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결과의 단순화 또는 속임은 엄밀히 따지면 학교에서 실험실에서 쉽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과학자들의 동료심사와 실험재현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렇기에 천재 과학자에 의한 단 한번의 성공을 믿기보다는 과학자 집단 안에서 충분한 검증을 거치며 신뢰와 합의를 구축하는 과정이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황 교수 사태는 그렇지 못했던 과학의 맹점과 노골적인 속임수를 보여준 사례다. 고개 숙인 황우석 교수 사진을 포토샵으로 처리.
과학적 성과의 보증 장치는 저명 학술지에 싣는 ‘동료심사’와 ‘실험결과의 재현’.
그러나 사이언스는 사기를 옹호했고 재현은 보통 수십년 걸리는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과학자는 속임의 유혹에 빠지지만 참된 발견의 짜릿함이 과학의 진정한 가치다.
그러나 사이언스는 사기를 옹호했고 재현은 보통 수십년 걸리는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과학자는 속임의 유혹에 빠지지만 참된 발견의 짜릿함이 과학의 진정한 가치다.
커버스토리
황우석 교수 연구팀의 줄기세포 논문조작 사건은 실험실 안의 속임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저명한 과학사회학자 해리 콜린스 교수(영국 카디프대학)가 황 교수 사태를 지켜보며 <한겨레>에 장문의 원고를 보내왔다. 카디프대학에서 지식·전문기술·과학(KES)연구센터 소장을 맡고 있는 콜린스는 사회학의 시각으로 과학을 이해하는 과학사회학 분야의 권위자다. 여러 나라에서 널리 읽힌 <골렘> <닥터 골렘> 등을 저술했다. 그의 글은 황 교수 사태를 바라보는 해외의 시각, 과학 활동을 바라보는 사회학의 시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과학 실험이 까다로운 일이라는 건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예를 들어, 끓는 물에 담근 온도계는 물이 순수하게 정제되고 대기압이 표준상태에 있을 때에만 정확히 섭씨 100도를 나타낸다. 이런 실험을 학교에서 할 때 온도는 섭씨 1도나 2도 정도 차이가 날 것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학생들에겐 결과값이 100도임을 스스로 증명했다고 얘기해준다. 그러니까 바로 시작부터, 실험은 실제 그런 것보다 더 쉬운 일이라 생각하고, 소소하게 속여 보고 싶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천재 부각 수십년 노력 묻혀
교과서에서도 마찬가지다. 과학자 집단을 상대로 규명하고 입증하기까지 50년이나 걸린 성가신 연구결과가 마치 천재 한 명에 의해 한두 달이면 끝나는 것처럼 묘사된다. 나의 공저 <골렘>에서, 우리 공저자들은 이런 점을 다 설명했지만 과학에 대해 널리 퍼진 이미지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뛰어난 개인들은 결정적 요소로 여겨지며, 더 큰 집단 안에서 합의를 구축하려는 오랜 각고의 노력은 결정적 요소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래서 속임은 별 생각없이 시작될 수 있다. 교실에서 그리고 교과서에서 속임은 단지 무엇을 단순화하는 것 이상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큰 팀들로 이루어진 생명과학계에서, 부하 연구원들이 당신이 듣고 싶어하는 바를 당신한테 말할 때 단지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 그 연구원들이 내놓은 결과물들을 따져보지 않는 것이 바로 속임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 가장 유명한 실험들 가운데 하나인 밀리칸의 전자 연구(1923년 노벨상 수상)는 결과에 대한 ‘자유분방한 해석’과 관련된 것이다. 밀리칸의 실험노트를 보면, 그의 발견과는 배치되는 데이터도 일부 나타난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무시했다. 밀리칸의 경우, 그가 했던 일은 지금에 와서 뛰어난 과학적 선견지명으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과학자 집단은 결국에 그가 옳았음을 입증했기에 말이다. 완두콩의 형질 유전에 관한 멘델의 선구적 연구도 이와 비슷하다. 멘델은 그가 성취했노라고 말한 연구결과(그것은 너무도 그럴듯해서 진실이라고 믿기 어려울 지경이었다)를 아마도 성취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 제시된 바 있다. 멘델과 밀리칸의 데이터에 나타난 모순은 그들이 숨지고 오래 지난 뒤에 역사학자들이 그들의 실험노트를 다시 살피기 시작할 때까지 드러나지 않았다. 