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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문지에서 시집 내니 설레네요!”

등록 2021-06-18 04:59수정 2021-06-18 09:53

김용택 시집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
짧고 모호하며 여백 많은 시들 묶어
열세 번째 시집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를 낸 김용택 시인. “전주에 오래 살다가 고향 임실로 돌아온 2016년 이후의 작품들을 묶었는데, 시집을 내면서 보니 사회 전체의 어떤 변화 바람을 탄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한겨레>와 전화 인터뷰에서 말했다. 김용택 제공
열세 번째 시집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를 낸 김용택 시인. “전주에 오래 살다가 고향 임실로 돌아온 2016년 이후의 작품들을 묶었는데, 시집을 내면서 보니 사회 전체의 어떤 변화 바람을 탄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한겨레>와 전화 인터뷰에서 말했다. 김용택 제공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
김용택 지음/문학과지성사·9000원

김용택 시인의 신작 시집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는 여러모로 눈길을 끈다. 전작 <울고 들어온 너에게> 이후 5년여 만에 내놓는 시인의 열세 번째 시집인데, 그의 ‘친정’과도 같은 창비가 아니라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우선 새삼스럽다. 1982년 창비의 21인 합동 신작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섬진강’ 연작을 비롯한 시들을 발표하며 등단한 이래 김용택은 주로 창비와 문학동네, 마음산책 같은 출판사에서 시집과 에세이를 내 왔다. 문학적 경향에서 창비와 대비되는 문학과지성사에서 그가 책을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반적으로 시도 길어지고 시집의 두께도 갈수록 두꺼워지는 추세 속에, 본문만 치자면 70쪽에도 못 미치는 얇은 분량에다 수록된 시 대부분이 짧고 여백이 많다는 외형적 면모 역시 도드라져 보인다. 그런 형식적 특성과 함께, 모호하고 추상적으로까지 읽히는 문장들은 이 ‘리얼리스트’ 시인의 어법에 익숙해져 있는 독자들에게 사뭇 낯설고 까다롭게 다가갈 법하다.

“서쪽으로 걸어간다/ 오늘은 어제의 경계를 넘어보았다/ 내 몸이 갠다/ 내 뒤의 발소리를 벗어두었다/ 풀잎들은 별을 따 올/ 저녁 이슬을 달고/ 내 고요는 멀리서 깜박이는/ 별 가까이 갔다/ 오늘이 이렇게 난생처음인데/ 그대에게 줄/ 꽃도 안 들고”(‘꽃도 안 들고’ 전문)

“종일 나무였을 나무가/ 나무가 되어 강가에 섰다/ 스스로 도달한 운명처럼/ 때맞춰 강가에 도착한 어둠처럼/ 나무는, 나무라는 말을/ 처음 듣던 그날/ 그때처럼 하루의 결론을 믿는다”(‘하루의 강가에 이른 나무’ 전문)

강과 나무, 풀잎, 별, 이슬, 꽃 같은 소재는 기왕의 김용택 시들에서 익히 보았던 것이어서 새삼스럽지 않다. 그런데 그 소재들을 운용하는 시인의 언어는 어쩐지 생경하고, 더 나아가 난해하다는 느낌을 준다. 이 시집이 창비가 아니라 문지(문학과지성사)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그런 점에서는 자연스러워 보일 정도다.

미술을 전공하는 김용택 시인의 딸(김민해)이 아버지를 그린 유화 &lt;우리 아버지&gt;. 김용택 제공
미술을 전공하는 김용택 시인의 딸(김민해)이 아버지를 그린 유화 <우리 아버지>. 김용택 제공

