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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민족 산악인으로 탈바꿈한 ‘친일 알피니스트’ [책&생각]

등록 2023-06-02 05:00수정 2023-06-02 16:14

근대 등반 선구자 김정태가 말한 것과 침묵한 것
1940년 인수봉 정상에서 찍은 사진 통해 규명
경쟁적 등정주의 아닌 산행의 인문정신 되찾아야
1940년 11월3일 인수봉 정상에서 찍은 조선인 등반가들의 단체 사진. 사진이 담긴 종이 액자에는 “혈맥이 통하는 암우, 인수봉에서, 15. 11. 3.”이라는 일본어 문구가 적혀 있다. 15는 일본 연호인 ‘쇼와 15년’으로 서기 1940년에 해당한다. 한길사 제공
1940년 11월3일 인수봉 정상에서 찍은 조선인 등반가들의 단체 사진. 사진이 담긴 종이 액자에는 “혈맥이 통하는 암우, 인수봉에서, 15. 11. 3.”이라는 일본어 문구가 적혀 있다. 15는 일본 연호인 ‘쇼와 15년’으로 서기 1940년에 해당한다. 한길사 제공

침묵하는 산
일제강점기 조선 산악인의 그림자
안치운 지음 l 한길사 l 2만8000원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다. 장소는 인수봉 정상. 찍힌 날짜는 1940년 11월3일. 사진이 담긴 종이 액자에는 “혈맥이 통하는 암우(岩友), 인수봉에서, 15. 11. 3.”이라는 문구가 일본어로 적혀 있다. 숫자 15는 당시 일본의 연호인 쇼와 15년으로 서기 1940년에 해당한다.

이 사진은 한국산악회가 발행한 <한국산악회 70년>(2016) 책자의 맨 앞에 실려 있을 정도로 “산악회의 시작과 여명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기록으로 평가된다. 58명이 들어 있는 사진에서 정체가 확인된 이는 단 두 사람. 사진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김정태(1916~1988)와 오른쪽 맨 끝에 앉은 엄흥섭(1909~1945)으로 둘 다 당시 조선을 대표하는 산악인들이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56명은 누구이고 이들은 이날 왜 인수봉에 모여 단체 사진을 찍었을까. 사진 속 인물들 상당수는 양복에 넥타이 차림이고 여성으로 보이는 이도 있는데, 이들은 어떻게 인수봉 암벽을 오른 것일까.

1935년 1월 교토제국대학 백두산 원정대가 백두산 정상에 올라 일장기를 세웠다. 한길사 제공
1935년 1월 교토제국대학 백두산 원정대가 백두산 정상에 올라 일장기를 세웠다. 한길사 제공

조선총독부는 1939년 9월 조선에서 열린 ‘대일본청년단 대회’를 기념하기 위해 인왕산 병풍바위에 “동아청년 단결, 황기 이천오백구십구년 구월 십육일,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를 새겼다. 한길사 제공
조선총독부는 1939년 9월 조선에서 열린 ‘대일본청년단 대회’를 기념하기 위해 인왕산 병풍바위에 “동아청년 단결, 황기 이천오백구십구년 구월 십육일,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를 새겼다. 한길사 제공

연극평론가이자 산악 저술가이기도 한 안치운 전 호서대 교수가 쓴 <침묵하는 산>은 이 사진을 매개로 삼아 한국 근대 등반의 연원을 따져 묻는다. 특히 “한국산악회의 태산준령”이자 “그 자신이 곧 한국산악회라 해도 부족함이 없다”(<한국산악회 70년>)는 평을 듣는 김정태가 민족주의 등반을 내세웠던 것과 달리 사실은 ‘친일 알피니스트’였다는 도발적인 주장을 펼침으로써 한국 근대 등반사를 다시 쓰고자 한다.

김정태는 대구에서 출생해 1927년 서울로 올라와 교동국민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그의 학력은 불확실하다. 그 자신은 학교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고보 혹은 중학교를 다녔으며 일본 대학에도 유학했노라고 밝혔지만 사실로 확인되지는 않는다. 가령 1961년 그가 서울시 체육 부문 문화상을 받았을 때 수상자 관리 카드의 “학력과 경력란은 텅 비어 있다.” 그의 회고록 <천지의 흰눈을 밟으며>(1988)의 앞날개에 적힌 약력에도 대구 출생 뒤로는 곧바로 1929년 백운대를 필두로 한 등반 경력이 이어질 뿐이다. 안치운은 김정태가 일본에 유학했다는 주장은 “거짓에 가깝다”고 본다. 학력을 둘러싼 이런 모호함이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등반에 관한 김정태의 태도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1935년 1월 백두산 정상에 오른 교토제국대학 백두산 원정대. 한길사 제공
1935년 1월 백두산 정상에 오른 교토제국대학 백두산 원정대. 한길사 제공

서구적 알피니즘을 일제강점기에 일본을 통해 수입한 것이 한국의 근대 등반이라고 한다면,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학교 산악반이 등반 학교 구실을 했다. 김정태는 1929년 인수봉을 밧줄에 매달려 오르는 서양인 선교사들을 처음 보고 독학으로 암벽 등반을 익혔으며, 단성사에서 본 독일 산악 영화 <몽블랑의 폭풍>과 <마의 은령>에서 자일 다루기와 확보법 등을 배웠노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 두 영화에 관한 그의 설명은 “오류 범벅”이어서 그가 나중에 본 다른 영화들과 혼동을 한 게 아니라면 거짓말이라는 게 안치운의 설명이다.

