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구수한 사투리로 독자 사로잡은 ‘애린 왕자’

등록 2021-02-26 04:59수정 2021-02-26 09:45

[책&생각] 홍순철의 이래서 베스트셀러

애린 왕자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최현애 옮김, 김일광·박창원·이상규 감수/이팝·9900원

충청도 출신인 필자에게도 사투리와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다. 청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학을 위해 상경한 필자는 촌놈처럼 보이기 싫었다. 충청도 억양을 자제하고 자연스러운 서울말을 쓰면서 서울 사람 행세를 했다. 주말이면 지하철 2호선 순환선을 타고 한 바퀴 돌면서 서울 지하철 노선을 외웠고, 친척 집인 송파구에서 학교를 오가다 보니 주변 친구들도 별 의심 없이 서울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몇몇 친구들과 김치말이 국수를 먹다가 시원한 맛에 감탄해 무심코 입에서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이거 한번 마셔봐. 엄청 시원햐!” 무의식 속에 충청도 사투리가 새겨져 있을 줄이야.

대구에서 행정병으로 군 복무를 할 때였다. 행정계 사무실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렸고 이등병은 바짝 군기가 든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행정계 홍이병입니다. 통신보안!” 전화기 너머 모 상사가 대뜸 물었다. “딸딸이(실내용 슬리퍼를 지칭하는 경상도 사투리) 보급 나왔나?” “네?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딸딸이 보급 나왔냐고?” “죄송합니다! 뭐라고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잔뜩 짜증 난 목소리로 재차 질문을 하던 그 상사는 얼마 후 행정계 사무실로 달려왔고 그날의 사건은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날은 경상도에서 충청도 출신 홍이병이 말귀 못 알아먹는 서울 사람으로 비로소 인정받은 날이었다.

사투리는 한때 이렇게 ‘감추고 싶은 언어’ ‘촌스러운 언어’ ‘곧 사라질 언어’였다. 하지만 최근 다시 사투리가 주목받고 있다. 지역 사람들이 살아온 역사와 흔적이자 독특한 문화유산으로서 사투리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애린 왕자>(이팝)의 놀라운 인기는 사투리의 재발견과 관련이 깊다.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경상도 사투리로 각색한 <애린 왕자>는 유럽에서 먼저 출간돼 교포들 사이에서 화제의 책으로 회자되더니, 지난해 말 우리나라에서도 출간돼 입소문을 타고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어린 왕자>를 억양도 세고 무뚝뚝한 경상도 사투리로 옮긴 포항 출신 최현애 작가는 <애린 왕자>를 펴내는 작업을 동심을 찾는 과정에 비유했다. “<애린 왕자>는 골목 띠 댕기면서 흙 같이 파묵던 시절 그리버가 같이 놀던 얼라들 기억할라꼬 내가 다시 써봤다. 두둥실 정겨븐 이 말, 이 사투리 이기 바로 내 친구들 그 자체다.”

사투리는 표준말의 반대말이다. 지방의 언어 사투리는 표준이 아니라는 이유로 관심 밖으로 밀려났고, 너도나도 서울로 올라와 서울 사람 흉내를 내느라 잊혀진 말이었다. ‘다른’ 것이 ‘틀린’ 것으로 여겨지던 시대에 사투리는 표준어와 다르다는 이유로 틀린 말로 취급됐다. 그런데 취향과 덕후의 시대에 사투리가 경쟁력으로 각광받고 있다. “4시에 니가 온다카믄, 나는 3시부터 행복할끼라. 4시가 되모, 내는 안달이 나가 안절부절 몬하겠제” “사막이 아름다븐 기는 어딘가 응굴(우물)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데이” “내 비밀은 이기다. 아주 간단테이. 맘으로 바야 잘 빈다카는 거. 중요한 기는 눈에 비지 않는다카이.” “니 장미를 그마이 소중하게 만든 기는 니가 니 장미한테 들인 시간 때문아이가.” 억센 경상도 사투리로 번역된 <어린 왕자>의 명문장이 왠지 정감이 간다. <어린 왕자>를 읽었을 때 느낄 수 없었던 고향 냄새가 난다.

BC에이전시 대표, 북칼럼니스트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하버드생 재벌 사위, ‘눈물의 여왕’서 동그랑땡 굽는다 1.

하버드생 재벌 사위, ‘눈물의 여왕’서 동그랑땡 굽는다

나는 내시경…서울의 항문 속에 들어간 청년 작가 2.

나는 내시경…서울의 항문 속에 들어간 청년 작가

국립미술관과 회고전시 갈등 빚은 김구림 작가 “한국 떠나겠다” 3.

국립미술관과 회고전시 갈등 빚은 김구림 작가 “한국 떠나겠다”

“K팝 발전 해치는 K팝 시상식”…오죽하면 음악계에서 반대 성명 4.

“K팝 발전 해치는 K팝 시상식”…오죽하면 음악계에서 반대 성명

원작보다 섬뜩한 연상호판 ‘기생수’, 기생생물은 볼 만한데… 5.

원작보다 섬뜩한 연상호판 ‘기생수’, 기생생물은 볼 만한데…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