“여러 가지로 고민이 많았어요. 그동안 타성에 젖은 듯한 시들을 계속 써 내다 보니까, 어느 순간 ‘이게 아니다’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렇게 계속 쓴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어요. 비단 저뿐만이 아니고 문단 전체가 어떤 고정된 문법에 갇혔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번 시집 원고를 보내고 나니, 어쩐지 내가 어딘가에서 쏙 빠져나온 것 같은 느낌, 어떤 정지(停止)에서 풀려났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16일 전화로 만난 시인은 “문학적으로도 87년 체제의 문법으로 너무 오랫동안 살아왔고 그래서 너무 침체되어 있고 정지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문지에서 시집을 내자니, 신춘문예에 새로 당선됐다면 말이 이상하지만, 문단에 새롭게 나간 것 같은 느낌이어서 설레고 기분이 아주 좋았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듣고 앞서 인용한 시들을 다시 보면, 두 시 모두에 ‘처음’이라는 말이 쓰였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말이 환기시키는 어떤 새로움 또는 신생의 이미지는 시집 전체에 만연하다. 시집 맨 앞에 배치된 작품은 흔히 시집 전체의 서시로 구실하기도 하는데, 이번 시집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어린 새들의 숲’은 그런 점에서 시사적이다.

“올해 태어나 자란/ 어린 새들이/ 앳된 울음으로/ 나뭇가지 사이를 날아다닌다// 신비로운 첫 서리,/ 당신이/ 처음입니다”(‘어린 새들의 숲’ 전문)

처음과 신생을 가리키는 구절들은 이밖에도 수다해서, “별들의 사이에서 태어나 강을 건너온 흰나비가/ 우리 집 마당 붉은 모란꽃이 되는 게, 시야”(‘너와 상관있는 말’), “어디서 본 듯/ 처음이네요”(‘이 詩(시)를 드려요’), “시집의 첫 페이지 첫 행을 읽을 때/ 내 영혼은 새 떠난 나뭇가지처럼 떨린다”(‘눈이 쌓인다 다음 문장으로 가자’) 같은 문장들이 그 일부를 이룬다.

시집 제목에서부터 두드러지기도 하지만, 두껍지 않은 시집의 갈피마다 날개를 팔랑이며 날아다니는 나비의 존재감은 확실하다. “나비는 얼마나 먼 데서 달려오다가 날개를 달고 날아올랐을까요”(‘나비가 날아오르는 시간’), “나비는 하루 종일 난다/ (…) / 어쩌자고, 나비는 사람들이 버린 바람 속으로 날아왔을까”(‘침묵의 유리 벽’), “날개를 펼 때 바람을 이용하지 않는 나비들은/ 날개를 다 버릴 소실점이 어디인지 알고 있답니다”(‘아슬아슬 가을’) 같은 대목들에서 나비는 시인 자신의 염원과 노력과 의지를 대행하는 존재처럼 보인다. “바람을 이용하지 않고 제 힘으로 난다는 점에서 나비는 어딘가에 기대지 않는 새로운 힘, 새로운 세상, 변화를 향한 열망을 상징한다”고 시인은 말했다. ‘첫’의 떨림을 노래한 시 ‘눈이 쌓인다 다음 문장으로 가자’의 마지막 문장 “눈이 쌓인다 다음 문장으로 가자”는 그 어떤 ‘첫’과 ‘처음’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낡고 경직될 수 있다는 것, 부단한 갱신과 거듭남만이 고착과 타락을 막을 수 있다는 시인의 선언으로 읽힌다.

김용택 시인. 김용택 제공
김용택 시인. 김용택 제공

“통상적이지 않은 시 제목들도 그렇고 모호하고 막연한 시의 내용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어쩐지 철학적인 느낌을 주는 시집이 된 것 같아요. 제가 원래 시집을 내면 다시 읽어 보는 일이 드문데, 이번 시집은 세 번을 다시 읽었어요. 그런데 읽고 나서도 큰 낭패감은 없고, 오랜만에 내가 시를 좀 알고 썼나 하는 기분이 들더군요. 물론 독자들이 저를 생각할 때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책을 읽으면 좀 갑작스럽다는 느낌을 줄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시인인 저는 오히려 탈피하기가 쉬운데, 기존의 김용택에 익숙해져 있는 이들에게는 낯설고 불편할 수도 있겠지요.”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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