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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어느 월드컵 폐인의 5760분 관전기

등록 2006-07-20 21:53수정 2006-07-21 16:27

졸음과 고비가 왜 없으랴 혈자리 누르고 요가하고 거리응원은 체력안배상 사절
도전! 월드컵 전경기 시청 체력상 평생 5번? 이유는 그뿐 준비물은 리모콘과 캔맥주 묶음
몸 버리고 시간 버리고 다봤다 TV마저 나자빠졌다 매력덩이 축구야, 네가 이겼다
커버스토리

처음부터 결심했던 건 아니다. 개막전을 시청하다가 갑자기 속으로 외쳤다. ‘그래! 64개 전 경기를 모두 시청하리라.’ 이 무모한 결심의 까닭은 간단하다. ‘월드컵이니까.’ 4년마다 한 번 열리는 월드컵이니 내가 80살을 산다해도 남은 건 불과(!) 10번. 체력을 감안할 때 전 경기를 시청할 수 있는 월드컵은 많아야 5번 정도? 그러나 처음에는 반드시 챙겨야 할 경기들만 꼽아 놓았었다.

우선 우리 대표팀이 속한 G조 경기와 16강 전 이후 경기들을 놓칠 수 없고 E조(이탈리아, 가나, 미국, 체코), F조(브라질, 일본, 호주, 크로아티아의) C조(아르헨티나, 코트디부아르, 세르비아, 네덜란드) 경기 등도 챙겨야 한다. 여기에 잉글랜드, 스페인, 독일 팀 경기를 어찌 놓치랴. 이렇게 봐도 ‘차라리’ 전 경기를 모두 시청하겠다는 결정은 옳았다.

그래도 무리가 아닌가 싶어 계산기를 두드려보니 64경기라면 연장전과 하프타임을 제외하고 5760분, 시간으로 96시간, ‘불과’ 나흘이다. 같은 시간에 열리는 경기들도 있으니 이 정도면 볼만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 생각은 순진하다. 산술적으로는 나흘만 꼬박 투자하는 셈이지만, 실제로는 한 달여에 걸쳐 저녁부터 새벽 사이에 시청해야 한다.

개막전은 독일인이 운영하는 독일식 레스토랑에서 어느 후배와 함께 시청했다. 독일 팀이 한 골 넣을 때마다 생맥주 한 잔씩 무료 제공한 사장의 ‘당연한’ 친절 때문에 독일팀을 응원했다. 개막전에서 맺은 맥주와의 각별한 인연은 이후 경기가 있는 날마다 아파트 단지 앞 가게에서 6개들이 캔맥주 묶음을 사는 것으로 계속됐다. 조별 리그전 하룻밤 세 경기에 전후반 각각 하나씩 마시기 딱 좋다. 가게에 들어서는 순간 주인 아저씨가 카스 맥주 묶음을 내놓는다. “오늘은 아닌데요.” 아저씨는 “매일 사시더니 왜?” 내가 답하기를 “오늘은 하이트!” 다음 날 아저씨가 말한다. “오늘은 혹시 오비(OB)?"

고비가 없을 리 없다. 이를테면 축구를 함께 시청하기에 적당치 않은 술자리도 있었지만, 어김없이 축구중계방송을 틀어 놓아 준 요식업계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가장 큰 고비는 새벽 경기 시간에 쏟아지는 잠이었지만, 꽉 누르면 숨막힐 정도로 아파 오면서 정신이 번쩍 드는 혈 자리를 계속 누르거나 간단한 요가 자세를 취해 겨우 잠을 쫓았다. 두 경기가 같은 시간에 열릴 때면, 노트북으로 실시간 경기 상황 보도를 챙기면서 TV 리모컨도 부지런히 눌러댔다. (다음 번 월드컵 때는 일종의 서브 TV를 한 대 더 마련해야지.)

전 경기 시청에 도전하는 사람에게 최대의 적은 다름 아닌 방송 3사들이었다. 이를테면 조별 리그 마지막 경기였던 독일과 에콰도르, 폴란드와 코스타리카 전 가운데 방송 3사가 모두 독일과 에콰도르 전을 생중계하고 폴란드와 코스타리카 전은 녹화 중계를 해버렸으니, ‘방송사 간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탈락이 확정됐거나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한 팀들의 경기를 중계하는 게 광고 때문에라도 곤란했다’는 방송사 측의 핑계는 축구에 대한 심각한 모독이다. 축구 경기가 광고방송 중간에 끼워 넣는 막간극이라도 된단 말인가?

거리 응원을 하거나 여러 사람과 함께 시청해야 제 맛이라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숙명적으로(?) 혼자 시청해야 한다. 연신 큰 소리로 비속어와 욕설을 내지르며 아나운서보다 더 많은 말을 중얼거리는 습관 탓이며, 일어섰다 누웠다 앉았다 자세를 맘대로 바꾸며 시청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전 경기 시청에 나선 마당에 거리 응원에서 체력을 소진할 수는 없었다. 체력 안배는 축구 경기를 뛰는 선수들에게만 중요한 게 아니다. 거리 응원이 폭발적인 에너지를 순간에 쏟아내는 단거리 경주라면 전 경기 시청은 마라톤이다.

