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준 평전-지성과 역사적 상황’
인터뷰 / ‘김태준 평전-지성과 역사적 상황’ 펴낸 김용직 교수
한국 현대시를 연구해 온 김용직 서울대 명예교수(사진)가 다소 뜻밖의 책을 펴냈다. 〈김태준 평전-지성과 역사적 상황〉(일지사).
국문학자이자 일제 강점기·해방공간의 대표적인 좌파 혁명 운동가의 삶을 꼼꼼히 들여다본 것이다. 사상이 누리는 자유의 공간이 넓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김태준(1905~1949)이란 이름 석자는 여전히 드러내놓고 논하기에 부담스런 존재다.
경성제대 중국어문학과 출신인 그는 25살인 학부 3학년 때, 우리 문학의 근대적인 개별양식사로는 최초 저작인 〈조선소설사〉 원고를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1931년엔 또 다른 양식사인 〈조선한문학사〉를 펴냈다. 이어 〈조선가요〉(1934)를 출간했고, 한국사, 민속, 종교, 한국고전 관계 논문들을 잇달아 발표했다. 30살 이전에 대부분의 기성 연구자들보다 많은 저서를 내면서 강렬한 주목을 받았다. 문단과 학계의 총아가 된 것이다. 이런 업적을 토대로 그는 34살 때 경성제대 문학부에서 전공 강의를 가르치는 최초의 조선인 학자가 됐다.
뛰어난 국문학자이자 좌파혁명가
해방후 남로당 활동하다 총살형 그의 삶은 1년 뒤 조선공산당 재건 경성위원회(경성콤그룹)에 가담하면서 격랑의 한가운데로 빠져 들어간다. 이 당시 맺은 남로당 지도자 박헌영 이현상과의 인연은 이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어진다. 삶의 비극적인 종지부도 공유했다.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신념’을 지킨 것도 마찬가지다. 경성콤그룹 지하운동으로 2년 동안 옥살이를 한 뒤 1943년 세상 밖으로 나온 김태준은 노모와 아내, 어린 아들이 모두 죽었음을 알게 된다. 해방을 1년 남기고 독립운동을 위해 국외탈출을 시도한다.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연안행’이다. 해방과 함께 고국에 돌아와서는 박헌영과 남로당의 행보에 자신을 일치시킨다. 남로당 특수정보부장으로 49년 11월 수색의 군처형장에서 총살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김 교수는 “왜 김태준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지식인으로서 그가 가진 신념이 좋든 나쁘든 (그것을) 일관되게 지키고 또 (그것을 위해) 죽음까지 무릅써야 했던 것은 평가되어야 한다.” “대학교수급 (지식인) 가운데 김태준처럼 총살형을 당한 경우는 일본이나 한국에서 그가 유일하다”고도 했다. “신념 속에 죽었다”는 아우라보다 더 절실한 이유는 그가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의분’이 일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평가를 하지 않는 것은 일리가 있다. 하지만 그와 이데올로기가 같은 북한 문학사에서 김태준에 대한 언급이 일체 없다. 그는 그쪽에서는 틀림없이 애국자다.”
곧 〈북한문학사〉를 펴내는 김 교수는 문학과 정치 관련 각종 북한 사서를 들춰보았으나 단 한차례도 김태준이란 이름을 찾아내지 못했다고 했다. 남한의 연구도 미흡하다. 아직까지 제대로 된 전집이 없다. 기존 저작의 복사판 수준의 전집만 나와 있다. “김태준이 쓴 모든 자료를 엮어서 전집을 만들어야 한다. 그의 글이 굉장히 거칠다. 앞뒤 논리가 안 맞는 예도 부지기수다. 자료를 모두 모아 교정하고 정리하고 체계화해야 한다.”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있는 그대로 김태준에 대해 적어 놔야겠다”는 의도가 크게 작용했다.
그에게 김태준의 공과는 뚜렷이 갈린다. 혁명가로서 김태준은 해방 이전까지는 반제투쟁의 투사였다. 그 당시 계급투쟁은 반제투쟁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해방 이후 남로당 노선에는 비판적이다. 남로당의 ‘극좌모험주의’로 수많은 인명이 결과적으로 살상당했다고 본다. 남로당의 문화공작 책임자였던 김태준이 직접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으나 그의 지시로 지리산 문화공작대로 파견된 시인 유진오 등의 죽음을 불러왔다고 그는 적었다. 학자로서의 연구 업적에도 자신의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다. 가장 불만스러운 점은 〈조선소설사〉 등에서 나타나는 ‘성급한 계급사관’이다.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지냈다는 이유로 다산 정약용을 소외시키거나, ‘비과학적’이라면서 단군 건국신화를 제외시킨 판단은 수긍하기 힘들다고 썼다. 하지만 △고려시대 패관문학을 소설의 갈래로 포함시킨 점 △박지원의 〈양반전〉 〈허생전〉 〈호질〉의 발굴 소개 △허균 〈홍길동전〉, 김만중 〈구운몽〉을 부각시킨 점 △〈심청전〉 〈흥부전〉 〈장화홍련전〉의 소설사 등록 등은 굵직한 업적으로 자리매김했다. “남북 모두에서 외면하는 건 잘못”
삶·연구업적의 공과 엄격한 평가 김 교수의 뇌리에 인간 김태준이 각인된 시기는, 14살이던 1946년이다. 당시 문학가 동맹 기관지 〈문학〉에서 김태준이 쓴 ‘연안행’을 읽었다. 반제투쟁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일제 포위망을 뚫고 연안으로 탈출한 이야기가 “독서 능력이 보잘것없었던” 시절에도 매우 흥미진진했다. 하지만 이 수기는 해방정국의 좌우대립이 격화되면서 끝을 맺지 못한다. 김 교수는 김태준이 신념 때문에 연구를 계속하지 못한점을 몹시 아쉬워했다. “서울대에 남았으면 한국과 중국문학의 주인이 됐을 것이다. 업적이 괜찮다. 연안에서 귀국할 때도 서울에 가면 ‘난 이제 다른 것 그만두고 공부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총살당하기 직전에도 ‘안정되면 고려시대 문학사를 쓰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평생 연구자·학자로 남기에는 속된 말로 피가 너무 끓었다.” 신념을 저세상에 가져간 한 지식인의 남다른 행보에 대해 그는 이렇게 생각을 밝혔다. “하나님에게 운명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 있다. 자기 신념이나 믿음에 의해 사는 것이다. 지식인은 많이 안다. 고문으로 죽을 것이라는 것도 잘 안다. 그래서 (신념에 따라 살기가) 더 어렵다. 그의 신념·사상에는 여러 결함이 있다. 그럼에도 그런 신념 속에 죽으니까 평가되었다.”
