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일하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등록 2020-04-03 06:01수정 2020-04-03 11:28

고르기 쉽고 다루기 쉽고 자르기 쉬운 ‘임시계약직 노인장 노동자’ 일상 담은 수기
공기업 퇴직 뒤 시급노동 경험 쓴 조정진씨 “생계 위해 일하는 현실 알리려 했다”

임계장 이야기: 63세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노동 일지
조정진 지음/후마니타스·1만5000원

“이른바 ‘고르기 쉽고, 다루기 쉽고, 자르기 쉬운’ (고, 다, 자) 인력이 바로 노인 인력입니다. 제가 경험한바, 노인이 노동하는 일터에는 보호장치나 사회 안전망이 없었습니다. 코로나19 시대 가장 고위험군이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일을 하고 있는 셈이죠.”

한국의 본격적인 노인노동 르포르타주가 탄생했다. ‘임시계약직 노인장의 노동일기’를 담은 책 <임계장 이야기>다. 지은이 조정진(63)씨를 지난 1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광주의 한 주상복합 건물에서 경비원 겸 청소원으로 일하고 있는 그는 이날 연차 휴가를 낸 뒤 대체근무자를 섭외해 놓고 아침 차를 타고 왔노라 전했다.

38년간 공기업 정규직으로 일하다 2016년 퇴직 후 지금까지 시급노동자로 일한 수기를 책으로 묶어낸 조정진씨는 1일 오전 &lt;한겨레&gt; 본사 옥상에서 벚꽃과 아파트가 보이는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동안 입을 굳게 다물고 웃지를 않았다. 그는 “아파트 경비일을 하다 넘어지면서 앞니가 많이 부서져 남들 앞에서 웃을 수 없어 그랬다”고 말했다. 경비원 동료들은 꽃잎, 낙엽, 눈송이 등 “하늘에서 내리는 모든 것이 쓰레기”라고들 했다.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38년간 공기업 정규직으로 일하다 2016년 퇴직 후 지금까지 시급노동자로 일한 수기를 책으로 묶어낸 조정진씨는 1일 오전 <한겨레> 본사 옥상에서 벚꽃과 아파트가 보이는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동안 입을 굳게 다물고 웃지를 않았다. 그는 “아파트 경비일을 하다 넘어지면서 앞니가 많이 부서져 남들 앞에서 웃을 수 없어 그랬다”고 말했다. 경비원 동료들은 꽃잎, 낙엽, 눈송이 등 “하늘에서 내리는 모든 것이 쓰레기”라고들 했다.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그는 정년퇴직 뒤 4년 동안 시급 노동자로 일해왔다. 2016년 첫해 최저임금은 시간당 6030원이었다. 노인 일자리는 생각보다 훨씬 더 열악했고, 그는 열심히 일한 대가로 건강을 잃었다. 주위의 격려로 틈틈이 적어온 노동일기를 재구성했다. 아파트, 빌딩, 버스터미널에서 배차원, 주차관리원, 경비원, 청소원 등으로 일하며 겪은 노인 노동의 현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초고를 만들었다. 그는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노동운동가가 아니었다. 다만 한국 사회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선하게 나이 들어 인격적인 모습을 갖춘 시민일 뿐이었다.

“제가 고유하게 겪은 일은 빼고, 모든 시급노동자, 비정규 노인 노동의 공통적인 기록만 엄정하게 모아 썼습니다. 나와 함께 일했던 동료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라는 생각에서 책을 쓴 것입니다. 동료들에게 들은 더욱 참혹한 얘기도 엄청나게 많지만 다 담지 못해 미안합니다.”

인터뷰 때 자리를 함께한 후마니타스 이진실 편집팀장은 “편집 과정에서 축소할 수밖에 없었지만 2000매짜리 초고에선 훨씬 심한 갑질과 비위생적이고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았다”고 전했다. 현장은 책보다 더 열악했던 것이다.

고르기 쉬운 노인 노동자

노인 일자리는 적고, 일하려는 사람은 많았다. 지난 4년 동안 지은이가 만난 수십명의 노인 노동자들은 (많은 이들의 오해처럼) 용돈벌이가 아니라 모두 생계를 유지하러 일터에 온 사람들이었다. 손 닿는 것마다 쓰레기였고, 오물이었다. 그보다 더한 구린내를 풍기며 살아가는 관리자와 사용자 들도 수두룩했다. 질병에 걸리면 산업재해 인정은커녕 곧바로 해고되었고, 실업급여도 받을 수 없었다. 실업급여를 받자면 구직활동을 해야 하는데 아픈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처지가 “우리나라 나이 든 남녀 노동자들의 공통 경험”이라고 했다.

