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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지역출판 ‘지역’을 밑천으로

등록 2006-06-15 22:31수정 2006-06-16 15:06

지역출판 ‘서울 인쇄’로 소재지 한계 벗고 ‘지역성’ 틈새 콘첸츠로 짱짱한 책 출간
유행 휘둘리지 않고도 대중성은 기본 지역이라고 베스트셀러 내지 말란 법 있나요?
커버스토리

지역출판은 없다.

문화관광부 자료(2005년 12월)를 보면 전국 24,580개 출판사 가운데 71%인 17,369개가 서울에 모여 있다. 여기에 사실상 서울권인 경기 2,588개를 합치면 81%에 이른다. 부산(800), 대구(721), 광주(466), 대전(573), 인천(369), 울산(72) 등 7개 광역시를 합쳐도 3,000개에 지나지 않는 점을 감안하면 희한한 일이다. 여기서 지역출판이란 지역에 거점을 둔 출판행위로서, 지역에 강조점이 놓인다.

초점을 출판으로 옮기면 사정은 더 열악하다. 상업적 판매를 염두에 둔 ‘기획출판’이 거의 없다는 것. 보통 지역출판물의 유형은 네 가지. 도나 시·군 차원의 문학지가 30%, 개인의 산문·수필집이 30%, 기관·기업 인쇄물과 분야별 전문서적이 30%, 시집이 10% 정도. 이 가운데 기획출판은 5% 안팎으로 추정한다. 경남의 중견 출판사인 도서출판 ‘경남’과 ‘불휘’의 경우, 2005년에 만든 100여권 가운데 기획출판은 5권을 넘지 않았다. 나머지는 물론 자비출판이다. 부산도 사정은 엇비슷하다. 2001년 기준으로, ‘빛남’ 출판사(1988년 설립)는 통산 400종 가운데 기획출판은 10건이다. ‘전망’(1992년)은 120종 가운데 15종이 기획출판이다. 그나마 ‘해성’(89년)은 250종 가운데 기획출판 100건으로 형편이 비교적 좋은 편이다.

경남의 한 의사는 2003년 <동양란 기르기>를 자비출판 했으나 2년 동안 100권도 팔리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필자는 그 책이 괜찮은 주제에다 편집도 좋아 꽤 팔리리라고 예상했었다.

이토록 지역출판이 영성한 이유로, △자본이 영세한 점 △편집, 디자인, 제작, 경리, 영업 등 출판조직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점을 꼽는다. 부산의 한 출판사 대표는 “지역출판은 사실상 없다”면서 “있다고 해도 인쇄소 수준”이라고 토로했다.

맞다. 지역출판은 인쇄에서 출발한 측면이 강하다. 부산의 경우 대표적 출판사인 ‘지평’과 ‘세종출판사’는 전산설비와 인쇄기를 보유하고 있다. 제작설비를 갖춘 만큼 경쟁력을 확보한 셈이다. 하여, 관급 지역출판물과 자비출판물 대부분이 두 곳에 쏠린다. 굳이 기획출판이란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없다. 또 인쇄와 제본을 거쳐 책이 완성된 뒤엔 배포범위가 지역에 그칠 소지를 안고 있다. 전문 영업인력과 유통망(또는 유통대행업체)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지역출판에 대한 비관은 여기까지!


지역출판에 새 바람이 분다. 무슨 뜬금없는 이야기인가? ‘지역인쇄’란 족쇄를 벗어버린 출판사가 하나둘 등장하고 있는 것. 이들은 족쇄를 벗어버렸다기보다 인쇄시설을 감당할 만큼 자본을 확보하지 못하였거나, 처음부터 제작공정을 염두에 두지 않고 출발했다는 게 특징. 인쇄를 제외하면 이들 출판사는 지역출판의 기준을 더 엄격히 잡아도, 예컨대 지역에 거점을 두고, 지역성이 반영된 출판물을, 상업적으로 출판하는 행위라고 해도 합격점을 줄 만하다. 인쇄시설이 없는 약점을 되레 강점으로 승화시킨 예에 속한다. 지역에서는 콘텐츠의 기획·생산에 전념하고 나머지 공정(제작과 배포)은 서울에서 완결된다. 그 사이는 택배(필름) 또는 인터넷(데이터)이 존재한다.

부산에 관한 것 지역민에 인기

부산 산지니=2005년 2월 설립된 이 출판사는 대표 강수걸(39)씨 외 3명이 모두 부산 현지사람들이다. 그해 10월에 첫 책 <영화처럼 재미있는 부산>을 낸 이래 <반송사람들>, <의술은 국경을 넘어>, <진보와 대화하기>, <우리 옆의 약자>, <제갈선생 7일7강>, <부채의 운치> 등을 펴냈다. 독자들의 반응은 좋은 편. 대부분 초판을 소진하고 재판을 준비중이다. 7권은 모두 지역과 관련돼 있는 게 특징. <영화처럼…>, <반송사람들>, <진보와 대화하기>, <우리옆의 약자>는 콘텐츠(비정규직)가 부산에 관한 것이고 저자 역시 부산사람이다.

<부채의 운치>는 앞으로 낼 <차의 향기> <요리의 향연>과 함께 중국 정부의 번역지원을 받았다. <진보와 대화하기>가 문화관광부 우수 학술도서로 선정되어 무척 고무돼 있다. 중국영화 20년을 조망한 <무주풍경>은 영화진흥위원회 출판지원사업 번역지원을 받았다.