그런 나도 우리 대표팀과 토고 팀의 경기를 보고 있자니 고조된 흥분을 주체하기 힘들어 전반전 끝난 뒤 동네 호프집 몇 곳을 가봤지만 만원사례였다. 아쉬운 발길을 돌리다가 배달 전문 치킨집에 겨우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1분이 멀다하고 울리는 전화통에 배달 아르바이트생 두 명은 엉덩이 붙일 사이가 없다. 생맥주 한 잔을 시켜 마시다가 동점골이 들어갔을 때 “아저씨, 여기 한 잔 더!” 아저씨 왈, “에라 나도 한 잔 먹자!”

생활이 이렇다 보니 그게 제대로 된 생활일 리 없다. 마감 기한에 쫓기는 글을 쓸 때면 노트북 화면과 TV 화면을 정확히 같은 각도에서 볼 수 있게 해놓고, 인간의 몸이 눈이나 머리가 여러 개 달린 상태로 진화하지 않은 걸 원망했다. 오전과 오후 모두 약속이 있는 날이면 30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고 지낼 때도 있었다. 어제 본 경기와 그저께 본 경기가 혼동되면서 ‘그게 언제 본 경기더라?’ 자문하는 일도 잦았다. 제법 중요한 약속도 월드컵 핑계를 대며 미루곤 했다. 건강, 정신 상태, 호구지책, 사회 생활 등에 모두 지장을 초래하는 셈.

한 달 여에 걸친 축제가 끝난 뒤, 산 지 10년 된 우리 집 TV의 체력은 바닥났다. 전원을 켜면 한참 동안 어두컴컴하다가 천천히 화면 상태가 정상이 된다. 그 TV를 껴안고 살았던 사람의 체력도 마찬가지여서 맥주와 안주 덕분에 3킬로그램 가까이 늘어난 체중도 체중이지만 시차 적응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고, 조금만 오래 걸어도 쉽게 피곤해지는 증상에 골치까지 아팠다. 술자리를 줄이고 식사를 규칙적으로 하고 밤에는 가능한 일찍 잠자리에 들고 산책도 자주 하는 걸로 겨우 다스릴 수 있었다.

장사라면 이렇게 손해 보는 장사도 없다. 몸 축나고 시간 축나는 장사를 한 달 넘게 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앞으로 내내 ‘그 해 여름은 행복하였노라’ 말할 수 있는 까닭은 축구 그 자체에 있다. 스페인과 아르헨티나 팀이 보여 준 개인기와 조직력의 놀라운 조화, ‘젊은 피’의 가능성이 가능성에 그치지 않는다는 걸 유감 없이 보여 준 독일 팀의 활력, 힘과 개인기가 결합되어 뿜어져 나오는 아름다움을 과시한 가나 팀, 입버릇처럼 ‘빗장 수비’ 운운하던 TV 중계 해설자들을 머쓱하게 만들 정도로 환골탈태한 이탈리아 팀 등등.

소문만 나고 먹을 것 없는 잔치로는 베컴의 창의성이 빛날 때가 있기는 했지만 선수들 면면이 막강해서 우승 후보로 거론되던 팀치고는 맥 빠지는 경기로 일관한 잉글랜드 팀, 세리에A 득점왕 출신 세브첸코로 기대를 모았지만 축구는 11명이 하는 경기라는 당연한 교훈을 재확인시켜 준 우크라이나 팀, 뭔가 보여줄 듯 하다가 변죽만 울림으로써, 축구의 철학과 미학을 선도해왔다는 걸 의심케 만든 브라질 팀 등이 있었다.

기대와 실망, 영광과 좌절이 갈마든 이번 월드컵을 끝으로 그라운드와 작별을 고한 일본 대표팀 나카타 히데토시의 은퇴의 변이 축구의 영원성, 축구의 불가해의 매력을 새삼 생각하게 만든다. ‘이젠 더 이상 프로선수로 그라운드에 설 일은 없겠지만 축구 자체를 그만둔다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길가에서, 잔디밭에서, 그리고 조그마한 운동장에서도 나는 누군가와 말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대신 축구공을 주고받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벅차 오르는 가슴으로 말이다.’

그렇다. 2006 독일 월드컵은 끝났지만, 축구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이 변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어린이들의 동네 축구나 어른들의 조기 축구 경기에서, K리그 경기가 벌어지는 운동장에서, 유럽 빅리그 경기가 방송되는 TV 앞에서 몸으로 마음으로 축구공을 주고받을 것이다. 지난 6월의 벅차 오르는 가슴으로 말이다. 시차에 따라 각자 살고 있는 곳의 시간대에 전 경기를 시청한 이름 모를 세계인들에게 동지적 연대감에서 우러나오는 축하의 말을 건네고 싶다. 2010년을 기약하며 지금부터 몸 만들자는 당부와 함께.

사족 하나. 2010년 남아공 월드컵까지 어떻게 기다릴지 막막한 사람이라면 유로(유럽선수권대회) 2008 예선전이 올 9월에 시작된다는 사실로 막막함을 달래기 바란다. 예선 B조에 지난 월드컵 우승팀 이탈리아와 준우승팀 프랑스가 속해 있으니, 두 팀은 ‘박치기’의 악연을 어떻게 풀어나갈까? 두 팀의 경기를 지켜 볼 지단의 심정은 어떨까?

표정훈/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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