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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바람·파도…제주의 기운을 담았더니 스트레스가 없어졌어요”

등록 2020-02-23 15:57수정 2020-02-24 02:34

[개인전 ‘백 비트!’ 연 권혜성 작가]
태풍 속 중문색달해변 거센 파도
여미지식물원 울창한 병솔나무 등
전통 회화 구도·용법으로 풀어내
“제주 1년 기억 자연스럽게 표현”
전시의 대표작인 <아래로>(2019) 앞에서 작품을 설명하고 있는 권혜성 작가. 제주섬의 식물원에서 우연히 보게 된 병솔나무 가지의 생명력 넘치는 모습에서 강한 인상을 받고 그린 작품이라고 한다.
전시의 대표작인 <아래로>(2019) 앞에서 작품을 설명하고 있는 권혜성 작가. 제주섬의 식물원에서 우연히 보게 된 병솔나무 가지의 생명력 넘치는 모습에서 강한 인상을 받고 그린 작품이라고 한다.

내지르거나 곤두선 그림들이다. 휭휭 부는 바람과 철썩 몰아치는 파도의 기운이 바늘처럼 툭툭 끊어 친 선들과 깊은 먹빛 화면으로 몰아쳐 온다.

지난 7일부터 서울 서촌 창성동 전시공간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서 개인전 ‘백 비트!’(27일까지)를 열고 있는 권혜성(35) 작가의 신작은 바람과 바다 등 제주 자연의 기운을 그린 수묵화 같은 회화다. 양화를 전공한 작가가, 동아시아 전통 회화의 전형적인 구도와 용법을 자유분방한 필치로 풀어놓은 점이 호기심을 동하게 한다. 장지 바탕에 어지러이 난무하는 필선과 먹 바림이 펼쳐지면서 뼈대를 필선으로 묘사한 ‘골법용필’과 사물의 기운을 담는 ‘기운생동’ 같은 전통 화법 요소를 떠올리게 한다. 작가는 “박물관에서 전시를 본 것 말고는 동양적 화법을 익힌 적이 없다. 몸으로 겪은 제주도의 바람과 바다 기운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어 자연스럽게 표현하려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2018년 5월부터 1년간 제주 중문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그냥 살았어요. 6년 전 개인전 한 뒤로 그림에 몰입하기보다는 사는 경험 자체가 작업 같았어요. 좀 더 다른 ‘경험’을 하려고 섬에 갔는데 2018년 태풍이 왔을 때 중문 해안에서 목격한 바다 모습이 강렬한 인상을 안겨줬어요.”

2018년 8월, 작가는 서핑 명소인 중문 색달 해변에서 태풍으로 일어난 거대 파도가 수평선까지 가득 메운 풍경을 지켜봤다. “집채만한 파도들이 마구 포말을 내며 밀려가는 모습이었죠. 바닥부터 뒤집힌 바다는 온통 회색빛이었어요. 그냥 통쾌하고 시원했어요. 전에 접하지 못했던 강력한 에너지를 느꼈으니까요. 기운이 너무 세서 동영상 찍어 보고 또 봤죠. 어떻게 표현할까 하고요.”

권혜성 작가의 신작 &lt;파도들 2&gt;(부분). 태풍으로 파도가 몰아치는 제주 중문 앞바다의 시각적 기억을 곤두선 필선으로 되살려낸 작품이다.
권혜성 작가의 신작 <파도들 2>(부분). 태풍으로 파도가 몰아치는 제주 중문 앞바다의 시각적 기억을 곤두선 필선으로 되살려낸 작품이다.

바람 맞으며 바라본 파도의 거칠고 거센 몸부림을 작가는 특유의 감각으로 그림에 담아냈다. 장지에 먹을 풀어서 시커먼 먹빛 배경을 만들고, 돌가루인 분채에 아교를 섞은 물감으로 두껍고도 짧은 선을 쌓아 올리듯 쓱쓱 그어댔다. 전시의 대표작 <이끼처럼 두꺼운 구름, 하늘은 어두룩하다> <파도들 2>가 그렇게 완성됐다. 작가는 “바람이 세게 불어 파도가 안개처럼 흩어졌던 기억이 강렬했다”며 “그런 기억이 온통 시커먼 먹빛 배경에 분채 아교 선들이 거세게 요동치는 화면으로 바뀌었고, 극적인 풍경에 깃든 시간의 흐름이 그림에 압축됐다”고 했다. 눈으로 보고 머릿속에 쟁여 넣은 풍경을 시간이 지나 숙성시켜 풀어내는 건 신기할 만큼 전통 화가의 작업 방식과 맞닿아 있다. 쏟아지듯 약동하는 병솔나무의 울창한 이파리와 가지를 죽죽 그어 그린 대작 <아래로>는 또 다른 주목작이다. 여미지식물원에 우연히 들어갔다가 안쪽에서 가지치기를 하지 않아 뒤엉킨 나무의 인상을 기억해 그림으로 펼쳐냈다. “지난 세월 꿋꿋하게 서 있으면서 가지를 쳐나가며 살아온 모습이 위안이 됐어요. 가지를 치렁치렁 뻗어 살아가는 나무에서 땅에 뿌리내린 기운을 느꼈죠. 그릴 때 선도 꾹꾹 눌러 힘을 줬어요.”

전시장에서는 제주 고산리 일대에서 채집·녹음한 귀뚜라미 소리와 소쩍새 소리, 협곡의 바람 소리 등이 흘러나온다. 제주 풍광의 감흥을 담은 그림 속 리듬을 집중해 느껴보라는 작가 나름의 배려다. 실제로는 인근 자하문로의 차량 소음과 주말이면 울려 퍼지는 시위대의 함성·구호가 끼어들어 집중이 쉽지 않더라고 작가는 웃었다. 전시 제목도 평소 즐겨 듣는 일본 전자음악 그룹 피시맨스의 곡에서 따왔다. “선과 먹을 칠하면서 제주 풍경을 느낀 감각을 표현하니 몸의 스트레스가 없어졌어요. 하늘과 바다 같은 자연은 모양을 계속 바꾸면서 품은 것을 그때그때 그대로 다 내보이지요. 그게 대리만족을 주고, 기록하려는 의지를 줬어요. 작업에서 꼬인 매듭을 풀어낸 기분입니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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