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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정미소보다 못한 한미한 대학…지방 청년의 웃픈 세계

등록 2022-09-30 05:00수정 2022-09-30 14:19

이기호 작가 짧은 소설집…지방 청년들 향한 헌신적 입담

눈감지 마라
이기호 지음 l 마음산책 l 1만5000원

첫 장의 상징성은 크다. 면 소재지에 위치한 대학에 다니는 정용과 진만. 학교 정문 앞 편의점, 치킨집, 문 닫은 중국집, 피시방 외 논밭 산이라 정용의 아버지는 “무슨 대학교가 정미소도 아니고…”라며 입학 때 넋두리했었다. 겨울방학 교정은 더 적막하여 청년 둘은 큰마음 먹고 광역시로 나가기로 한다. “가서 우리도 촛불집회도 가고, 그 사진 찍어서 막 인스타그램에도 올리고, 뭐 그러자고.” 하지만 전날부터 내린 폭설로 시외버스가 끊긴다. 행여 차를 얻어탈까 편의점 야외 탁자에서 떨며 컵라면, 삼각김밥으로 저녁을 때우고, 소주 네 병을 나눠마셨다. 챙겨온 양초 2개를 어느새 탁자 위에 켜두고 사진도 찍는다. 짜증 내는 아르바이트생에게 진만 왈 “우리 지금 집회하는 거예요…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고요!”, 그들을 가리켜 작가 왈 “진만의 목소리는 취기를 이길 수 없어 보였다”는 것.

이를테면 혁명과 전복이 가장 필요한 이들에게 변혁이 때로 일어나는 모든 지대는 그들의 강 저편이다. 도강할 배는 이편으로 오지 않고, 오더라도 미취업 대학 졸업자로 학자금 채무자가 되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기 바쁘다. 부모의 세계도 강 저편은 아니다. 이들의 목표는 이것이다. “…최소한 나쁘지 않은 거, 그러면 된 거지, 뭐…” 이혼한 가난한 부모를 향해서도 “(부모를) 용서하면 그 뒤엔 어찌해야 하는가? 그러면 그다음에 서로 잘 지내야 하는가? 저는 이해도 싫고 용서도 싫어요. 그냥 지금처럼 나쁘지만 않으면 돼요….” 하지만 “서글프고 수치스럽다”고 되뇔 일투성이며, 도무지 ‘까닭’을 찾을 수 없는 곳이 강의 이편인 셈이다.

이기호 작가. 마음산책 제공
이기호 작가. 마음산책 제공

작가 이기호에게 특유의 재담은 독자들로 하여금 강의 이편을 외면하지 않도록 하는 가장 윤리적인 비기이다. 웃지만 “까닭 없이” 씁쓸해지는 세계로의 안내인데, 어쩌면 작가의 의도 같은 건 없다 쳐도 무방하다. 블랙코미디 같은 실존에 대한 그저 진솔한 모사로서.

엽편소설처럼 각 장은 나름 완결성을 지니면서 전체 서사를 구성해낸다. 가난, 피로, 수모, 냉소 따위가 얼마나 분절적으로 각인되는지, 그러면서도 변치 않는 최저시급처럼 어찌나 일관되는지 잘 드러내는 형식이라겠다. 작가는 “지난 5년 동안 소설 속 두 인물의 뒤를 부지런히 쫓아다녔는데”도 “이 친구들의 쌓인 시간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개별성도 결국 강 저편의 얘기인가, 까닭 없는 세계에선 개별성도 불허되는가, 작가는 맞선다. 말미도 독자들의 기대처럼 전개되지 않는다. “최소한 나쁘지 않은 거” 아래엔 늘 더 나쁜 것이 있게 마련이다. 그 뻔한 세계에 서식하는 ‘지방’의 ‘청년’들에 대한 이야기 <눈감지 마라>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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