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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수많은 노동자들의 고통이 만들어내는 당신의 온전한 하루

등록 2021-06-18 05:00수정 2021-06-18 21:52

‘우리 곁의 노동, 보지 못한 아픔’
발전소 노동자에서 네일 아티스트까지 다양한 일터의 위험 다뤄
위험의 외주화 금지 등 제도 변화, 고통 나누는 인식 변화 필요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고통에 이름을 붙이는 사람들: 일터에서의 사고와 질병, 그에 맞서온 이들의 이야기
노동환경건강연구소 기획·지음/포도밭·1만6000원

“저 노동자는 저 작업장에서 평생토록 일해도 좋겠는가?” “나는 저 작업장에서 평생토록 일해도 좋겠는가?” “내 아들 딸이 저 작업장에서 평생토록 일해도 좋겠는가?”

<고통에 이름을 붙이는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들이다. 우리는 이 질문들에 모두 “예”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아니, 대답을 하기 전 ‘저 작업장’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제대로 알고 있을까? 우리 사회가 유지되고 우리가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 꼭 필요한 노동들이 우리 눈앞에 있다. 하지만 그 노동과 함께 커지고 있는 아픔과 고통은 잘 보지 않는다.

책은 노동환경건강연구소가 기획하고 관계자들이 공동집필했다. 원진레이온 직업병 사건을 계기로 1999년에 만들어진 연구소는 20여년간 노동자들의 환경과 건강 실태를 조사하고, 노동자들의 고통에 ‘이름’-예를 들어 ‘근골격계 질환’이나 ‘감정노동’같은-을 붙여 세상에 알리고, 대책을 마련하는 일을 해왔다. 책에는 30여가지 직업에 대해 각각 어떤 사고와 질병의 위험을 안고 있는지, 이를 해소하기 위해 어떤 노력이 행해졌는지, 그럼에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문제는 무엇인지 등이 담겨 있다.

2018년 12월10일 태안화력발전소 하청 노동자였던 24살 김용균씨가 석탄이송용 벨트컨베이어를 점검하던 중 사망했다. 많은 사람들이 가슴 아픈 죽음을 애도했고 후속대책이 논의됐다. 하지만 발전소는 여전히 위험한 작업장이다. 발전 설비는 2년마다 가동을 중지하고 정비작업을 벌인다. 이를 맡는 이들은 상당 부분 일용직 플랜트 노동자다. 이윤근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소장은 발암물질 농도를 측정하기 위해 보일러 내부로 들어갔던 경험을 전한다.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구멍 외에 사방이 막힌 밀폐 공간이었다.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발암물질이 흩날리는 그곳에서 노동자들은 마스크 하나에 의지한 채 말 한마디 없이 묵묵히 일하고 있었다. (…) 나는 그 지옥 같은 곳에서 30분을 견디지 못하고 탈출하듯이 빠져나왔다. 아니 ‘도망쳤다’는 말이 정확한 표현이다.” 1년 내내 전국의 발전소를 돌아다니면서 일하는 이들은 발암물질에 상시적으로 노출돼 있지만 일용직이라는 이유로 어떤 관심도 받지 못하고 방치돼 있다.

‘아줌마’만 일하는 직업이 있다. 학교급식조리사, 요양보호사, 마트 판매 노동자, 가스 계량기 검침이나 누출 검지 업무자…. 거의 여성 중장년층이다. 임금은 대체로 최저임금 수준이다. 호봉제나 승진 제도는 없다. 고용상태는 불안정하다. 경력단절 여성 등 일하려는 수요가 많은 것을 악용해 질 낮은 일자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노동 강도 역시 약하지 않다. 학교 급식실은 전쟁터다. 치즈 껍질을 천 개 벗기면 손목이 시큰거려 밤에 잠을 못 잔다. 집에 돌아가 샤워를 하고 난 뒤 거울을 보면 멍투성이다. 가끔 일하다가 기절하기도 한다.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25㎏이 넘는 밥통을 수시로 옮긴다. 식당 바닥을 청소할 때는 몸에 안 좋은 강한 세척제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인력 부족 때문에 아파도 병가를 쓰기 어려워 방학 때까지 치료를 미룬다. 방학 때는 월급이 나오지 않는다.

골프장, 호텔, 카지노.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고 쾌적한 장소들이다. 이 화려함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자들은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골프장의 파란 잔디에는 농업에서 사용되는 농약의 두 배 가까운 양이 살포된다. 잔디관리사나 경기보조원(캐디)은 아무런 보호 장구 없이 농약을 뿌리거나, 농약이 뿌려진 잔디 위를 걸어다닌다. 호텔 청소노동자가 투숙객의 잘못을 뒤집어쓰고 도둑으로 몰리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다. 한 노동자는 “고객이 청소를 부탁해 들어갔더니 투숙객이 나체로 서 있었다”고 말한다. 호텔 식당의 서빙 노동자들은 일반 접시보다 훨씬 무거운 접시를 몇 개씩 한쪽 팔에 얹고 손님에게 전달한다. 카지노는 구조적으로 돈을 따는 고객보다 잃는 고객이 더 많은 곳이다. 고객이 딜러에게 욕을 하는 일은 흔하다. 딜러의 행동이 거슬린다고 포크나 나이프를 던지는 고객까지 있다.

“아크릴이나 일반 폴리싱을 하다 보면 냄새가 심해서 머리가 너무 아파요.” “밀폐된 공간에서 계속 일을 하잖아요. 집에 가서 샤워하면 한 시간 동안 기침 나고 콧물이 나요.” “큐티클 리무버 자체가 손에 닿으면 각질층이 일어나요. 그러니까 당연히 왼쪽 손은 항상 짓물러 있고 각질 진물 난 것처럼 너덜너덜 그래요.” 네일 아티스트의 경험들이다. 네일숍은 수요층 확대로 증가세를 보이고 있는 업종이다. 문제는 네일 아티스트들이 하루 종일 화학물질로 이루어진 네일 제품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유해한 물질이 적은 제품을 쓰고 환기시설을 설치하고 개인 보호구를 착용하는 등의 조처가 필요하지만 이를 지키는 매장은 거의 없다.

이외에도 책은 다양한 일터의 노동현실을 드러낸다. 대형마트 노동자, 조선소 노동자, 실험실 연구원, 간호사, 프랜차이즈 빵집 노동자, 콜센터 노동자, 요양보호사, 영화산업 노동자, 소방관, 화학물질 운송노동자, 환경미화원, 배달노동자, 방문기사, 경비원, 택배노동자.

지은이들이 요구하는 제도적 변화는 네 가지다. 원청이 하청노동자에게 노동의 위험을 떠넘기는 위험의 외주화 금지, 올해 1월 국회를 통과했지만 ‘누더기법’이 됐다고 비판 받는 중대재해처벌법의 개정, 안전보건 문제에 관한 의사결정에의 노동자 참여권, 노동자가 위험을 감지했을 때 작업 중지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

필요한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나의 하루를 가능하게 해주는 이 수많은 노동자들이 겪을 고통을 눈치채야 하는 것은 바로 나다. 작업복으로만 노동자를 보면 고통을 나눌 수 없다. 노동자를 나와 내 부모, 내 아이와 같은 사람으로 볼 때, 그 사람의 이마에 맺힌 땀이 보이고 찡그린 미소가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안선희 기자 s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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