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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 빚어내는 보이지 않는 손, 네트워크

등록 2021-02-26 05:00수정 2021-02-26 14:36

누구와 어울리고 어디서 활동하느냐로 얻는 정보에 따라 기회 달라져
동종선호로 인한 비유동성이 불평등 키워…“네트워크, 세습보다 강력”

휴먼 네트워크: 무리 짓고 분열하는 인간관계의 모든 것

매슈 O. 잭슨 지음, 박선진 옮김/바다출판사·1만9800원

그림의 왼쪽 맨끝 사람(회색 정장)과 오른쪽 맨끝(파란 상의)은 네트워크의 그물에서 빠져 있다. 이런 네트워크 소외가 불평등을 키울 수 있다고 지은이는 주장한다. 게티이미지뱅크
그림의 왼쪽 맨끝 사람(회색 정장)과 오른쪽 맨끝(파란 상의)은 네트워크의 그물에서 빠져 있다. 이런 네트워크 소외가 불평등을 키울 수 있다고 지은이는 주장한다. 게티이미지뱅크

1994년 미국은 독특한 실험을 했다. 공영주택에 거주하는 4600가구를 세 그룹으로 나눠 첫 번째 그룹에게는 빈곤율이 낮은 지역, 즉 잘 사는 동네에서만 쓸 수 있는 임대료 바우처를, 두 번째에는 어디서든 사용 가능한 바우처를 지급했다. (세 번째 그룹은 대조를 위해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그로부터 10년 가까이 흐른 뒤 연구자들은 세 그룹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추적했다. 가장 잘살고 있는 그룹은 첫 번째였다. 이들 가운데는 임대료 바우처를 쓰려고 무리해서 부유한 동네로 이사한 가족이 많았는데, 이 가정의 아이들은 “대학에 진학할 확률이 16% 높았고, 상당수가 상위권 대학이었으며, 그 이후에도 가난한 지역에 살거나 한부모 가정이 되는 확률이 낮았”다. 소득 또한 대조군보다 30% 높았고, 평생 30만 달러(한화 약 3억6000만원) 더 벌었다. 잘사는 동네로 이사했더니 실제로 조금 더 잘살게 된 셈이다.

이 실험은 ‘네트워크’가 지닌 힘을 보여준다. 한국사회에서 네트워크는 ‘인맥’이라는 협소한 의미로 쓰인다. 누군가에게 가닿아야 할 때 동원할 수 있는 인적 자원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휴먼 네트워크>의 지은이 매슈 O. 잭슨 미국 스탠퍼드대 경제학과 교수는 네트워크란 인맥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고 강력한 힘이라고 말한다. 누구와 어울리고 어떤 무리에서 활동하는가는 한 사람의 사고방식과 폭을 지배하고 나아가서는 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정보와 기회의 양까지 결정짓는다고 주장한다. 이런 막강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네트워크는 불평등의 크기까지도 줄였다 늘렸다 하는 진짜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사회·경제 네트워크 과학의 권위자인 지은이는 네트워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부터 설명한다. 인간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과 잘 뭉쳐진다. ‘동종선호’ 현상이다. 자신과 성향이 비슷할수록 상대를 예측하기 쉽고, 협력하기 쉬우며, 관계에 드는 스트레스가 줄기 때문이다. 지은이가 인용한 연구에 따르면, 미국 인구에서 흑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10%가 넘지만, 백인 중 흑인과 결혼하는 사람의 비율은 1%가 채 되지 않는다. 혹시 교육·소득 격차 때문은 아닐까. 이를 걷어내기 위해 우리 조상처럼 수렵채집 생활을 하는 하드자족을 들여다봤다. “체중이 7.5㎏ 범위에서 비슷할수록 그들이 서로 연결될 확률은 세 배가 된다.” 동종선호는 본능에 가깝다.

강력한 동종선호의 결과로 네트워크에 극명한 분열이 발생한다. 비슷한 것에 안정감을 느끼는 마음을 뒤집으면 다른 것에 불안감을 느끼는 마음이다. 아주 작은 차이도 분열의 씨앗이 된다. 미국의 경우, 특정 지역에 소수자 인구 비율이 5∼20% 안팎이 되면 백인들은 그 지역을 떠난다고 한다. 이처럼 작은 ‘불순물’도 용인하지 않는 마음은 사회를 비유동적으로 만든다. 부자는 부자끼리, 백인은 백인끼리만 모여 살고, 서로 섞이길 거부하는 것이다.