글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사진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해방후 남로당 활동하다 총살형 그의 삶은 1년 뒤 조선공산당 재건 경성위원회(경성콤그룹)에 가담하면서 격랑의 한가운데로 빠져 들어간다. 이 당시 맺은 남로당 지도자 박헌영 이현상과의 인연은 이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어진다. 삶의 비극적인 종지부도 공유했다.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신념’을 지킨 것도 마찬가지다. 경성콤그룹 지하운동으로 2년 동안 옥살이를 한 뒤 1943년 세상 밖으로 나온 김태준은 노모와 아내, 어린 아들이 모두 죽었음을 알게 된다. 해방을 1년 남기고 독립운동을 위해 국외탈출을 시도한다.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연안행’이다. 해방과 함께 고국에 돌아와서는 박헌영과 남로당의 행보에 자신을 일치시킨다. 남로당 특수정보부장으로 49년 11월 수색의 군처형장에서 총살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김용직 교수 /사진 박종식 기자
그에게 김태준의 공과는 뚜렷이 갈린다. 혁명가로서 김태준은 해방 이전까지는 반제투쟁의 투사였다. 그 당시 계급투쟁은 반제투쟁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해방 이후 남로당 노선에는 비판적이다. 남로당의 ‘극좌모험주의’로 수많은 인명이 결과적으로 살상당했다고 본다. 남로당의 문화공작 책임자였던 김태준이 직접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으나 그의 지시로 지리산 문화공작대로 파견된 시인 유진오 등의 죽음을 불러왔다고 그는 적었다. 학자로서의 연구 업적에도 자신의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다. 가장 불만스러운 점은 〈조선소설사〉 등에서 나타나는 ‘성급한 계급사관’이다.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지냈다는 이유로 다산 정약용을 소외시키거나, ‘비과학적’이라면서 단군 건국신화를 제외시킨 판단은 수긍하기 힘들다고 썼다. 하지만 △고려시대 패관문학을 소설의 갈래로 포함시킨 점 △박지원의 〈양반전〉 〈허생전〉 〈호질〉의 발굴 소개 △허균 〈홍길동전〉, 김만중 〈구운몽〉을 부각시킨 점 △〈심청전〉 〈흥부전〉 〈장화홍련전〉의 소설사 등록 등은 굵직한 업적으로 자리매김했다. “남북 모두에서 외면하는 건 잘못”
삶·연구업적의 공과 엄격한 평가 김 교수의 뇌리에 인간 김태준이 각인된 시기는, 14살이던 1946년이다. 당시 문학가 동맹 기관지 〈문학〉에서 김태준이 쓴 ‘연안행’을 읽었다. 반제투쟁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일제 포위망을 뚫고 연안으로 탈출한 이야기가 “독서 능력이 보잘것없었던” 시절에도 매우 흥미진진했다. 하지만 이 수기는 해방정국의 좌우대립이 격화되면서 끝을 맺지 못한다. 김 교수는 김태준이 신념 때문에 연구를 계속하지 못한점을 몹시 아쉬워했다. “서울대에 남았으면 한국과 중국문학의 주인이 됐을 것이다. 업적이 괜찮다. 연안에서 귀국할 때도 서울에 가면 ‘난 이제 다른 것 그만두고 공부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총살당하기 직전에도 ‘안정되면 고려시대 문학사를 쓰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평생 연구자·학자로 남기에는 속된 말로 피가 너무 끓었다.” 신념을 저세상에 가져간 한 지식인의 남다른 행보에 대해 그는 이렇게 생각을 밝혔다. “하나님에게 운명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 있다. 자기 신념이나 믿음에 의해 사는 것이다. 지식인은 많이 안다. 고문으로 죽을 것이라는 것도 잘 안다. 그래서 (신념에 따라 살기가) 더 어렵다. 그의 신념·사상에는 여러 결함이 있다. 그럼에도 그런 신념 속에 죽으니까 평가되었다.”
김용직 교수 /사진 박종식 기자
사진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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