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뢰 연출이 20일 오후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자신이 연출하고 있는 연극 `미저리'무대에서 한겨레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황인뢰 연출은 인터뷰 사진 촬영을 하다가도 무대소품들을 정리하거나 곳곳의 조명들을 살펴봤다. 그는 어느 한 곳 놓치지 않고 세세하게 바라보았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차분한 말투로 조곤조곤 얘기한다. 작품에 대한 호평에는 수줍게 웃는다. 1954년생. 우리나이로 65살. 흔히 떠올리는 투박한 ‘아저씨’가 아닌 세심한 ‘소녀 감성’ 같다. “소년도 아니고 소녀요?(빙그레)”
황인뢰 피디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작품과 빼닮았다. 1977년 23살에 <문화방송>(MBC) 피디로 입사해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고개 숙인 남자> 등 주로 남녀 간의 감정을 예리한 시선으로 드러내는 작품을 연출했다. 20대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 <궁>(2006년)을 만들 당시 그의 나이는 52살이었다. 그는 “장르와 관계없이 사람의 심리를 드러내는 작품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폭력적 장면은 최소화
“허술하단 관객 평 있지만
피 튀기고 잔인한 내용 싫어”
41년간 방송 현장 지켰지만
갈수록 자극적 얘기 위주 편성
”따뜻한 드라마 많이 찾았으면”
연출을 맡은 연극 <미저리>(4월15일까지) 역시 황인뢰 피디의 감정선을 좇는 섬세함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1991년 개봉한 영화로 더 유명한 스티븐 킹의 소설 <미저리>가 원작이다. 2015년 미국에서 연극으로 만든 것을 각색했다. 스릴러의 긴장감에 중점을 뒀던 미국 무대와 달리, 황인뢰의 손길을 거친 <미저리>는 여자 주인공의 심리가 좀더 깊게 표현된다. 애니가 보여주는 광기의 강도를 조절하고, 소설을 사랑하는 귀여운 모습도 살짝 드러낸다. “영화에서는 남녀의 관계 성격이 자세히 나오지 않았다고 생각해 좀더 담아보고 싶었어요.” 덕분에 한국판 연극 <미저리>는 폴 시점에서 바라보던 영화와 달리 애니 입장에 조금 감정이입하게 만들며 또다른 색깔을 냈다. 장르 불문, 세월이 흘러도 녹슬지 않는 심리 꿰뚫기의 비결은 뭘까. “초창기 사이코 드라마 <당신>을 연출하면서부터 심리학 공부를 해왔어요. 드라마는 결국 사람 이야기잖아요. 인간 심리를 알아야 연출도 잘할 수 있다고 믿어요.”
황인뢰 연출의 연극 <미저리>. 스토리피 제공
그가 섬세한 내면 표현으로 극을 끌어가는 작품을 고수해온 데는 피디로서의 사명감과도 맞닿아 있다. 그는 <미저리>를 연출하면서 폴이 타자기로 애니를 내려치는 장면을 허공에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게 처리했다. 이를 두고 허술하다는 관객 평가도 나오지만, 그는 “피 튀기고 잔인한 내용을 싫어한다”고 말했다. “요즘 드라마들이 갈수록 자극적으로 흐르잖아요. 미디어에서 끔찍한 장면들을 반복해 보여주면 내성이 생겨요. 예전보다 세상을 각박하고 살벌하게 만든 데 드라마의 책임도 있다고 봐요.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미디어의 순기능과 역기능을 생각 안 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작품들이 시청률이 잘 나오면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칼로 찌르는 장면을 대놓고 보여주고, 장기 밀매가 주요 소재로 나온다. 따뜻한 인간의 내면에 초점을 맞춘 그의 작품은 편성받기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2015년 <심야식당> 이후 티브이에서 만날 수 없는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그도 현실과 소신 사이에서 괴리감을 느낀다.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들을 편성 결정자들이 보면 맹숭맹숭할 수밖에 없죠. 하지만 시청률을 위해 변하고 싶지는 않아요. 지금도 방송국에 기획안을 던져 놓은 작품은 있어요. 사랑이 이뤄지지 못했을 때 멋진 남자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느냐를 보여주려는 내용인데, 어떻게 될지 모르죠.(빙그레)” 그는 “미투와 관계없는 내용이지만 (가해자들이) 손해를 최소화하려는 모습에 비겁함을 느낀다”며 그와 관련해서 생각해볼 지점이 있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41년간 현장을 지키며 수많은 변화와 격동의 시간을 겪어낸 선배로서 한국 드라마의 현실에 대한 그의 고민도 깊다. 그는 “방송사 경쟁으로 늘린 70분 편성을 예전처럼 60분으로 줄이기만 해도 억지스럽게 이야기를 끌고 가거나, 빠듯한 제작 환경에서 벌어지는 많은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라거나 “한류 열풍 이후 천편일률적인 드라마가 쏟아지는데 드라마의 다양성을 위해서라도 단막극을 만들어야 한다”는 등 소신을 폈다. 그는 <베스트셀러극장> <한뼘드라마> 등 수준 높은 단막극을 많이 만들었다.
무엇보다 그는 “사람들이 따뜻한 드라마를 많이 찾았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그런 그에게 연극은 자극으로 물든 현실에 지친 마음을 치유해주는 위로의 공간인 듯했다. 그는 1998년 뮤지컬 <하드록 카페>, 2000년 연극 <불 좀 꺼주세요>, 2003년 연극 <졸업> 등을 꾸준히 만들어왔다. “드라마는 초치기로 제작되잖아요. 연극은 아무리 짧아도 두달은 연습하거든요. 현장에서 함께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새로운 걸 만들어가는 과정에 집중하는 게 좋아요.” 순수의 시대를 꿈꾸는 그의 ‘소녀 감성’이 영원하기를.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