다. 차베스에 대한 민중의 지지가 높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재 베네수엘라 청년 5천여 명이 의사공부를 하러 쿠바에 건너가 있다. 쿠바사람들이 떠나면 이내 그들이 민중병원에 들어올 참이다. 베네수엘라 개혁이 성공하기 위해 넘어야 할 산과 가야 할 길이 그저 수월해 보이지만은 않았다. 우선 미국의 위협을 뺄 수 없고, 차베스 1인 주도의 정치체제가 안고 있는 위험성, 구세력들의 습성과 비슷하게 개혁정부 관료들이 마이애미에 별장을 사고 있다는 소문에서 볼 수 있듯 내부의 타락을 차단하는 일, 여전한 구세력의 저항, 전면적인 경제대안의 미비, PDVSA 파업 등으로 숙련노동자들이 쫓겨나 기술관료들이 부족한 점, 석유이익의 수혜적 분배가 가지고 있는 사회개혁의 한계 등을 꼽을 수 있다. 어쨌든 한가지 분명한 것은 차베스 정권의 성패 여부가 우리를 포함해 제3세계의 민중에게는 생동하는 시금석이라는 사실이다. 반혁명과 싸우며 지지 탄탄 거리에서 세계사회포럼 벽화를 그리고 있는 화공 루이스 미구엘은 비로소 미래가 인간적일 수 있겠다고 믿게 된 건 근래의 일이라고 했다. 어설픈 장밋빛 미래가 아니라 현재를 함께 소유하는 일, 그것이 바로 제대로 된 미래다. 진보란 미래를 칼로 베어 쳐서 오늘로 가져오는 일이다. 스무 하루를 보낸 남국의 더운 겨울을 뒤로하고 귀로에 올랐다. 카라카스 외곽에서 불빛들이 다시 산을 향해 기어오르고 있었다. 카라카스 전체가 거대한 불빛 무리가 되어 점등되고 있었다. 사상의 색깔은 바뀔 수 있어도 민중이 있는 한 혁명은 계속된다. 마침내 현재가 모두의 것이기 위해서는 지금 가난을 잇고 있는 저 불빛들이 저마다를 비추고 이윽고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 되어야 할 것이었다. 서해성(소설가/한신대 외래교수) ▶ 이 글은 오는 19일 오후 8시 방영될 ‘KBS 스페셜’의 현지취재팀 동행취재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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