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회사가 임금을 5% 올리기로 했다. 그런데 물가 상승률은 12%다. 이에 대해 응답자의 절반이 넘는 51.2%는 “회사의 조치를 수용할 수 있다”고 답했다. 사실 물가 상승을 고려하면 이 회사의 임금 증감률은 오히려 -7%다.
화폐 가치의 변화를 인식 못하는 ‘화폐환상’이 현실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황인도 한국은행 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28일 ‘한국의 화폐환상에 관한 연구’ 보고서를 통해 “성인 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화폐환상이 나타났다”고 밝혔다.
예를 들어 연봉과 물가가 같이 오르면 실질 가치는 변화가 없음에도 임금이 상승했다고 느낄 수 있는데, 이것이 화폐환상이다. 화폐환상은 케인스 이론의 핵심 가정 중 하나다. 실질 임금이 상승한 것으로 착각해 노동 공급이 늘어나면 총공급 곡선이 우상향하고, 이 경우 통화와 재정정책인 총수요 정책이 산출량을 늘리는 데 유효하다는 것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다수의 응답자는 주택 거래와 일반 거래에서 손익 평가, 임금 수준 판단 시 실질 가치보다 화폐의 명목 가치를 살펴봤다. 부동산 관련 질문에서도 응답자의 56.4%는 2억원 주택을 25% 물가 상승 때 2억4600만원에 파는 것이 거래를 잘한 것이라고 바라봤다. 그러나 물가 상승을 고려하면 이 거래의 실질 수익률은 -2%다.
다만 물가 상승률이 높아질 것이라고 미리 알려준 후 은행 예금과 주택 투자를 선택하라는 질문에는 “주택 투자 비중을 늘리겠다”는 대답이 더 많이 나왔다. 물가가 오를 것이라는 정보가 있으면 화폐환상이 다소 적게 나타나는 것이다.
화폐환상이 나타나는 원인은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보고서는 “인지력이나 인플레이션 개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나타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응답자 가계의 실물자산 비중과도 연관성이 없었다.
그러나 직전에 경험한 인플레이션이 낮고 안정적일수록 실질 가치를 계산하는 이득이 적기 때문에 물가를 고려하지 않는 ‘합리적 무관심’은 존재했다.
황 연구위원은 “우리 나라 가계가 화폐환상을 지니고 있다는 설문조사 결과는 거시 경제 분석과 예측 등에 있어 실질 변수 못지 않게 명목 변수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보고서의 설문조사는 2018년에 시행됐다. 황 연구위원은 “2018년 이후 물가에 대한 인식과 주택 가격 상승 등 자산 시장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에 최근 화폐환상을 설문조사하면 또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전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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