강수걸 대표는 “수도권만 바라봐서는 살 수 없다”면서 “많이 팔리지 않지만 틈새주제 - 부산지역과 관련한 불교, 차, 김치연구, 해양 등을 주제로 한 책을 내면 지역주민이 사줄 것이고 전국유통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국 외교정책을 비판하는 <아메리칸히로시마>, 이라크 팔루자 리포트인 <노 트루 글로리>, 쿠바의 어제와 오늘을 다룬 <전쟁과 인종차별, 경제적 불평등> 외에 인도불교를 주제로 한 책 3권을 준비하고 있다.

강 대표는 ‘야생에서 일년이상 버틴 매’라는 뜻의 산지니로 출판사 이름으로 삼았다면서 오랫동안 버틸 것이라는 의욕을 보였다.

기획·편집 광주, 제작·영업 서울

광주 한얼미디어=2004년 2월 광주에서 <김남주 평전>으로 시작한 출판사다. 그해 6월 서울 한스미디어와 합쳤다. 현재 광주 사무실과 인원(2명)을 유지하고 기왕에 내온 인문사회 분야 책을 계속 펴내고 있다. 정명철(39) 팀장(옛 한얼미디어 대표)은 “유통, 홍보, 마케팅의 한계를 느껴 친분이 있는 한스미디어와 합치게 되었다”면서 “최종 결재라인이 서울에 있지만 팀의 편집기획이 존중된다는 점에서 ‘기획·편집 광주, 제작·영업 서울’의 모양새를 띤다”고 전했다. “광주에서는 시장수요를 정확히 예측하기 어려웠는데, 서울 영업팀의 시장조사가 아이템을 판단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형식이야 어쨌든 새로운 방식의 지역출판이다.

<마한신화> <씻김굿> <강강술래> 등 ‘아름다운 남도 시리즈’가 대표 출판물. 전남 담양에서 농사를 지으며 토우와 그릇을 빚는 송일근·정스텔라 부부 이야기를 담은 <허허공방 이야기>’도 냈다. 해양을 중심으로 한국사를 정리한 <바다에 새겨진 한국사>는 3쇄를 찍었다. 최근작은 <새만금은 갯벌이다>. 정 팀장은 “남도시리즈가 토대이기는 하지만 가장 손해본 것이기도 하다”면서 “지역문화단체, 지자체 등의 수요를 파악한 뒤 출판하는 식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화순의 고인돌 기획물은 군청에 고인돌 축제와 관련한 예산이 잡혔는지의 여부를 확인하고 시작하겠다는 것. 정 팀장은 “그동안 지자체 발주의 책들은 대학 논문처럼 발간되었다”면서 “이제는 학술과 대중성을 접목한 책에 대한 요구가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보성군과 녹차에 관한 책을 논의하고 있다.

“지역이라고 베스트셀러 내지 말란 법 있나요. 독자들이 읽게 만들 수만 있다면 가능합니다. 인터넷 시대에 출판사가 어디에 있느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요.”

‘반농반출’…삶과 출판 일치

원주 도솔오두막=2005년 초 설립해 현재 원주 연세대 창업센터 안에 둥지를 튼 1인 출판기획사. 대표는 나무선(45)씨. 10여년 동안 그가 주간으로 있던 서울의 ‘도솔’과 네트워킹 방식으로 연결해 그가 기획·편집을 맡고 제작은 도솔에서 관리한다. “5년 전만 해도 꿈꿀 수 없는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인터넷으로 데이터가 오가 굳이 서울에 올라갈 일이 없어요.” 몇해 전부터 원주에 터를 잡아 귀농을 준비해온 그는 ‘생활은 시골, 문화는 서울’ 방식은 자연스럽지 않다면서 지역의 삶과 출판행위가 일치하는 것을 지향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낸 책들은 7권. 잡초들의 생존방식을 다룬 <풀들의 전략>, 시이오를 그만두고 시골삶을 사는 이의 이야기인 <새들아, 집 지어 줄게 놀러오렴> 등 지역과 관련돼 있으면서 동시에 보편성을 띤 주제다. 곧 나올 <일주일만에 흙집짓기>는 원주 흙집학교 고제순 원장이 썼다.

“유행을 따르지 않고 자기 식으로 책을 만들 수 있어요. 하지만 소신과 경험이 없으면 자칫 고립될 염려는 있더군요.”

자급을 목표로 농사를 짓는 그는 “육체노동을 하면서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낀다”면서 반농반출(半農半出)이 목표라고 말했다. “일과 생활이 밀착돼 문화로 형성되자면 지역공동체가 회복돼야 합니다.” 그는 이를 위해 지역사람들과의 관계를 출판 콘텐츠로 연결하는 방안을 찾고 있다. 지역 무크지가 한 예. 협동조합 발상지인 원주의 특성을 살려 지역담론을 형성해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예상한다. “지자체도 못할 일을 작은 회사가 하려면 어려움이 따를 테지만 길게 보고 천천히 해 나갈 각오입니다.”

책의 원천은 생태공동체

홍성 그물코=2004년 서울에서 홍성으로 내려간 ‘그물코’도 사정은 비슷하다. 인근의 풀무농업기술학교와 귀농자를 중심으로 형성된 공동체가 기반이다. 사무실을 무상으로 빌려 생산비를 대폭 낮추고 천천히 조금씩 ‘잘 나가지도 안 나가지도 않는’ 책을 만들고 있다. 장은성 대표는 “논밭을 바라볼 수 있고, 어둡고 조용한 분위기가 책을 만드는데 영감을 준다”고 말했다.

지역출판은 있다. 그것도 훌륭한.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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