황우석 교수의 속임수는 곧바로 드러났다. 이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황우석 사태가 과학의 실패를 보여주기보다는 과학의 성공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황우석 사태는 현대 과학이 훌륭하게도 자기 규율하는 활동임을 보여준다고 이들은 말한다. 이제 좀더 자세히 그것이 진실인지 살펴보자. 멘델도 숨지고 오랜 뒤 검증 널리 알려진 미디어 과학자들, 정부 자문인들, 학술저널의 편집자들 같은 과학의 ‘대변인들’은 종종 두 가지의 주요 메커니즘이 과학적 결과를 보증한다고 말한다. ‘동료심사’와 ‘실험결과의 재현’이 그 두 가지다. 그러나 여기서(황우석 사태에서) 우리는 동료심사가 작동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가장 엄격한 동료심사 체제 가운데 하나를 갖춘 최고의 국제 과학저널 <사이언스>는 황 교수의 논문을 출판했고, 최근까지도 지속적으로 그를 옹호했다. 마침내 사기가 인정됐을 때, 동료심사 체제가 사기를 막아줄 방어수단이 될 수 없음도 함께 인정됐다. 동료심사는 실험실의 실험노트를 재분석하는 것을 허용하지는 않는다. 그건 너무나 어려운 일일 테니까. 확실히, 동료심사는 다른 사람들의 실험실 방문이나 연구 보조원들의 상호검증, 또는 법정에선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질 어떤 절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또 동료심사는 준사법적 행위들에 관여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치러야 할 비용과 시간이 너무 많이 들고 너무도 서투를 수 있기에, 과학을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분명하게 문제의 실험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설사 실험실을 방문한다 하더라도 실험이 때때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 이상을 보지는 못할 것이다. 방문자가 현장에 있는 그 날이나 그 주에는 실험이 진행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동료심사자들은 검증해야 할 제출논문에 대해 요약되고 간추려진 설명밖에 들을 수 없고, 자신들이 진실을 판독하고 있는 것인지, 또는 누군가가 연구성과를 교묘하게 조작했는지 말할 수 없다. 또한 실험 재현을 통한 연구결과의 검증은 수십년이 걸릴 수도 있다. 실험을 하려면 자원이 필요하고 엄청난 기술이 필요하다. 자원들을 갖출 수 있다 하더라도 연구결과를 확인하는 데 실패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그 실험자들이 올바른 기술이나 적절한 행운을 지니지 못했을 거라는 추정을 한다. 과학자들은 그들 중 일부만이 ‘황금 손’을 지녀 실험을 성사시킬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유명한 이론물리학자 볼프강 파울리 같은 일부 과학자들이 단지 실험실에 나타나는 것만으로 모든 실험 진행을 중단시킬 수 있다는 점을 기꺼이 인정한다. 그것은 왜 빛 속도의 불변성 같은 ‘단순한’ 발견들이 과학자 집단에 수용되기까지 거의 반세기 가까이 걸렸는지를 말해준다. 과학자들이 서로 다른 이들의 실험에서 결함을 발견하고 그 주장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여지는 끝없이 존재했다. 비록 황 교수의 속임수가 곧바로 드러났지만 그것은 동료심사 덕분도 아니었고 실험의 재현 시도 덕분도 아니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게 아니다. 그가 발각된 이유는 그 자신의 실험실에 있던 누군가가 그 사실을 대중에 알렸기 때문이었다. 황우석 사태는 사회학자들이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바를 보여준다. 즉, 과학적 성공의 결정적 요소는 ‘신뢰’라는 것이다. 신뢰가 없다면, 모든 실험자들은 자신이 들어온 모든 것들이 진실임을 확신하려면, 과학 역사 전체를 처음부터 다시 되풀이해야만 할 것이다. 신뢰가 없다면 과학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멘델과 밀리칸으로 되돌아가 생각할 때에, 황 교수는 아마도 자신의 일이 발각되기 전에 그나 (연구팀의) 다른 이가 복제를 완수하리라는 확신을 지녔을지도 모른다. 내부 제보자가 없었다면 황 교수 자신이 그 결과를 성취했든 못했든 아마도 그는 여전히 개척자로 여겨졌을 것이다. 과학자는 ‘스타’ 꼬리표 떼야 아직도 남은 수수께끼는 왜 황 교수처럼 이미 유명한 과학자가 그런 엄청난 방식으로 도덕적 규율을 깨뜨리고자 했는가다. 과학을 온전하게 유지하는 신뢰 구조에 그는 왜 노골적으로 모험을 걸었을까. 참된 발견을 이루는 짜릿함이 있기에 과학은 가치있는 직업이 된다. 데이터를 단지 날조해내기만 해서는 그런 짜릿함을 결코 맛볼 수 없다.