1978년 공채로 공기업에 입사한 조정진씨는 38년간 정규직으로 일하다 2016년 60살에 퇴직했다. 평생 사무직으로 성실히 일했지만 자녀 학자금 대출이며 주택 구입 자금 등으로 빌린 돈을 서둘러 갚아야 했다. 딸 혼사에 큰 비용이 들었고 인문계 대학생 아들은 전문대학원에 가고 싶어했다. 연금은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한해 교육비만 2000만원. 하지만 부부 모두 평생 검소한 생활은 인이 박였고, “어떤 일이라도 잘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충분했다. 저임금 비정규직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나이 든 퇴직자가 아름다운 멘토가 되어 젊은이들과 어울려 일한다는 영화 <인턴>은 판타지였다. 퇴직 뒤 경력은 “녹슨 훈장”이 되었다. 친지의 도움으로 처음엔 중소 광고회사에 들어갔지만 예의바르고 준수한 젊은이들 앞에 앉은 자리가 가시방석이었다. 차라리 몸을 써서 깨끗하게 일하면 아쉬운 소리도 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가 임시계약직 노인 노동의 출발이었다.

작은 버스 회사 배차 계장으로 시급 일을 시작하니 사람들은 “임계장, 임계장” 하고 불렀다. “임시계약직 노인장”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25년 일하던 전임자가 하루아침에 해고되어 인수인계도 받지 못해 허둥지둥 갈팡질팡했다. “나이 들면 온화한 눈빛으로 살아가고 싶었는데 백발이 되어서도 핏발 선 눈으로 거친 생계를 이어 가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는 기록했다. 일하면서 “임계장”이라는 고단한 이름을 수도 없이 떠올렸다.

자르기 쉬운 사람들

버스회사에서는 3개월을 일하다 탁송 작업중 부상을 입고 이튿날 해고됐다. 그뒤 아파트 경비직으로 1년 동안 일하며 30년 넘은 아파트 두개 동 350세대를 혼자 담당했다. 어느날 화단에 호스가 아닌 양동이로 물을 주었다며 주민자치회장이 징계위원회를 열었고, 이어 해고됐다. 고층빌딩 경비원으로 들어가 일하면서는 브이아이피(VIP) 부인의 차량을 향해 호루라기를 불었다며 해고됐다. 대기업인 버스터미널 회사 보안요원으로 일하다 뜨거운 여름 햇볕에 쓰러진 다음날, 전화로 병상에서 해고됐다. 척추염으로 석 달 입원을 했고 일곱 달 동안 투병한 끝에 무리해서 일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강력한 항생제로 신장을 다쳐 곧장 치료를 받아야 했지만 생계 때문에 지금도 “임계장”으로 일한다.

“경비로 일할 땐 24시간 맞교대를 하고 아파트와 고층빌딩을 번갈아 오가면서 하루도 쉬지 못했어요. 100일 가량 집에 가지 못하고 아내가 가져다주는 3개의 도시락을 먹고 하루를 견뎠습니다. 결국 그 소득이 병원비로 다 들어갔지만요.”

그는 10여권의 메모장을 보여주었다. 매일 빼곡하게 자신의 일과 감정을 기록하기 시작한 건, 메모광이어서가 아니라 납득되지 않는 상황 때문이었다. 정규직으로 일한 시간이 길었던 그는 고용주가 시급 노동자를 상대로 행하는 정신적, 육체적인 학대의 문제를 인지했다. 지방고용노동청에 민원도 해봤다. 하지만 “우리나라 용역업체 가운데 법을 지키는 곳은 아무 데도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4곳의 일자리 중 아파트 경비를 제외하고 직접 고용인 곳은 아무 데도 없었어요. 파견법이 생긴 이래 지금까지 전형적인 일이라며 이 일까지 바로잡고 개입할 행정력이 전혀 안 된다고, 정치와 입법으로 해결할 문제라고 설명했습니다. 더 많은 사람이 현실을 알아야 고칠 수 있는 것이었죠.”

ⓒ Pati 일러스트레이션 스튜디오 권민호
ⓒ Pati 일러스트레이션 스튜디오 권민호

다루기 쉬운 노인 노동

추운 겨울 땀이 꽁꽁 언 얼음 내복을 입고 자다가 벌떡 일어나 얼어죽지 않으려 동틀 때까지 제자리에서 뛰고 또 뛰었다. 오수관이 터진 곳에서 줄줄 흐르는 오물을 퍼내고, 석면 가루 떨어지는 지하실에서 3분 만에 밥을 먹었다. 얼굴 모르는 경비원이 죽어나간 지하실에서 도시락을 열었고 동병상련, 그의 혼백을 위로하는 편지를 썼다. 인적 드문 곳에서 몰래 아침밥 한 술 뜨다가 이곳에서 뭘 하느냐는 동료의 호통에 뚜껑을 그대로 닫기도 했던 경험을 그는 이렇게 적었다. “밥을 못 먹어서 서러운 것이 아니라, 밥도 못 먹게 하는 사람을 동료라 여기고 일해야 하는 현실이 서러웠다.”

