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달승의 중동이야기 ‘아라비안 나이트와 중동’
[유달승의 중동이야기] 5
“나는 어릴 적부터 전쟁을 치렀다”
“나는 어릴 적부터 전쟁을 치렀다”
20세기 초 이란 각지에서는 산적들이 출몰해서 마을을 습격했고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으며 호메이니도 예외는 아니었다. 바흐티야르 부족이 마을을 공격했을 때, 어린 호메이니와 그의 형제들은 어쩔수 없이 총을 들어 가정을 지켜야만 했다. 훗날 호메이니는 이런 기억을 회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전쟁을 치렀다.”
호메이니는 매우 활기차고 적극적인 소년이었다. 그는 동네 아이들과 어울러 다니면서 거리에서 놀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동년배 사이에서 항상 지도자가 되기를 원했던 정치적인 소년이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게임은 ‘도둑과 재상’이라는 놀이였다. 이 게임은 왕이 도둑을 붙잡아 재상에게 명령해서 처벌을 내리는 가상 놀이이다. 1982년 호메이니의 아들 아흐마드(Ahmad)는 한 인터뷰에서 “내 아버지는 어린 시절에 항상 왕이 되려고 했다”고 말했다.
호메이니의 어머니 하자르(Hajar)와 숙모 사헤베(Sahebeh)는 교육에 대한 대단한 열정을 보였고 신앙에 대한 사소한 문제도 엄격히 다루었다. 호메이니는 7살이 되었을 때, 집 부근의 마크탑하네(Maktabkhaneh)에서 초기 교육을 받았다. 이곳은 우리나라의 옛 서당과 같은 역할을 했다. 나이 많은 성직자들은 동네 아이들을 모여 놓고 이슬람 경전인 쿠란을 교과서로 삼아서 읽고 쓰는 방법을 가르쳤다. 이곳의 교육방식은 매우 단조로운 암기식이었다. 아이들은 성직자가 말한 구절을 큰소리로 반복하면서 외웠다. 호메이니는 이슬람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곧 쿠란을 암송한 무슬림에게 주는 칭호인 하페즈(Hafez)를 받았다. 또한 그는 시를 사랑하는 문학 소년이었다. 그는 이란의 서사시 왕서(Shahnameh)를 매우 좋아했다. 페르도우시(Ferdowsi: 935-1020)는 가즈니조(Ghazna: 977-1186) 시대의 궁정시인으로 약 30여년에 걸쳐 6만구에 달하는 왕서를 썼다. 왕서는 왕에 대한 찬미를 다룬 왕의 이야기가 아니다. 왕서는 이란의 건국에서 사산조(Sasan: 224-652)의 멸망에 이르는 내용으로 이란의 신화와 전설 그리고 역사를 다룬 대서사시이다. 또한 그는 하페즈(Hafez: 1320-1389)와 사아디(Saadi: 1184-1283/1291?)의 시를 읽고 암송하면서 페르시아 문학에 심취되었다. 훗날 그의 저서에는 인용되지 않은 유명한 시인의 구절이 없을 정도였다.
1918년 호메이니가 16살이 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와 숙모는 이란 전역에 확산된 유행성 콜레라로 사망했다. 고아가 된 호메이니는 종교 문제에 빠져들면서 성직자가 되기를 결심했다. 다음해인 1919년 그는 본격적인 신학 수업을 받기 위해서 고향을 떠나 아라크로 향했다. 그곳에는 당시 최고의 성직자인 아야톨라 압둘카림 하에리(Abdulkarim Haeri: 1936년 죽음)가 운영하는 미르자 유수프 한(Mirza Yusuf Khan) 신학교가 있었다. 하에리는 1914년 마을사람들의 초대로 이곳으로 왔고 약 300여명의 신학생들이 그의 강의를 들었다. 이 인원은 그 당시 비교적 많은 숫자였고 이곳은 점차 종교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신학생들 사이의 영향력을 둘러싸고 서로 경쟁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자신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다녔다. 하지만 하에리는 이러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경건한 성직자이었고 이로 인해 많은 지지와 존경심을 받았다.
콤(Qom)의 성직자들은 이곳을 시아파의 성도로 만들기 위해서 하에리를 초청했다. 오늘날 콤은 이란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도시이자 시아파의 중심지로 알려졌지만 과거에는 이와 같은 명성을 얻지 못했다. 단지 하나의 순례지이자 종교도시에 불과했다. 이곳에는 제8대 이맘 레자(Reza)의 여동생인 파티마의 무덤인 마수메(Masumeh) 사원이 있다. 그 시기 시아파의 중심지는 이라크의 나자프였다. 하에리는 1920년 콤으로 이주했고 그에게 깊게 심취되었던 호메이니도 스승을 따라 콤으로 갔다. 하에리는 콤에서 신학교의 부흥을 가져왔고 콤은 점차 이란의 정신적인 수도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호메이니의 삶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1980년 테헤란에 있는 호메이니를 찾아온 콤 방문객들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디에 있든 나는 콤의 시민이고 그 사실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내 마음은 항상 콤에 있고 그곳의 시민들과 함께 합니다.”
콤 신학교에서 호메이니.
콤 신학교.
콤 신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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