그것이 바로, 비록 소규모의 진실 왜곡이 널리 퍼져 있고 때때로 그것이 사태 진전에 보탬이 된다면 용납되기도 하지만, 대규모 사기극은 여전히 과학계에서 드문 일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오늘날 생명과학에서 선도적 과학자들은 팝 스타들처럼 대접받는다. 스타가 되는 것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일보다 중독성이 더 큰 모양이다. 우리는 과학자를 훌륭한 직업을 지닌 전문가로 여기고 그들한테서 유명인사 목록은 떼어내는 예전으로 돌아가야 할지 모르겠다. 우리는 어떤 방식의 사회구성이 신뢰를 제대로 평가하고, 다른 모든 고려사항들에 앞서 일을 잘 한다는 내적 만족에 이르게 할지에 대해 숙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과학에서 진정으로 바라는 바는 복제된 세포들보다도 훌륭한 삶의 본보기일 것이다.
번역 오철우 기자
교과서에서도 마찬가지다. 과학자 집단을 상대로 규명하고 입증하기까지 50년이나 걸린 성가신 연구결과가 마치 천재 한 명에 의해 한두 달이면 끝나는 것처럼 묘사된다. 나의 공저 <골렘>에서, 우리 공저자들은 이런 점을 다 설명했지만 과학에 대해 널리 퍼진 이미지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뛰어난 개인들은 결정적 요소로 여겨지며, 더 큰 집단 안에서 합의를 구축하려는 오랜 각고의 노력은 결정적 요소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래서 속임은 별 생각없이 시작될 수 있다. 교실에서 그리고 교과서에서 속임은 단지 무엇을 단순화하는 것 이상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큰 팀들로 이루어진 생명과학계에서, 부하 연구원들이 당신이 듣고 싶어하는 바를 당신한테 말할 때 단지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 그 연구원들이 내놓은 결과물들을 따져보지 않는 것이 바로 속임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 가장 유명한 실험들 가운데 하나인 밀리칸의 전자 연구(1923년 노벨상 수상)는 결과에 대한 ‘자유분방한 해석’과 관련된 것이다. 밀리칸의 실험노트를 보면, 그의 발견과는 배치되는 데이터도 일부 나타난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무시했다. 밀리칸의 경우, 그가 했던 일은 지금에 와서 뛰어난 과학적 선견지명으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과학자 집단은 결국에 그가 옳았음을 입증했기에 말이다. 완두콩의 형질 유전에 관한 멘델의 선구적 연구도 이와 비슷하다. 멘델은 그가 성취했노라고 말한 연구결과(그것은 너무도 그럴듯해서 진실이라고 믿기 어려울 지경이었다)를 아마도 성취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 제시된 바 있다. 멘델과 밀리칸의 데이터에 나타난 모순은 그들이 숨지고 오래 지난 뒤에 역사학자들이 그들의 실험노트를 다시 살피기 시작할 때까지 드러나지 않았다. 황우석 교수의 속임수는 곧바로 드러났다. 이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황우석 사태가 과학의 실패를 보여주기보다는 과학의 성공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황우석 사태는 현대 과학이 훌륭하게도 자기 규율하는 활동임을 보여준다고 이들은 말한다. 이제 좀더 자세히 그것이 진실인지 살펴보자. 멘델도 숨지고 오랜 뒤 검증 널리 알려진 미디어 과학자들, 정부 자문인들, 학술저널의 편집자들 같은 과학의 ‘대변인들’은 종종 두 가지의 주요 메커니즘이 과학적 결과를 보증한다고 말한다. ‘동료심사’와 ‘실험결과의 재현’이 그 두 가지다. 그러나 여기서(황우석 사태에서) 우리는 동료심사가 작동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가장 엄격한 동료심사 체제 가운데 하나를 갖춘 최고의 국제 과학저널 <사이언스>는 황 교수의 논문을 출판했고, 최근까지도 지속적으로 그를 옹호했다. 