책을 쓰면서는 노인 노동의 조건과 현장을 객관화하면서 감정도 배제하지 않았다. 뼛속까지 치사하고 서러워서 고통스러운 차별과 법적 미비가 비정규 노동의 핵심이다. 그는 “네 군데 일터 모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지만, 대기업의 행태는 몹시 심했다”고 했다. 대기업이 운영하는 한 버스 터미널에서는 하루 10시간 이상 삭풍 한가운데서 일했지만 방한 장비조차 지급받지 못했다. 노조가 있는 정규직 승무 사원들에겐 깨끗하고 따뜻한 숙소가 제공됐지만 비노조원인 경비원 공동숙소에서는 16명이 1980년대 군대 내무반보다 못한 곳에서 잠을 자야 했다. “직원은 경비에게 무슨 일을 시켜도 규정 위반이 아니었고, 이전에 일했던 아파트와 고층 빌딩이 근거 없이 갑질을 했다면 대기업은 갑질을 정당화하는 규정까지 만들어 놓고 있었다.”

아르바이트 청년, 여성 청소노동자 등 다른 비정규직들과 교류한 그의 경험이 책 안에서 생동감 있게 느껴지는 것은 연대의 따뜻한 온기 때문이다. 반면 비굴하게 반장이 되고 난 뒤 동료들을 감시하고 차별하는 얄팍한 인간의 표정을 포착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사회적 약자들도 인간적 품위를 보장받는 나라”까지 바란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최소한의 생계비를 벌 수 있는 나라를 원했을 뿐입니다.” 꽃잎, 낙엽, 눈송이 등 “하늘에서 내리는 모든 것이 쓰레기”였지만 그는 채 피지 못한 꽃봉오리를 빗자루로 미리 쳐내는 동료 경비원을 붙잡아 말렸다. 인간성을 잊지 않으려 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경비원은 감시·단속적 근로자가 아니다

지은이는 아파트나 빌딩의 경비원이 더 이상 감시·단속적 근로자가 아니라는 점을 특히 밝히고 싶어 했다. 감시·단속적 근로자란 감시 업무를 주 업무로 하며 근로가 간헐적이라 대기시간이 많고 피로가 적은 업무를 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결국 노는 시간이 많고 쉬운 일이라는 것인데, 경비업은 더 이상 이런 직종이 아니라는 얘기다. 최근 최저임금 상승으로 경비원 숫자를 줄이는 사례가 속출했고 관리원들은 과중한 노동에 시달린다. 아파트 한 가구당 소액의 관리비 증가를 감내하면 될 일이지만 이조차 쉽지 않다고 했다. 전국민의 60%가 아파트 거주민이며 이들은 정치적인 표요, 이익단체도 많기 때문이다.

“감시·단속적 노동자가 아닌 이들에게 적용되고 있는 규정을 배제하는 것이 노인 노동문제 해결의 첫 단추가 될 것입니다. 근로기준법이 제대로 적용되면 일반 경비원도 주 52시간 근무 제한과 주휴일 근무, 야간근무 등의 적용을 받게 되죠. 사실은 65살 이상의 노인 노동은 훨씬 비참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누군가 그 이야기도 이어갔으면 합니다. 결국, 나중에는 이런 것 다시 쓸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동물이 사라진 세상, 인간이 고기가 돼 식탁에 [책&생각] 1.

동물이 사라진 세상, 인간이 고기가 돼 식탁에 [책&생각]

[책&생각] 21세기 철학의 최전선, ‘죽은 물질 되살리는’ 신유물론 2.

[책&생각] 21세기 철학의 최전선, ‘죽은 물질 되살리는’ 신유물론

“남자가 되게 해주세요” 부처에게 빌었던 이유 3.

“남자가 되게 해주세요” 부처에게 빌었던 이유

[책&생각] ‘일리아스’, 해설서 먼저 읽는 게 훨씬 좋은 경우 4.

[책&생각] ‘일리아스’, 해설서 먼저 읽는 게 훨씬 좋은 경우

김민기라는 학전의 ‘뒷것’, 다큐로 만난다 5.

김민기라는 학전의 ‘뒷것’, 다큐로 만난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