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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상실과 함께 걷기

등록 2022-08-05 05:00수정 2022-08-05 13:59

중년 여성이 어머니의 죽음과 남편의 외도, 딸의 출산 등을 겪으면서 삶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 <다가오는 것들>(2016) 스틸컷.
중년 여성이 어머니의 죽음과 남편의 외도, 딸의 출산 등을 겪으면서 삶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 <다가오는 것들>(2016) 스틸컷.

시와 산책
한정원 지음 l 시간의흐름(2020)

누군가와 어긋났고, 누군가와 화해했다. 단 이틀 사이 갈등과 화해를 겪었다. 동시에 찾아온 슬픔과 기쁨, 그 틈에서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몰라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잠 못 이루던 새벽, 오래전 본 영화 <다가오는 것들>을 재생했다.

아이들은 커서 품을 떠나고, 바람난 남편은 집을 나가고, 어머니는 죽고, 준비하던 책 작업은 엎어졌다. 파리의 고등학교 철학 교사인 나탈리에게 다가온 것들이다. 짧은 시간에 여러 상실을 경험한 나탈리를 걱정하는 제자 앞에서 그녀는 비로소 자유로워졌다고 말하지만, 뒤돌아서 자주 운다. 가족들과 매년 찾았던 바닷가 별장에서, 어머니의 장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혼자인 어느 낮과 밤에 서럽게 운다.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는 나탈리는 어머니가 키우던 고양이를 맡게 된다. 고양이를 집으로 데려온 나탈리는 귀찮은 듯 풀어주며 “얼른 가서 숨어, 바보 고양이”라고 말한다. 그런 나탈리는 고양이가 집을 나가자 밤새 사료 봉지를 흔들며 고양이를 찾는다. 마침내 고양이를 찾은 밤, 나탈리는 뚱뚱하고 나이 든 고양이를 번쩍 안아 체온을 나눈다. 고양이는 뜻밖에 자신의 사냥 기술을 알게 되었고, 나탈리는 고양이를 안을 수 있게 되었다.

남편의 빈자리를 애도할 새도 없이, 그녀는 자신이 아끼던 책을 가져간 그에게 분노를 느낀다. 남편과 함께 살 때 항상 풍성하게 꽂혀 있던 꽃다발을 쓰레기통에 처넣어 버리지만, 그녀의 제자들이 선물한 꽃다발이 화병을 채운다. 감정이 하나로 흐르지 않듯 다가오는 것들도 하나의 선으로 흐르지 않는다. 동시다발적으로 복합적인 사건과 감정이 침투한다. 영화는 갑자기 다가오는 사건들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무력해지는지 보여주는 동시에, 그게 살아가는 일이라고 가만히 토닥인다. 살다가 화들짝 놀랄 때마다 나는 이 영화를 찾는다.

작년 가을, 내가 기댈 또 하나의 리스트가 생겼다.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생의 마주침을 환대하는 책. 한정원의 <시와 산책>이다. 이 책에는 길에서 만난 낯선 존재에게 마음 열고, 시의 언어로 만남과 이별을 받아들이는 한 사람의 태도가 담겨 있다. 작가는 바다와 골목길, 옥상과 학교, 수도원, 집과 시집, 여러 공간에서 마주한 다양한 존재와 풍경과 언어를 품에 안는다. “그 무엇도 하찮지 않다고 말하는 마음이 시”라던 누군가의 말을 기억하며 주위를 둘러본다. “고양이들이 밤에 몸을 누이는 장소, 열매를 기대해볼 수 있는 나무, 울다가 잠든 사람들의 집…. 산책할 때 내가 기웃거리고 궁금해하는 것들도 모두 그렇게 하찮다. 그러나 내 마음에 거대한 것과 함께 그토록 소소한 것이 있어, 나는 덜 다치고 오래 아프지 않을 수 있다. 일상의 폭력과 구태의연에 함부로 물들지 않을 수 있다.”(25쪽)

사는 게 다 비슷한걸. 내 마음 같지 않은 타자와 의지에 상관없이 엮이고 헤어지는 게 살아가는 일인 걸. 잠시 함께 걷고, 어긋나고, 일상의 소소한 순간을 이어 붙이며 살면 되는 건데. 너무 많은 의미 부여로 모든 것을 예측하고 붙잡으려 노력했다. 상실을 품에 안고 살아가는 나탈리와 한정원의 이야기 곁에 앉아 지금 내게 다가온 것들을 바라본다. “어느 방향으로 걸어야 할지, 무엇을 바랄 수 있을지, 저는 여전히 모르겠어요. 다만 지금은 아름답게 걷고자 합니다.”(172쪽)

홍승은/집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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