이런 비유동성이 불평등을 키운다는 게 지은이의 핵심 주장이다. 기존의 논의는 반대였다. 불평등이 심한 나라일수록 계층 간 이동이 어려워진다는 게 정설이었다. 지은이는 이를 부정하지 않으나, 그 반대도 참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앨런 크루거의 ‘위대한 개츠비 곡선(불평등할수록 비유동성도 커진다)’의 x축과 y축을 뒤집어, 그 역(비유동성이 클수록 불평등도 심하다)도 성립함을 시각화해 독자 앞에 펼쳐놓는다. “아이들의 선택 기회와 행동을 제약하는 것은 동종선호에 의해 형성된 행동 양식과 정보의 견고한 네트워크다.” 교육열이 높은 부모들의 네트워크에서 오가는 정보는, 먹고사느라 바빠 자녀 교육에 신경을 못 쓰는 부모들의 네트워크로 넘어오지 못한다. 지은이는 미국 공립대학의 경우 등록금으로 내는 돈보다 장학금 혜택을 더 많이 받아 평균 학비가 -2320달러(-277만원)임에도 많은 저소득층 학부모가 이런 정보로부터 소외돼 지레 겁을 먹고 자녀의 진학을 반대하거나 돕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기술이 저임금 노동자를 대체하는 시대에, 교육 격차는 소득 격차로 직결된다. 지은이가 “네트워크의 힘은 부의 세습보다 강력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유다.

‘위대한 게츠비 곡선’의 x축과 y축을 바꿔도 양의 상관관계를 보였다. 지은이는 이를 토대로 비유동성이 불평등을 키운다는 점을 보여준다. 바다출판사 제공
‘위대한 게츠비 곡선’의 x축과 y축을 바꿔도 양의 상관관계를 보였다. 지은이는 이를 토대로 비유동성이 불평등을 키운다는 점을 보여준다. 바다출판사 제공

일자리를 구하는 데도 네트워크가 손을 쓴다. 추천채용이 50∼70%에 이르기에(조지 슐츠 연구) “당신의 (일자리) 운명은 친구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일하는 친구가 많을수록 채용 정보를 제공받고, 추천을 기대하기도 쉬워서다. 실제 1930년대 미군 한 중대에서 함께 생활하던 전우들의 고용률이 10% 증가하면, 그 일원 중 한 명이 고용될 확률이 4% 증가했고, 기숙사 홀메이트(같은 층을 쓰는 친구)의 취업률이 오르면 그 학생이 고용될 확률이 24% 증가”했다고 한다. 군대나 기숙사나 랜덤 배정이어서 ‘동종선호’를 할 수 없다. (기업이 선호하는) 성실한 사람들끼리 어울렸기에 나온 결과가 아니라는 얘기다. 일단 네트워크가 형성되면, 그 네트워크를 타고 흐르는 정보만으로도 더 많은 기회가 생긴다. 이를 뒤집으면 “사회적 연결망을 통해 기회나 정보를 얻기 어려운 사회 계층이 있다”는 말도 된다. 고용시장에서 여성이 대표적이다. 동종선호에 의해 구직자 여성은 여성끼리 어울리는데 고용주 남성(다수)은 남성을 선호한다. 네트워크가 사회적 약자의 진입을 막는 거대한 그물(네트)로 기능하는 셈이다.

때문에 지은이는 ‘자본세’나 ‘기본소득’보다 네트워크에 주목하는 게 불평등을 완화하는 데 더 효과적일 수 있다고 짚는다. ‘그들만의 네트워크’에서 공유되는 정보를 소외 계층에게 제공하거나, ‘대학 재학생-저소득 고등학생’의 매칭으로 찢어진 네트워크를 이어주는 식이다. 문제의 무게에 비해 다소 가벼운 대안이라는 인상을 피하기 어려우나, 복지 정책에서 간과되어 온 ‘네트워크 소외’를 짚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전문적인 번역과 꼼꼼한 각주도 돋보인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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