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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한강찬가–봉준호 감독과 함께한 부끄러운 여름밤의 기억

등록 2020-02-21 17:20수정 2020-02-23 19:18

[이재익의 아재음악 열전]
영화 <괴물> 속 ‘한강찬가’

봉준호 감독. &lt;한겨레&gt; 자료사진
봉준호 감독. <한겨레> 자료사진

지난주, 한달째 신종 코로나19 확산으로 온 나라가 움츠러들어 있던 와중에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 소식이었다. 봉준호 감독이 오스카 트로피로 할리우드의 성벽을 박살 내던 그 순간을 지켜보던 나는 20년 가까운 세월을 거슬러 어느 밤으로 돌아갔다.

필자는 20대 중반에 등단을 하고 소설이 영화로도 만들어질 정도로 운이 좋았던 작가였다. 대부분의 작가가 길고 긴 무명과 가난의 세월을 견뎌내야 얻을 수 있는 기회의 문이 나에게는 너무나도 일찍 열린 것이다. 그러나 나는 행운의 열쇠를 손에 넣고도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소설과 영화라는 분야에서 성공해봤자 얻을 수 있는 결실이 그리 커 보이지 않아서였다. 아무리 소설 쓰고 시나리오 써봤자 주제넘게 끌고 다니던 스포츠카도 유지 못 하겠다 싶었다. 어린 나이에 지독히도 세속적이었던 필자는 결국 안전한 길을 택했다. 방송국 피디로 입사해서 안정된 지위와 소득을 누리면서 짬짬이 글을 쓰기로.

그래서 그런지 방송국 입사 시험을 치르는 동안 들려온 시나리오 공모전 당선 소식에도 뜨뜻미지근했다. 지금은 없어진 ‘대흥멀티미디어’라는 회사가 주최한 공모전이었고 나는 <더 플레이>라는 작품으로 대상을 받았다. 2001년 어느 날 시상식을 하고 간단한 뒤풀이 자리가 있었는데, 내 기억이 맞는다면 여의도의 어느 호프집이었던 것 같다. 심사위원장과 나란히 술을 마셨는데, 망한 영화를 찍은 신인 감독이라고 했다. 옷에는 때와 얼룩이 어지러웠고, 그야말로 영화 <기생충>에서 묘사되는 ‘가난의 냄새’가 나는 듯했다.

“안녕하세요? 영화감독 봉준호라고 합니다. 이재익씨 축하해요.”

나는 건배를 하면서도 마음이 복잡했다.

‘하아… 이 사람이 내 시나리오를 심사했단 말이야? 바꿔 말하면, 나도 계속 영화 일을 하다간 이 꼴이 될 수도 있단 말이지? 휴우. 제발 방송사 공채에 붙어야 할 텐데! 영화를 생업으로 택하지 않길 정말 잘했군!’

데뷔작을 말아먹은 더벅머리 신인 감독하고 별로 대화를 나누고 싶은 생각도 없었던 터라, 나는 겨우 이런 질문을 하고 말았다.

“어디 바쁘게 다녀오셨나 봐요?”

봉준호 감독은 미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 땀 냄새가 많이 나죠? 차기작에 야외촬영이 많아서 촬영지 헌팅을 갔다 오는 길이라서요. 산을 막 헤맸더니, 하하.”

“아… 차기작… 무슨 내용인데요?”

“화성 연쇄살인 사건 얘기예요.”

‘아… 차기작도 망하겠구나. 21세기가 막 시작되었는데, 칙칙하게 화성 연쇄살인 사건? 범인도 잡히지 않은? 이분 어쩌려고 이러심? 이거 제작 못 한다는 쪽에 오늘 받은 상금을 걸 수도 있어.’

그날 밤 우리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는 정말로 영화에 인생을 건 사람처럼 보였고 나는 그를 보면서 영화에 인생을 걸지 않기로 한 결심을 술자리 내내 굳혔다. 그리고 봉준호라는 이름을 금방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며칠 지나지 않아 나는 방송사 공채 합격 소식을 들었고, 몇달 뒤부터는 신입사원 주제에 새빨간 스포츠카를 몰고 출근하는 ‘시건방진’ 피디가 되었다.

다신 마주칠 일 없을 줄 알았던 그의 이름을 보게 된 건 2003년 봄이었다. 아내와 극장에 갔다가 <살인의 추억> 포스터를 마주한 것이다. ‘감독 봉준호’라는 이름과 함께. “어? 나, 이 감독 아는데….” 혼잣말을 흐리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헐. 진짜 영화로 만들었네?’ 개봉하는 날을 기다렸다가 당일에 영화를 봤다. 영화가 끝나기도 전에 확신했다. 이건 지금까지 내가 본 우리나라 영화 중 최고 작품이다! 그저 압도됐고 또 부끄러웠다. 이런 위대한 영화를 찍기까지 그가 감내했던 가난과 무명을 비웃었던 나 자신이 한심했다. 열정도 재능도 제대로 시험해보지 않고, 고작 알량한 풍요를 누리겠다고 내게 건네진 영화계의 초대장을 찢어발긴 나 자신이 수치스러웠다. ‘잘했어. 넌 시험할 자격도 없었어.’ 그 후 몇년 동안 나는 소설도 영화 시나리오도 쓰지 못했다.

영화의 느낌을 쏙 빼닮은 &lt;괴물&gt;의 영화 음악 중에서 ‘한강찬가’를 추천한다. 영화사 제공
영화의 느낌을 쏙 빼닮은 <괴물>의 영화 음악 중에서 ‘한강찬가’를 추천한다. 영화사 제공

내가 꼽는 최고의 우리나라 영화 순위가 바뀌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2006년, 또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 그리고 이 순위는 아직도 바뀌지 않고 있다. 지금도 누군가 우리 영화 사상 최고의 영화가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난 주저 없이 <괴물>을 꼽는다. <살인의 추억>에서 내가 유일하게 아쉬웠던 부분인 음악조차 이 영화에서는 완성돼 있었다. 오늘 칼럼은 <괴물>의 영화 음악 중에서 ‘한강찬가’를 추천하면서 맺는다. 겨우 한강에 변종 하마 한마리 나오는 영화인데도 이유 없이 설레게 만드는 영화의 느낌을 꼭 빼닮은 곡이다.

반응이 좋다면 다음 칼럼에서 봉준호 감독과 관련한 남은 이야기를 마저 풀어볼까 하는데, 독자님들은 어떠신지?

이재익 ㅣ 에스비에스 라디오 피디·<정치쇼>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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