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만듦새나 구실이 뛰어나 보이는 문구라면 바로 쓸 곳이 없어도 선뜻 산다. 새로 산 문구를 처음 쓸 때면 새로운 의욕으로 가슴 벅차오른다. 해외여행을 떠나면 현지에서 반드시 문구를 산다. 사놓고도 쓰기 아까워 마냥 놓아두기만 하는 문구가 있다. 값비싼 문구를 사고 한참이 지난 다음 ‘역시 잘 샀다’며 흐뭇해한다. 아는 사람이 쓰는 문구가 좋아 보여 어디에서 얼마주고 샀느냐 물으며 슬쩍 만져본다. 차마 그냥 달라고는 못하지만 마음은 굴뚝같다. 언젠가는 꼭 사리라 점찍어 놓은 문구가 있다. 값싸고 질 좋은 문구가 있으면 여러 개를 사서 친한 사람들에게 나눠줄 때도 있다. 길 다가가 대형 문구점이 눈에 띄면 그냥 못 지나친다. 이 가운데 네댓 가지 이상이 ‘바로 내 얘기’인 사람은 문구 마니아 후보라 하겠다.
문구 마니아들의 취향은 물론 제 각각이어서, 필자로 말할 것 같으면 폴더·파일·바인더 등 문서 정리 및 보관용 문구에 유달리 집착한다. 우연히 혹은 일부러 들른 문구점에서 반드시 문서 정리용 문구 코너를 점검한다. 새로운 게 눈에 들어오면 주저하지 않고 ‘지른다.’ 한 번도 쓰지 않은, 어쩌면 앞으로도 쓸 날이 올 것 같지 않은 다양한 문서 정리용 문구가 책상 주변에 쌓이는 건 당연한 일. 그렇다고 각종 문서를 꼼꼼하게 챙겨 폴더나 파일에 차곡차곡 정리하는 것도 아니다. 문구의 사용 가치보다 소장 가치를 중시하는 어리석음(?).
상표를 거론하자면, 세계적인 사무용품 기업 에셀트의 문서 정리 및 보관용 문구 브랜드인 펜다플렉스 제품이 집중 공략 대상이다. 색감·질감·모양새·기능성 등에서 두루 만족을 느낀다. 그런데 말을 타면 종을 부리고 싶다 했던가. 폴더와 파일이 늘어나면 그걸 보관하는 문구 혹은 사무용 가구를 장만하고 싶어진다. 아직까지 침만 삼키고 있지만 언젠가는 비슬리 철제 수납함에 폴더와 파일을 정리하리라. ‘고귀한 단순성과 고요한 위대성.’ 미술사가 빙켈만이 희랍 고전 미술을 가리켜 한 이 말이 비슬리 제품을 볼 때 떠오르는 건 왜일까?
이른바 ‘지름신’이 강림하는 또 하나의 문구는 몰스킨 수첩과 다이어리다. 마티스, 반 고흐, 피카소, 헤밍웨이, 앙드레 브레통, 브루스 채트윈 등이 몰스킨 애용자였으니 ‘전설적인 노트북’이라는 선전 문구가 과장이 아니다. 헤밍웨이는 파리의 카페에서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를 몰스킨에 집필했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에는 반 고흐가 스케치에 사용한 몰스킨 일곱 권이 전시돼 있다.
한정수량 몽블랑 수집가 애태워
흥미로운 건 세계 각국의 몰스킨 사용자들이 나름의 사용례를 몰스킨 웹사이트에 올린다는 점.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 신생아의 두 발에 잉크를 묻혀 몰스킨 수첩에 그 자취를 남기고 출생 시간을 기록한 사용자가 있는가 하면, 아마추어 수준을 뛰어넘는 파스텔화나 크로키 개인 작품집으로 활용하는 사람도 많다. 필자는 늘 두 권의 몰스킨을 갖고 다니면서 한 권은 일정 관리용으로 한 권은 아이디어 메모용으로 쓴다. 견고한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검정 표지에 튼튼한 실 제본이 믿음직스럽다. 당장 쓸 것도 아니면서 종류별로 갖추어 놓고 괜히 흐뭇해하는 꼴이란.
문서 정리용 문구와 수첩 다음으로는 필기구. 펜다플렉스와 몰스킨에 대한 집착에는 못 미치지만 로트링에서 내놓은 필기구를 좋아하는 편이다. 그 가운데 특히 로트링 스킨(Skynn) 볼펜과 만년필이 모양새와 필기감 그리고 쥐었을 때 느끼는 손맛이 압권이다. 1928년 독일 함부르크 출신의 빌헬름 리페가 펜촉관에 작은 강철심을 넣어 잉크가 일정하게 나오게 만든 만년필을 고안한 게 로트링의 출발이었으니, 필기구 혁신의 역사 그 자체인 셈.
