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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학술

압둘라 외잘란, 무력 버리고 ‘민주연합’ 꿈꾼다

등록 2020-09-26 14:36수정 2020-09-26 14:40

[토요판] 박홍규의 이단아 읽기
(28) 압둘라 외잘란

20년 감옥 쿠르드족 지도자
국가 아닌 ‘자치적 사회’ 주장
남성패권 엎을 여성해방 강조

20여년 갇힌 외딴섬의 독방에서 흘러나오는 쿠르드인 사상가 외잘란의 철학이 감동스럽지만, 온갖 외국 사상이 유행처럼 소개되는 우리에게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어쩌다 뉴스에서 영어식 관점과 발음으로 ‘테러리스트 오칼란’으로 소개될 뿐인 그는 1999년부터 터키의 임랄르섬에 홀로 수감된 지난 20여년 동안 식민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독특한 사상을 발전시킨 최고의 탈식민주의 사상가다. 그 오랜 세월, 도서관은커녕 참고서 한권 없이 어떻게 그리도 치열한 사고와 저술이 가능했는지 불가사의할 뿐이다. 그가 주장하는 민주연합주의에서 필수적인 개념들인 아나키즘, 페미니즘, 생태학, 직접민주주의 등을 20여년간 혼자서 생각하고 여러권의 책으로 썼다니 정말 놀랍다.

내가 쿠르드에 대해 알게 된 것은 30년 전에 본 <욜>을 통해서였다. 쿠르드인 감독 이을마즈 귀네이가 군사독재하의 감옥에서 비밀리에 만든 영화인 <욜>은 1982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군사정권의 수입 금지로 1989년에야 개봉됐다. 가출옥을 한 5명의 죄수 중 한 사람인 쿠르드인이 잠시 찾은 아름다운 추억의 고향 마을은 터키군 탄압으로 비참하기 짝이 없다. 함께 말을 타고 달리던 형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살해되어 그 주검이 바깥에 버려져 썩어가는데 그 주검을 보고 반응한다는 이유로 잡혀가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지금도 뇌리에 선연하다. 그 뒤 쿠르드족을 만나려고 몇차례 찾은 터키는 <욜>에서 보던 가해자였다.

자본주의·가부장제 국가 배격

터키 동남부와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이 접경을 이루는 약 30만㎢의 산악지대인 쿠르디스탄에 주로 거주하는 쿠르드족의 인구는 약 4300만명으로 국가를 갖지 못한 민족 중에서는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고 중동에서도 아랍인, 터키인, 페르시아인 다음으로 많다. 주로 목축을 하는 유목민으로 대부분 이슬람교 수니파에 속하고, 언어는 인도유럽어족 이란어계인 쿠르드어를 사용한다. 쿠르디스탄은 중세부터 근대까지 오스만 제국에 속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의 패전 후 영국과 프랑스가 멋대로 그은 국경선으로 분리되어 인구의 45%는 터키, 24%는 이란, 18%는 이라크, 6%는 시리아에 거주하고 있다. 쿠르드족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분리 독립을 요구했지만, 터키와 이라크, 이란, 시리아 4개국 모두 그 독립에 반대하고 도리어 더욱 철저히 탄압해왔다.

출생 연도가 불명하지만 2차대전 이후 터키 동부 시골에서 태어난 외잘란은 초등학교와 실업계 고등학교를 마친 뒤 이스탄불대학에서 법학, 앙카라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정치활동에 참가했다. 1972년에 처음 구금되었고, 1978년 쿠르드노동자당(PKK)을 창당하여 1984년 독립 쿠르드족 국가를 세우기 위해 터키 정부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켰으나 실패해 1999년 시리아로 도망쳤다. ‘피의 살인마’로 불릴 정도로 무자비했던 그는 쿠르드노동자당의 많은 반대자들을 살해했다. 1991년까지 쿠르드 말을 모르던 그는 1999년 시리아에서 강제 퇴거당한 뒤 케냐 나이로비에서 미 중앙정보국(CIA)의 원조를 받은 터키 국가정보국(MIT)에 의해 납치돼 터키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유럽연합(EU) 가입의 조건으로 터키가 사형을 폐지하면서 형량은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그 후 외잘란은 무력 전투의 시기는 지났다고 선언하고 쿠르드족 문제에 대한 정치적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특히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와 페미니스트 정치 이론만이 아니라 머리 북친, 이매뉴얼 월러스틴, 페르낭 브로델, 미셸 푸코, 해나 아렌트, 니체 등의 영향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를 포기하고 민주연합주의라는 독창적 사상을 전개하여 사상가들만이 아니라 사회운동가들에게도 충격을 주었다.

