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 철학은 서양 사상의 모태이자 서양 정신의 뿌리다. 20세기 영국 철학자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는 “서양 철학사 2000년은 플라톤 철학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다”라는 유명한 말로 이 철학의 비조를 기렸다. 서양 사상과 만나 대결한 지 100년이 넘었지만 지금까지 우리에겐 플라톤 전집 번역판이 없었다. 〈국가〉를 비롯해 그의 저작 몇 편이 우리말로 번역됐지만, 파편적·단속적이었을뿐더러 대개는 일어판의 중역이었다.
산치오 라파엘로의 벽화 〈아테네 학당〉(1509~1510) 중에서 나란히 걸어나오고 있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손가락을 하늘로 세운 이가 플라톤이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하늘은 이데아의 세계다.
이제이북스 제공
출판사 이제이북스(대표 전응주)가 그리스어 원전을 번역한 플라톤 전집을 출간하기 시작했다. 허약했던 학문의 토대를 단단히 다질 계기 하나가 마련됐음을 알리는 신호다. 이제이북스는 1차분으로 이제껏 우리말로 번역된 바 없는 〈뤼시스〉 〈알키비아데스1·2〉 〈크리티아스〉 세 권을 먼저 펴냈다. 전응주 이제이북스 대표는 “올 하반기에 2차분을 출간하고 이르면 2010년까지 플라톤 전집을 완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완간될 플라톤 전집 43권에는 플라톤 저작임이 확실한 34권 외에 위작으로 판명된 저작도 포함된다. 전 대표는 “위작이라고 해도 1천년 이상 플라톤 저작으로 통용됐을 정도로 플라톤 사상의 정수가 담긴 것이어서 전집에 넣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이제이북스의 플라톤 전집은 학자들의 집단적 토론과 탐구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이 전집 번역을 전담한 집단은 정암학당이다. 이정호 방송대 교수가 사재를 털어 만든 정암학당은 2000년부터 그리스어 원전을 읽고 공부해온 공부 모임이다. 철학 분야 석·박사급 20여명이 참여해 매주 2차례, 하루 세 시간씩 플라톤 철학을 붙들고 씨름했다. 방학 때는 강원도 횡성에서 1주일씩 합숙하며 하루 12시간 그리스어 원전을 강독했다. 대표 번역자가 번역해온 것을 다른 연구자들이 한 줄 한줄 읽으며 엄격한 검증을 거치는 공동학습이었다. 그 첫 결과가 플라톤 전집 1차분이다.
1차분 가운데 하나인 〈뤼시스〉(강철웅 옮김)는 플라톤의 전기 작품으로 판단되는데, 후기에 쓴 〈향연〉에서부터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이르기까지 계속될 주요 논의의 뿌리를 담고 있다. 특히 이 저작에는 ‘에로스’와 ‘필리아’에 관한 탐구의 초기 형태가 간직돼 있다. 에로스와 필리아는 둘 다 ‘사랑’이지만, 에로스는 ‘연애’를 뜻하고 필리아는 ‘우정’을 뜻한다. 〈알키비아데스1·2〉(김주일·정준영 옮김)는 여러 대화편에서 제시된 논의들이 압축돼 있기 때문에 고대에는 플라톤 입문서로 활용됐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소크라테스 명제가 상세히 이야기되고 있다. 〈크리티아스〉(이정호 옮김)는 아틀란티스에 대해 언급한 최초의 문서다. 유토피아 사상의 철학적 기원이 되는 이 책에서 플라톤은 쓰러져 가는 그리스 사회를 이상향과 대비시켜 전통적인 그리스 정신의 복원과 정립을 기원했다.
고명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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