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인 1926년 경성부 청사로 건립된 뒤 지금까지 여러차례 개·보수 과정을 거치면서 기형적인 모습을 갖게 된 서울시 청사. 위는 1930년대, 아래는 지금의 모습이다. 서울시 제공
26년…36년…63년…73년
행정개편 때마다 불어난 서울
시청도 불어나 6차례 증축
‘누더기 청사’ 올해말 역사 속으로
총독부~경성부 청사~조선은행 잇던
식민권력 동선이 해체된다
행정개편 때마다 불어난 서울
시청도 불어나 6차례 증축
‘누더기 청사’ 올해말 역사 속으로
총독부~경성부 청사~조선은행 잇던
식민권력 동선이 해체된다
커버스토리
번들거리는 대리석 바닥과 굽이치는 곡선형 계단. 높은 천정에 매달린 커다란 샹들리에. 출입기자로 첫 출근하던 날, 서울시청 본관은 꽤 호화로워 보였다.
그러나 첫인상은 사흘이 채 지나지 않아 바뀌었다. 서울광장 앞 시계가 걸려 있는 쪽 정문으로 들어가 계단을 올라가면 기자실이 있는 2층에 이르게 되는데 2층부터 시장·부시장실이 있는 3층까지는 그렇듯하게 꾸며져 있지만, 총무과·인사과 등 사무실이 몰려있는 4층으로 올라가면 영 딴판이었다. 조금 과장하자면 어릴적 읽던 소년소녀명작동화 <소공녀>에서 아버지를 여읜 가엾은 세에라가 살던 다락방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었다. 비좁은 복도엔 테이블·의자 등 집기등이 어수선하게 쌓여 있고 사무실 입구는 의외의 방향으로 여기저기 뚫려 있었다. 계단 위에 다락을 매달아 방을 내는 바람에 다락방 위로 사람이 걸어가면 쿵쿵 울렸다. 게다가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시청 본관을 돌아다니다 보면 같은 층에서도 좌·우 방향이 막혀 있는 곳이 두군데나 된다. 가령 3층 시민감사관실에서 같은 층 재무국장실로 가려면 한개 층을 내려가거나 올라가야 통한다. 4층 감사관실에서 예산과를 가려고 해도 마찬가지다. 이 경우엔 재정분석관실을 거쳐서 예산과를 갈 수 있긴 한데, 남의 사무실을 대뜸 가로질러 가는 것도 예의가 아니어서, 방문자들은 대개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목표지점을 찾아간다. 7~8년 동안 서울시에서 일한 공무원들도 한눈 팔다가 헤매는 일이 다반사다. 헤매지 않고 능숙하게 원하는 사무실을 찾아갈 수 있다면, 노련한 서울시 출입기자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22층짜리 건물 2008년 들어서
이처럼 미로 같은 건물이 생겨난 근본 원인을 따져 보면, 뭐니뭐니해도 그동안 서울이 너무나 커졌기 때문이다. 1926년 지금의 서울시청사의 전신인 경성부 청사가 완공되었을 때만 해도 서울은 조선시대 한양의 경계였던 4대문안 영역에 용산 일대를 합한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경성부 행정구역이 최초로 확장된 1936년, 서울은 영등포와 뚝섬일대 등을 집어삼키며 이전의 몸집보다 3.5배가 불어났다. 광복 이후 한국전쟁의 참화를 겪고 난 뒤 경제개발·도시화로 서울에 사람이 몰렸고 공간은 극적으로 팽창했다. 1960년에서 1979년까지 서울의 인구는 급속하게 불어나 1960년엔 244만5천명이었으나 1979년에는 811만4천명으로 약 3.7배가 늘었다. 1936년, 44년, 49년에 이어 서울시가 네번째로 행정구역을 확장시킨 63년, 광주군이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드디어 서울은 한강 이남 지역까지 빨아들였다. 지금의 ‘강남’이 형성된 것이다. 73년 고양구의 구파발동과 진관동을 흡수하면서 서울 확장사는 일단락됐으나 인구 밀집은 계속됐다. 서울이 커지고 복잡해지면서 서울시 공무원들의 할 일도 늘어난 것은 당연지사.
26년 서울시청사가 완공된 이래 55~87년에 이르기까지 6차례에 걸친 증축은 서울 팽창사를 거꾸로 반증한다. 서울이 커지는 동안, 시청사는 누더기가 됐다. 본래 8506㎡였던 건물이 증축을 거치며 3배 이상 되는 넓이인 2만5377㎡까지 늘어난 것이다. 느닷없는 다락방과 미로가 생겨난 것은 건물을 필요에 따라 잇고 덧대면서 생겨난 무규칙한 적응 형태였던 셈이다.
미로같은 서울시청이 올해 말이면 ‘역사’속으로 사라질 채비를 하게 된다. 다음달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본관 건물 일부만 남기고 나머지는 철거되기 때문이다. 철거 공간엔 지하 4층, 지상 22층 규모의 고층 건물이 2008년 말 들어선다. 살아 남는 본관 건물은 시의 역사를 보여주는 박물관 등으로 개조돼 시민들에게 개방될 예정이다.
