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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문학이라는 몹쓸 질병에 걸린 사람들

등록 2020-03-13 06:00수정 2020-03-13 10:52

[책&생각] 정여울의 문학이 필요한 시간
⑬ 문학이란, 당신을 향한 끝없는 편지

펜대 하나로 무거운 세상 전체 들어올리는 느낌 받는 작가들 얼마나 많을까
고통받는 사람들은 피해자 아닌 ‘이야기를 하는 사람’ 되어 귀환해야 한다
편지를 쓰고, 편지를 받는 여인들의 모습을 많이 그린 페르메이르의 작품, <하녀와 함께 편지를 쓰는 여인>(1670~1671).
편지를 쓰고, 편지를 받는 여인들의 모습을 많이 그린 페르메이르의 작품, <하녀와 함께 편지를 쓰는 여인>(1670~1671).

당신에게선 여전히 답장이 없네요. 하긴, 기대한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무릇 답장은 절대로 오지 않아야 제맛이라고, 나 자신을 타이르며 오늘도 하루를 견뎌냈습니다. 요즘은 하루하루를 살아낸다기보다는 견디고 있습니다. 누가 나를 찌르지도 않는데, 누가 나를 상처 입히지도 않는데, 이상하게도 많이 아픈 요즘입니다. 아마도 당신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끝없이 편지를 써야 하는 제 운명에 지칠 때가 되었나 봅니다. 저는 운명에 진 것일까요. 눈을 감으면, 운명에 케이오패 당해 널브러진 제 모습이 저절로 떠오르는 요즘입니다. 답장이 오지 않음을 알면서도 끝없이 편지를 써야만 그나마 숨을 쉴 수 있는 저는, 어쩌면 하이퍼그라피아(글쓰기중독증) 같은 몹쓸 병에 걸린 것일까요. 누가 나를 맘먹고 찌르지도 않는데 이렇게 매 순간 아픈 이유는, 제가 늘 들숨처럼 읽고 날숨처럼 뱉어내는 이 글쓰기, 이 문학이란 질병이 저를 좀처럼 놓아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학이라는 몹쓸 질병에 걸려 있는 한, 저는 영원히 치유되지 못할 것만 같습니다.

내 모든 글은 당신에게 쓰는 편지

저는 일상 속에서는 무척 뛰어난 연기력을 발휘합니다. 돌쇠처럼 일한다, 궂은일도 가리지 않는다, 자존심도 없냐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늘 괜찮은 척하는 데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연기력을 발휘하지요. 하지만 온종일 우아한 사회생활을 하다가 지친 몸으로 밤늦게 나의 작은 안식처로 돌아와 책을 펼치는 순간, 눈물이 쏟아집니다. 이제야 나 자신으로 돌아온 것 같아서요. 문학작품 속에 들어가면 영원히 답장을 받지 못할 곳에 끝없이 편지질을 하고 있는 또 하나의 나, 소설 속의 주인공들을 만나게 됩니다. 얼마 전에는 진 웹스터의 소설 <키다리 아저씨>를 다시 읽으며 고아 소녀 주디가 바로 저와 비슷한 운명임을 깨달았습니다. 주디가 자신의 이름 모를 후원자 키다리 아저씨의 친필 편지를 받기 위해 몸부림치는 장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무려 4년간 고아 소녀의 절절한 편지를 받으면서도 결코 답장을 보내지 않는 키다리 아저씨는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는 이 세상을 닮았습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키다리 아저씨는 제가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는 독자들, 제가 아무리 몸부림쳐도 바뀌지 않는 세상을 닮았습니다. ‘문학을 한다’는 건 그렇게 바뀌지 않는 세상을 향해 포기하지 않고, 희망조차 내려놓은 채,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을 두드리는 일을 닮았습니다. 얼마나 기약 없는 몸짓인지, 얼마나 생산성 떨어지는 활동인지 알면서도. 오늘도 멈추지 않는 이 그리움으로, 내 남아 있는 모든 꿈을 모아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내 남은 그리움, 내 남은 열정, 내가 미처 사랑하지 못한 나 자신까지도 ‘당신’이라는 이름의 메타포에 담아서요. 눈치 빠른 당신은 이제 아셨을 겁니다. 제 모든 글은 당신에게 쓰는 편지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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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다리 아저씨> 1919년 판 표지.

<키다리 아저씨>의 주디가 원하는 것은 화려한 선물이나 더 많은 용돈이 아니라, 오직 아저씨의 따스한 답장입니다. 그러나 키다리 아저씨는 도무지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죠. 사람의 따스한 온기, 정겨운 대화, 진심 어린 소통을 꿈꾸는 주디. 이런 주디에게 키다리 아저씨는 차가운 침묵으로 일관함으로써 그녀에게 여러 번 상처를 주지요. 물론 언젠가 키다리 아저씨의 정체는 밝혀지고, 모두가 감탄해 마지않는 달콤한 해피엔딩이 기다릴지라도, 이상하게 제 마음속에는 ‘키다리 아저씨의 영원한 침묵’만이 제게 남은 유일한 현실처럼 느껴집니다. 동화 같은 해피엔딩은 끝내 도달할 수 없는 환상이니까요. 한편으로는 ‘나에게 절대로 답장을 해주지 않는 독자’에게 포기하지 않고 편지를 쓰는 일이야말로 문학의 본모습이 아닐까요. 한사코 답장하지 않는 독자에게, 지치지도 않고, 포기하지도 않고 편지를 써야 하는 것이 작가의 의무라는 것을 생각하면, 키다리 아저씨의 기나긴 침묵은 어쩌면 주디에게 최고의 작가수업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키다리 아저씨의 침묵은 너무 가혹해서 주디는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됩니다. 키다리 아저씨, 당신의 얼굴은 물론 이름조차 모르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냐고. 키다리 아저씨가 자신을 교육하는 이유는 애정 때문이 아니라 오직 의무감 때문일 거라고. 키다리 아저씨는 주디의 편지를 읽지도 않고 휴지통에 버릴 거라고 말이지요.