그러나 만년필 하면 몽블랑을 떠올릴 사람이 더 많을 듯 하다. 몽블랑은 특히 작가 시리즈로 유명하다. 쥘 베른, 카프카, 도스토예프스키, 찰스 디킨스, 헤밍웨이, 오스카 와일드, 피츠제럴드 등 유명 작가를 테마로 한 만년필과 볼펜을 한정 수량으로 내놓기 때문에 수집가들이 애간장을 태우기도 한다. 이베이를 비롯한 온라인 거래 웹사이트를 부지런히 뒤지는 수집가들이 적지 않다. 그 가운데 2003년에 나와 현재 100만원 정도를 호가하는 쥘 베른을 보면 바다를 상징하는 푸른색과 물결무늬에 꼭대기 장식은 옛날 잠수부들의 헬멧을 표현했다니, 쥘 베른의 작품 <해저 2만리>에 나오는 네모 선장이 사용하면 어울리겠다.
비교적 가벼운 문구 호사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자면 런던의 대표적인 상점가들 가운데 하나인 본드 스트리트의 터줏대감 스마이슨이 있다. 작년 말 영국 보수당의 새 당수가 되어 차기 총리로도 유력시되는 귀족 가문 출신 데이비드 캐머런의 아내 사만사가 스마이슨의 운영 책임자다. 캐머런 당수는 헨리 7세의 후손이며 사만사 역시 귀족 가문 출신. 1887년에 창업한 스마이슨의 단골이 영국 왕실과 귀족들이라는 점을 떠올려 봄직 하다. 양가죽 표지의 작은 수첩 가격이 우리 돈 약 22만 원이니 지름신도 달아나겠다. 다행히 중저가(?)에 해당하는 제품들도 많지만 역시 멀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명품수첩 22만원…지름신도 꺅~
그러나 제품의 고유한 품질만큼 값을 받겠다는 이유 있는 고집은 이해해줄만 하다. 이를테면 스마이슨의 수첩과 노트 속 종이는 자체 제작한 ‘훼더웨이트 페이퍼’, 직역하면 ‘깃털 무게 종이’다. 1평방미터 넓이의 종이 무게가 50그램이라니 정말 가볍다. 무척이나 가볍고 얇은 종이지만 만년필로 눌러 적어도 뒷면에 글씨가 비치거나 종이가 찢어지지 않는다. 별도 주문하면 스마이슨의 문구에 이름을 금박으로 새겨넣어 주기도 한다.
이것저것 취향 따라 거론하다보니 마치 외국산 문구 제품 쇼호스트라도 된 기분이다. 필자의 취향을 부디 용서하시압. 물론 우리나라 제품들 가운데도 만듦새와 구실이 뛰어난 것들이 드물지 않다. 이를테면 필자도 밀리미터밀리그램(mmmg)에서 만든 노트 제품이나 ‘고급 비즈니스 문구의 대표 브랜드’를 자처하는 오롬시스템의 문구 제품을 애용한다. 문구에서도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외칠 수 있는 날이 멀지 않았다.
하찮은 물건에 대한 집착으로 큰 뜻을 잃는 것을 완물상지라 했다. 주나라 무왕은 여(旅)나라 사신이 와서 바친 큰 개 한 마리를 기쁘게 받고 사신에게 귀한 선물을 내렸다. 신하 소공이 간언하기를 ‘물건을 가지고 놀면 뜻을 잃는다’(玩物喪志) 했고, 이에 무왕은 큰 개를 비롯한 모든 헌상품을 제후와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고 정치에 전념했다는 이야기. <서경>(書經)에 나오는 고사다.
이 고사를 거울삼아 문구에 대한 집착을 삼가기라도 해야 할까? 쓰기 편하고 튼튼하고 저렴하면 그만이지 무얼 그리 유난 떠느냐 힐난한다면 딱히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유별난 문구 호사 취미를 마뜩찮아 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을 터. 그러나 뜻을 잃을 정도가 아니라면, 개인적 재정 상태에 주름이 갈 정도가 아니라면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 정도로 보아 줄 일이 아니겠는가. 문구 호사라고 해봐야 드는 비용은 대부분 만 원 안쪽이니 너무 힐난하지 마시기를.
소소한 즐거움서 ‘문구평론’ 탄생
그 소소한 즐거움에 전문성을 더하면 문구 평론 같은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진작부터 일종의 문구 평론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니 명나라 때 문헌 <고반여사>(考槃余事)를 예로 들 수 있겠다. 글씨, 그림, 종이, 붓, 먹, 차, 의복, 각종 기물, 문방구, 향, 그릇 등 잡다한 사물에 대한 품평과 감상 및 관리법 등을 안내하는 ‘인문 실용서’로, 을유문화사에서 권덕주 번역으로 나왔었지만 절판 상태다. 면모를 일신해 다시 출간될 날을 기다려 본다.
이 책에서 우리 종이를 평하기를, ‘고려 종이는 누에고치 솜으로 만들어져 종이 색깔은 비단같이 희고 질기기는 마치 비단과 같은데 글자를 쓰면 먹물을 잘 빨아들여 종이에 대한 애착심이 솟구친다. 이런 종이는 중국에는 없는 우수한 것이다.’ 재료와 재질, 외양과 질감에 따른 미학적 특징, 기능적 우수성, 동종 제품(중국산 종이)과의 비교 평가, 여기에 개인적 감상까지 덧붙였으니 이만하면 평론치고 상품(上品)이 아닌가. 영국 작가 토머스 드 퀸시는 <어느 아편 중독자의 고백>에서 아편이 '공기와 같이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성스러운 것'이라 했다. '어느 문구 중독자의 고백'이 있다면 문구 역시 마찬가지이리라.
표정훈/출판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