새 청사 건립에 가장 신이 난 이들은 당연히 비좁은 공간에서 일해온 공무원들이다. 95년 서울시가 대검찰청 건물에 별관을 꾸린 이후에도 시장실이 있는 본관은 총무·예산·인사·감사 등 ‘핵심부서’들이 빼곡히 박혀 있었다. 시장·부시장이 찾으면 급히 달려갈 일이 많은 부서들이기 때문에 고위 간부들의 곁에 머물러 있는 것이 서로 편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보니 시청 본관의 경우 공무원 1인당 사무면적은 평균 1.6평(행정자치부의 권고 규정은 2.1평)에 불과하다. 게다가 3층의 대형홀에 쓰이는 집기들이 평상시엔 4층 사무실 복도를 뒤덮고 있어 좁은 공간이 더욱 협소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역대 시장들은 관습처럼 새 청사를 짓는 계획을 저마다 모색해왔다.
흥미로운 것은, 서울에서 어떤 새로운 지역이 ‘뜰’ 때마다 그곳이 시청 이전 적지로 주목받았다는 점이다. 여의도 개발이 한창이었던 70년대엔 여의도 중소기업협동조합 전시장이 꼽혔고, 80년대 초엔 서초동 현재 법조부지로 옮겨가는 방안이 첫손에 들었다(하지만 결국 서울시는 서초동 땅을 현재 서소문 시청별관터와 맞바꿨고, 이는 나중에 두고두고 서울시 공무원들이 ‘그 땅값이 지금 얼만데…’라며 땅을 치는 일이 된다). 고민 끝에 95년 당시 최병렬 시장은 현재 자리인 태평로에 신축하는 방안을 정했으나 막상 삽뜨는 일은 다음 시장에게 맡기고 만다. 첫 민선시장이었던 조순 시장은 전문가들로 하여금 ‘신청사건립추진위원회’를 꾸려 동대문운동장·뚝섬·보라매공원 등 두루두루 서울의 명소들을 돌아보게 하였고, 결국 언젠가는 되찾고 말 땅, 용산이 최종 낙찰됐다.
청사 후보지 터 언제나 폭등
그러나 미군을 안고 있는 용산이 언제 서울시로 돌아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용산 이전은 점점 불투명해져갔고 새 청사 건립설도 식어갔다.
결국 말만 무성하던 새 청사 건립에 불을 지른 것은 청계천사업과 뉴타운사업으로 나날이 추진력과 대범함을 입증하고 있던 이명박 시장이었다. 이 시장은 지난 4월5일 서울숲 나무심기 행사를 마치고 기자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느닷없이 “새청사를 짓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이에 앞서 정부가 수도 이전을 추진하면서 정부종합청사가 비게 되면 그동안 건물이 협소해 고통받던 서울시가 이사오면 어떻겠냐고, 김한길 열린우리당 수도권발전대책특위 위원장이 슬쩍 떠보는 발언이 있던 터였다. 이 시장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시청을 새로 짓겠다는 초강수로 응답한 것이었다.
새 청사가 지어지고 나면 본관 건물은 기념관의 역할 정도를 맡게 될 뿐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초고층 신축 건물에 휩싸여 그 위세를 상당히 잃게 될 것으로 보인다. 22층 첨단 빌딩과 견주어 보면 4층짜리 건물은 상대적으로 초라해보일 수밖에 없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경성일보사가 있던 터에 자리잡은 뒤 80년 가까이 서울시를 호령했던 서울시청사는 기나긴 안식의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이다.
새건물 역사적 형태적 조화를
건물 단위에서 나아가 좀 더 넓은 시야로 바라볼 때, 이는 조선총독부~경성부 청사~조선은행 본점(현재 한국은행)으로 이어지는, 일본인들이 구축했던 부와 권력의 동선이 해체되는 것을 의미한다. 개화기 서울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명동·충무로 일대에 터를 잡기 시작해 점점 그 세력을 ‘도심’으로 넓혀갔다. 경복궁 앞에 조선총독부가 들어서고, 경운궁 건너편에 경성부청사가 지어지고, 고종황제의 염원이 깃든 원구단을 가로지르는 대각선 도로에 조선은행본점이 들어선 것은 그들의 권력이 ‘거류지’를 넘어 도시 전체를 좌지우지하게 된 것을 의미했다.
건축평론가 이주연(공간그룹 이사)씨는 “어떤 이는 아예 시청 본관 건물을 없애야 한다고도 하지만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있는데다 식민의 흔적 또한 우리 역사의 일부이기 때문에 남겨 두고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본관 건물이 조악한 형태이긴 하나 기능상의 필요에 따라 공간이 가지를 쳐서 분화돼나간 것처럼, 앞으로 신축되는 청사도 앞의 본관 건물, 건너편의 경운궁, 성공회대성당 등과 역사적, 형태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건물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떤 건물이 제 기능으로 쓰이는 것을 ‘건축의 삶’이라고 규정할 때, 조선총독부 건물이 ‘타살’로 생을 마쳤다면, 서울시청은 자연사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두 죽음의 차이는 우리가 역사와 흔적을 기억하는 방식에 그만큼 여유와 성찰이 가능해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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