상처받은 주디의 마음이 담뿍 느껴지는 이 부분을 읽다 보면, 대답 없는 수신자에게 매일 편지를 써야만 하는 작가의 운명이 원망스러워집니다. 언젠가는 나를 이해해주기를, 언젠가는 나의 말에 공감해주기를 기대하며, 오늘도 펜대 하나로 이 무거운 세상 전체를 들어올리는 느낌으로 살아가는 작가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키다리 아저씨에게 보내는 주디의 편지에는 자신의 학교생활을 묘사하는 앙증맞은 삽화도 함께 그려져 있다.
키다리 아저씨에게 보내는 주디의 편지에는 자신의 학교생활을 묘사하는 앙증맞은 삽화도 함께 그려져 있다.

영원한 이야기로 돌아올 답신을 기대하며

하지만 매일 절망을 견디는 쓰디쓴 인내가 저의 본질은 아닙니다. 저에게 사랑은 항상 절망보다 깊고, 크고, 너릅니다. 그래서 저는 자신의 우울과 복수심으로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파괴해버린 <햄릿>의 결말을 바꾸고 싶습니다. 죄 없는 오필리아를 끝내 비참한 죽음에 이르게 만든 햄릿의 증오를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해결하지 못한 증오와 복수심을,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여성에게 투사하여 그 여성을 미치게 해버린 햄릿의 무신경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에겐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보다 자신의 분노가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키다리 아저씨>의 주디는 저의 이런 뜨거운 분노를 싱그러운 유머와 위트로 위로해주더군요. 주디는 햄릿의 연인 오필리아가 된다면 극의 흐름을 바꾸어버리고 싶다고 고백합니다. 주디가 오필리아라면, 늘 햄릿을 행복하게 해주고, 다정히 쓰다듬어주고, 때로는 꾸짖기도 할 거라고. 햄릿의 우울증을 말끔히 고쳐버리겠다고. 자신이 오필리아가 되어 햄릿의 우울증을 낫게 하고, 왕과 왕비는 바다 한가운데서 사고를 당하여 세상을 떠나게 될 거라고.(물론, 아무도 모르게!) 햄릿과 오필리아는 아무 문제 없이 덴마크를 훌륭하게 다스릴 거라고. 햄릿에게는 통치를 맡기고 자신은 최고의 고아원을 설립하여, 키다리 아저씨가 방문한다면 기쁜 마음으로 구석구석 보여드리겠다고.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며 환하게 미소 지었습니다. 제 마음속 오필리아는 주디의 오필리아보다 훨씬 더 슬프고 비참한 얼굴이지만, 저는 언젠가 오필리아의 조용한 사랑이 햄릿의 시끄러운 분노를 이기는 세상을 꿈꿉니다.

주디는 자신에게 절대로 답장해주지 않고 오직 비서를 통해서만 사무적인 용건을 전달하는 키다리 아저씨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바로 그 키다리 아저씨 때문에 주디는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지요. 누군가 나의 삶을 진심으로 응원해주고 있다는 것. 비록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일지라도, 한 번도 그런 응원을 받아본 적 없는 주디에게 그것은 눈부신 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미처 위로하지 못한 그 모든 슬픔은 과연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아무도 쓰다듬어주지 못한 그 모든 상처는 대체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어 다시 되돌아옵니다. 고통받는 사람들은 단지 피해자에 그치지 않고, ‘한사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되어 귀환해야 합니다. 저는 비로소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어 다시 돌아온 사람들의 눈부신 비상을 믿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오늘도 미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마음으로, 그럼에도 여전히 미치지 않은 척하면서, 이 무시무시한 하루를 버텨내었겠지요. 내일도 답장을 보내지 않을 당신에게, 내가 문학을 통해 수혈받은 이 모든 사랑과 희망의 언어들을 담뿍 담아 오늘도 변함없이 편지를 씁니다. 다행히 이제는 알아요. 당신이 온갖 핑계를 대며 답장을 해주지 않을 때조차도, 당신은 ‘나만이 쓸 수 있는 나의 이야기’가 불현듯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우리 이야기꾼들은, 답장이 전혀 없는 그 모든 순간에도, 한사코 침묵하는 독자들을 향하여 영원히 끝나지 않을 사랑의 편지를 씁니다. 작가란, 어차피 답장을 받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끝없이 편지를 쓰는 사람들의 영원한 친구니까요.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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