마침내 사기가 인정됐을 때, 동료심사 체제가 사기를 막아줄 방어수단이 될 수 없음도 함께 인정됐다. 동료심사는 실험실의 실험노트를 재분석하는 것을 허용하지는 않는다. 그건 너무나 어려운 일일 테니까. 확실히, 동료심사는 다른 사람들의 실험실 방문이나 연구 보조원들의 상호검증, 또는 법정에선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질 어떤 절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또 동료심사는 준사법적 행위들에 관여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치러야 할 비용과 시간이 너무 많이 들고 너무도 서투를 수 있기에, 과학을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분명하게 문제의 실험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설사 실험실을 방문한다 하더라도 실험이 때때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 이상을 보지는 못할 것이다. 방문자가 현장에 있는 그 날이나 그 주에는 실험이 진행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동료심사자들은 검증해야 할 제출논문에 대해 요약되고 간추려진 설명밖에 들을 수 없고, 자신들이 진실을 판독하고 있는 것인지, 또는 누군가가 연구성과를 교묘하게 조작했는지 말할 수 없다. 또한 실험 재현을 통한 연구결과의 검증은 수십년이 걸릴 수도 있다. 실험을 하려면 자원이 필요하고 엄청난 기술이 필요하다. 자원들을 갖출 수 있다 하더라도 연구결과를 확인하는 데 실패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그 실험자들이 올바른 기술이나 적절한 행운을 지니지 못했을 거라는 추정을 한다. 과학자들은 그들 중 일부만이 ‘황금 손’을 지녀 실험을 성사시킬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유명한 이론물리학자 볼프강 파울리 같은 일부 과학자들이 단지 실험실에 나타나는 것만으로 모든 실험 진행을 중단시킬 수 있다는 점을 기꺼이 인정한다. 그것은 왜 빛 속도의 불변성 같은 ‘단순한’ 발견들이 과학자 집단에 수용되기까지 거의 반세기 가까이 걸렸는지를 말해준다. 과학자들이 서로 다른 이들의 실험에서 결함을 발견하고 그 주장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여지는 끝없이 존재했다. 비록 황 교수의 속임수가 곧바로 드러났지만 그것은 동료심사 덕분도 아니었고 실험의 재현 시도 덕분도 아니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게 아니다. 그가 발각된 이유는 그 자신의 실험실에 있던 누군가가 그 사실을 대중에 알렸기 때문이었다. 황우석 사태는 사회학자들이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바를 보여준다. 즉, 과학적 성공의 결정적 요소는 ‘신뢰’라는 것이다. 신뢰가 없다면, 모든 실험자들은 자신이 들어온 모든 것들이 진실임을 확신하려면, 과학 역사 전체를 처음부터 다시 되풀이해야만 할 것이다. 신뢰가 없다면 과학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멘델과 밀리칸으로 되돌아가 생각할 때에, 황 교수는 아마도 자신의 일이 발각되기 전에 그나 (연구팀의) 다른 이가 복제를 완수하리라는 확신을 지녔을지도 모른다. 내부 제보자가 없었다면 황 교수 자신이 그 결과를 성취했든 못했든 아마도 그는 여전히 개척자로 여겨졌을 것이다. 과학자는 ‘스타’ 꼬리표 떼야 아직도 남은 수수께끼는 왜 황 교수처럼 이미 유명한 과학자가 그런 엄청난 방식으로 도덕적 규율을 깨뜨리고자 했는가다. 과학을 온전하게 유지하는 신뢰 구조에 그는 왜 노골적으로 모험을 걸었을까. 참된 발견을 이루는 짜릿함이 있기에 과학은 가치있는 직업이 된다. 데이터를 단지 날조해내기만 해서는 그런 짜릿함을 결코 맛볼 수 없다.
해리 콜린스/영국 카디프대학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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