김정태는 군수물자 생산 공장에서 일한 덕분에 일제의 징용과 징병에서 제외된 채 북한산과 금강산, 백두산 등을 자유롭게 오르며 재조선 일본 산악인들과 교류하고, 일본인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조선산악회 회원이 될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 철도국 직원들이 주축이 되어 1931년에 창립된 조선산악회는 철도로 대표되는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침탈의 첨병 노릇을 한 “제국의 브로커였고 전진기지였다.” ‘타츠미 야스오’로 개명한 김정태는 1942년 7~8월과 1943년 7~8월에 조선총독부가 지원하는 조선체육진흥회 주관 백두산 등행단에 기획과 간사로 참여했다.

당시 백두산 등정 참가자들은 ‘천황’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려 참배하는 동방요배와 ‘천황 폐하 만세’ 삼창을 해야 했다. 회고록에는 빠져 있지만 그가 일본어로 쓴 일기를 보면 김정태는 1942년 10월에 메이지 신궁 국민단련회(연성회) 행군 부분 조선 대표로 참가해 야스쿠니 신사와 메이지 신궁 등을 참배했다. 이렇듯 그가 산악인으로 맹활약하던 일제 말기 동포들이 겪은 수난과 고통에 관해 그는 지나가는 말로라도 언급한 바가 없다. 오히려 회고록에서는 부전강 댐과 흥남 질소비료공장 등을 가리켜 “근대화 건설”이니 “신과 자연의 섭리를 이용한 웅휘한 구상과 시설”이라며 감탄하고, 일기에서는 “대동아 건설의 의의, 대동아 성격과 우리들의 위치” 운운하며 일제의 침략 전쟁에 동조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백두산 등행단은 천지에 올라 ‘천황’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려서 참배한다는 뜻의 동방요배를 하고 ‘천황 폐하 만세’ 삼창을 했다. 한길사 제공
백두산 등행단은 천지에 올라 ‘천황’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려서 참배한다는 뜻의 동방요배를 하고 ‘천황 폐하 만세’ 삼창을 했다. 한길사 제공

1940년 11월3일 인수봉 등반에 관해서는 그의 일기에 비교적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11월3일은 메이지 전 일본 왕의 생일을 기념하는 메이지절인데, 조선총독부는 1940년 이날 창씨개명한 조선인들이 일본 이름으로 새로 박은 명함을 교환하는 행사 ‘명자교환회’를 전국적으로 열었다. 이날 인수봉 등반은 엄흥섭의 제안으로 김정태가 실무를 맡아 진행한 조선인 등반가들의 명자교환회였다. 그런데 김정태는 1970~80년대에 쓴 글들에서는 이 행사를 두고 “전무후무한 인수봉의 민족적인 대집단 등반” “민족적인 자립·자결의 정신적인 단합을 공감하고 확인할 수 있었던 매우 뜻깊은 집단 등반”이라는 식으로 민족주의적 포장을 시도한다.

1943년 7~8월 조선총독부 체육진흥위원회가 주최한 제2차 백두산 등행에 참여한 등행단 일부(양정반). 한길사 제공
1943년 7~8월 조선총독부 체육진흥위원회가 주최한 제2차 백두산 등행에 참여한 등행단 일부(양정반). 한길사 제공

김정태는 백운대, 만장봉, 인수봉, 선인봉, 집선봉, 비로봉, 노적봉 등을 초등(첫 등정)했다고 밝혔으며, 일본 북알프스와 후지산 등 역시 올랐노라며 “한국의 첫 외국 산 진출”이라 자평하지만, 이런 주장은 “사실 확인이 매우 어렵다.” 학력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김정태는 ‘초등’에 특히 집착했는데, 이는 “초등과 정복을 중시하는” “서구 알피니즘의 우월주의”를 반성 없이 받아들인 결과였다. 오늘날의 ‘14좌 완등’과 같은 이벤트는 그 연장이라 하겠다. 안치운은 경쟁과 실적에 매몰된 서구적 ‘등정주의’ 대신 ‘유산’(遊山)이라는 말에 담긴 선조들의 인문주의 산행 정신을 되살리자고 제안한다. 김정태의 굴곡진 삶과 글은 산과 인간, 산과 삶, 산과 역사의 잃어버린 연결을 되찾고 산행과 등반의 놀이정신을 회복하기 위한 반면교사로서 의미를 지니는 셈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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