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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드라마 작가도 울고갈 ‘이야기’의 재발견

등록 2009-10-30 20:51수정 2009-10-30 20:54

〈서사철학-이야기 탐구의 아이리스〉
〈서사철학-이야기 탐구의 아이리스〉
‘종의 기원’ ‘플라톤의 대화편’ 등
이야기 구조의 철학적 탐구 시도




〈서사철학-이야기 탐구의 아이리스〉
김용석 지음/휴머니스트·2만5000원

작은 것들에서 철학적 주제를 발견하는 ‘일상의 철학자’ 김용석 영산대 교수가 <서사철학>을 펴냈다. 이번 책에서 그가 다루는 것은 ‘이야기’다. 인간은 ‘이야기하는 동물’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끊임없이 이야기를 짓고 푸는 존재다. 이야기가 없다면 삶도 없다고 해도 될 정도다. 그런데 지은이가 보기에, 이야기 자체를 철학적 탐구 대상으로 삼은 경우는 뜻밖에 많지 않다. 이 책에서 그는 이야기의 양상과 구조를 추적하고 탐색하는 ‘서사철학’을 시도한다.

이 책의 부제는 ‘이야기 탐구의 아이리스’인데, 아이리스는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무지개 여신의 이름이다. 무지개가 일곱 색깔로 이루어져 있듯이, 이 책도 일곱 가지 하위테마로 이루어져 있다. 신화·대화·진화·동화·혼화·만화·영화가 그것들이다. 여기서 ‘혼화’(魂畵)는 ‘애니메이션’ 또는 ‘애니메이티드 필름’이라고 부르는 장르를 지은이가 나름대로 번역해 붙인 이름이다. ‘혼이 살아 있는 만화’라는 원뜻을 살린 번역어인 셈이다. 이 혼화를 포함해 동화·만화·영화는 지은이가 다른 책에서도 종종 탐구 주제로 삼았던 것들이다. 이 책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것이 바로 대화와 진화다. 언뜻 보기에 이야기와 별 관련 없어 보이는 대상을 이야기철학의 주제로 삼은 것인데, 그의 설명을 통해 대화와 진화는 이야기의 보고로 드러난다.

‘대화’와 관련해 지은이가 이 책에서 사례로 삼는 것이 플라톤의 대화편, 그중에서도 초기 4부작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이다. 이 4부작은 기승전결의 구조를 지닌 완결된 작품으로 읽어도 좋다. 주인공은 플라톤의 스승 소크라테스다. <에우티프론>에서 시작해 <파이돈>에서 끝나는 이 4부작은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한 달 남짓 기간을 그리고 있다.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신을 믿지 않는다는 죄목으로 기소된 소크라테스가 법정으로 가 재판을 받고 수감돼 독배를 드는 것까지가 이 대화편의 내용이다.

이야기를 처음 철학적으로 탐구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 이야기의 핵심 원리로 ‘플롯’을 지목한다. 플롯은 사건들의 짜임이라고 풀어 쓸 수 있는데, 이 플롯이 얼마나 튼튼하냐로 이야기의 이야기다움이 판가름 난다. 그런 점에서 보면 플라톤의 이 4부작은 튼튼한 플롯을 내장한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 긴장감은 주인공 소크라테스 자신이 평생 자랑스러워하고 사랑해 마지않은 조국 아테네의 시민들에게 무고를 당했다는 역설적 사실에서 비롯한다. 이 역설적 상황에 처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의 신념으로 시민들을 설득하려 한다. 그는 법정에서조차 시민들에게 올바른 것을 가르치려 든다. 이런 태도가 오히려 시민들의 반감을 키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옳다고 믿기 때문에, 국외로 탈출하라는 친구 크리톤의 간절한 호소도 뿌리친다.

플라톤의 이 4부작에는 이야기의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요소들이 많다. 착하고 순진한 친구 크리톤은 “못 말리는 범인적 사소함”으로, 독약을 마시려는 소크라테스에게 말한다. “해가 아직 산등성이에 있네. (다른 사형수들은) 좋은 식사를 하고 (술을) 잔뜩 마시기도 하고 더러는 욕정을 느끼는 상대들과 성관계까지도 한다고 알고 있네. 하니, 서두르지 말게.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이런 일상의 대화가 이 작품의 사실감을 높여준다. 소크라테스의 굴하지 않는 신념과 담담하고 의연한 죽음은 이 4부작을 ‘아름다운 비극’으로 만든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찰스 다윈
찰스 다윈
소크라테스만큼이나 흥미진진한 사람이 찰스 다윈(사진)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다윈이 세운 진화론과 그 이론을 품은 저작들이다. 지은이가 보기에 진화론이야말로 이야기의 빅뱅을 일으킨 이론적 사건이다. 하나의 기원에서부터 시작해 생명의 나무가 무수히 뻗어나갔다는 공통조상론, 그리고 ‘변이’와 ‘선택’이라는 두 개념으로 모든 진화를 설명해내는 단순한 논리는 진화 이야기가 풍성하게 자랄 수 있는 토양 노릇을 한다. 다윈은 “찰스 디킨스, 토머스 하디, 조지 엘리엇, 버지니아 울프 못지않은 창조성과 상상력으로 가득한 작가”다. 실제로도 다윈은 어릴 적부터 “대단한 이야기꾼”이었다고 한다.

더 주목할 것은 다윈의 진화론 설명이 무수한 은유적 표현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이다. <종의 기원>의 원제는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 혹은 삶을 위한 투쟁에서 유리한 종족의 보존에 대하여’인데, 이 제목에서부터 은유는 힘을 발휘한다. ‘삶을 위한 투쟁’이라는 말로써 다윈은 생명세계를 극화하고 있다. 생명의 드라마를 쓰고 있는 것이다. <종의 기원>은 그런 드라마적 서술로 넘친다. “기나긴 세월 동안 몇 종류의 나무들 사이에서 얼마나 극심한 투쟁이 벌어졌던가. 나무들은 저마다 매년 무수한 씨앗을 뿌렸을 것이다. (…) 나무들과 씨앗들과 묘목들이 싸우고, 먼저 땅바닥을 덮어 다른 나무들의 성장을 저지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이런 드라마 작법은 <종의 기원>에 이어 펴낸 <인간의 유래>에서 인간 자체를 대상으로 삼아 반복된다. 다윈은 여기서 인간이 몇백년 안에 새로운 종으로 진화해 지금의 미개 인간을 절멸시킬 것이라고까지 전망한다. 이런 서사적 설명과 비전이 후대에 수없이 많은 다른 이야기들을 폭발시켰다. 지은이는 말한다. “진화론에 대한 창조론의 거센 반발은 ‘이야기의 기원’을 빼앗겼기 때문이 아닐까.”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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