압둘라 외잘란. 위키피디아
압둘라 외잘란. 위키피디아

그가 주장하는 민주연합주의란 민족과 국가라는 두 개념을 분리하고, 국가, 자본주의, 가부장제를 부정하는 정치를 전제로 한다. 국가 건설을 사회 건설로 대체하고 민족국가 패러다임을 벗어난 급진적 민주주의를 전제로 한 연합주의로 민족국가를 대체하자는 것이다. 그의 ‘민주적 연합’은 ‘민주적 자치’를 가능하게 하는 수단으로서, 실제로 지역공동체의 자치정부 위에 건설되고 열린 의회, 마을의회, 지방의회, 더 큰 의회 등의 형태로 다양하게 조직된다. 민주연합은 민선으로 선출된 여러 행정위원회의 연대조직으로서, 지역공동체가 그들의 자산에 대해 자율적인 통제권을 행사하는 한편, 위원회 네트워크를 통해 다른 지역공동체와 서로 연결된다. 의사 결정은 각 동네, 마을, 도시의 공동체에 의해 이루어지고, 모든 사람이 지역위원회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히 환영되지만, 정치적 참여가 의무로 강제되지는 않는다. 사유재산은 없고, 따라서 건물, 토지, 인프라 등에 대한 사용권만이 개인에게 부여되며 시중에서 판매·매입하거나 사기업으로 전환할 권리는 부여하지 않는다. 경제는 지역위원회에 맡겨지며, 국가에 의해 집산화되거나 개인에 의해 사유화되지 않고 지역공동체 차원에서 공동화된다.

외잘란이 주장한 이 상향식 제도는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로서의 국가가 아니라 사람들의 힘을 허용하는 민주주의의 대안 모델이 어떻게 연합과 자기 조직을 통해 기존 민족국가 범위 내에서 급진적이고 참여적인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외잘란은 민주연합주의를 머리 북친에게서 배웠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북친 이전에 간디가 이미 마을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인도의 고대 전통에서 가져와 현대에 되살리고자 한 것이었다. 외잘란이 민주연합주의의 또 하나의 핵심으로 삼는 페미니즘은 간디의 그것보다 훨씬 강렬한 자유와 해방에 근거한다. 2003년에 쓴 <해방의 삶: 여성혁명>이라는 짧은 글에서 외잘란은 여성이 주부로 변하면서 노예화가 진행되어 ‘주류 문명화’가 시작되었듯이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자유를 얻을 수 있고 노예제도가 파괴되는 것은 ‘그러한 지배체제의 기초에 대항하는 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여성은 평등·자연적인 것의 응결”

외잘란에게는 모성사회 질서의 전성기인 신석기 시대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다. 그때 여성은 단지 성별이 아니라 ‘평등하고’ ‘자연적이며’ ‘사회적인’ 모든 것의 응결이며, 그 진정한 의미는 비계층적이고 비정태적이며 축적을 전제하지 않는 사회적 거버넌스 방식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그가 말하는 ‘지배자 남성’이라는 패권적 성의 부상과 일치하는 ‘문명화’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으로, 강압적 형태의 권력은 남성적 문명의 제도로 구현되는 반면 모계 사회구조의 힘은 권위로 이해되는 자연/유기체로 나타난다고 외잘란은 주장한다. 이러한 신석기 시대의 더욱 특징적인 점은 사회가 연대와 나눔에 기반을 둔 방식, 즉 생산에 잉여가 없고 자연을 존중한다는 점이다.

외잘란의 ‘여성’은 국민국가가 아닌 인민사회인 쿠르드를 비유하는 것이다. 요컨대, ‘지배적 남성’의 패권적 ‘문명화’에서 여성을 해방시켜 자유롭게 한다면, 쿠르드족은 물론 세계도 해방시킬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조직할 자유, 재산, 사람 또는 자아 등 소유의 모든 개념으로부터 자유로울 자유, 연대를 보여줄 자유, ‘힘’이 아닌 ‘사랑’을 통해 생명, 자연, 그리고 타인과 균형을 되찾을 자유를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과 함께 민족문제의 가장 첨예한 비극을 보여주는 쿠르드에 바치는 외잘란의 외딴섬 감옥의 염원은 우리와 무관할까?

▶ 박홍규 : 영남대 명예교수(법학). 노동법 전공자지만, 철학에서부터 정치학, 문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관심의 폭이 넓다. 민주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의 관점에서 150여권의 책을 쓰거나 번역했다. 주류와 다른 길을 걷고, 기성 질서를 거부했던 이단아들에 대한 얘기를 격주로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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