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달승의 중동이야기 ‘아라비안 나이트와 중동’
[유달승의 중동이야기] 10. 석유의 정치와 1953년 쿠데타
흔히 석유를 ‘검은 황금’ 또는 ‘땅 속의 진주’라고 부른다. 이것은 석유의 중요성을 상징하는 말이다. 석유는 산업화를 거치면서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이 되었고 오늘날 세계 경제의 주요 변수이다. 이에 따라 석유를 지배하기 위한 강대국들의 다양한 음모가 나타나면서 전쟁의 원인이 되었고 산유국에서는 고통과 수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클레망소 프랑스 총리는 “석유 한 방울은 피 한 방울”이라고 표현했다. 이제 석유는 ‘악마의 눈물’이자 ‘재앙의 씨앗’이 되었다. 심지어 “역사는 잉크 대신 석유로 쓰여진다”라고 언급되기도 한다.
1901년 영국인 윌리암 K. 다아시(William Knox D`Arcy)는 이란의 카자르조(1795-1925)로부터 석유 채굴권을 얻었고 1908년 5월 26일 이란의 남서부 지역에서 유맥을 발견했다. 1909년 영국정부는 앵글로-이란 석유회사(AIOC)를 설립해 이란의 석유를 장악하였다. 이란의 유일한 자본인 석유는 이란 정부가 아니라 영국 정부의 수중에 있었다. 영국 정부는 석유를 통해 이란경제를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이란의 정책에도 개입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란에서는 노동운동과 대중운동이 확산되면서 일명 ‘테헤란의 봄’이 시작되었다. 1941년 9월 29일 이란의 공산당인 투데(Tudeh)당이 공식 출범하면서 이란역사에서 가장 큰 정당으로 등장했다. 이란의 공산주의 운동은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식인과 노동자 계급을 중심으로 이란 북부에서 시작된 공산주의 운동은 이란의 급속한 산업화와 함께 이란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투데당은 1944년 제14차 의회에서 8명을 국회의원으로 당선시켰지만 1949년 레자 무함마드 샤 저격 사건으로 불법화되었다. 1946년 나밥 사파비(Navvab Safavi: 1924-1955)은 이슬람국가 설립을 목적으로 ‘이슬람전사’(Fedayan-e Eslam)를 결성했다. 1934년과 1944년 사파비는 콤을 방문해 호메이니와 여러 차례에 걸쳐서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1949년 민족주의 세력의 연합체인 국민전선이 결성되었다. 국민전선의 지도자 무함마드 모사데크(Muhammad Mosadeq)는 석유를 정치 이슈로 부각시켰다. “이란에는 숨은 재화가 있다. 하지만 큰 뱀이 그 위에 똬리를 틀고 있다. 외국을 몰아내자. 빈곤을 추방하자. 이란을 이란인의 손에!” 1951년 국민전선은 석유 국유화 운동을 주창하면서 이란 국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게 되었고 4월 30일 국민전선의 지도자 모사데크는 수상으로 취임하였다. 5월 1일 의회는 역사적인 석유 국유화 법안을 승인했다. 영국은 이란 침공 계획을 수립하고 낙하산 부대와 공수 부대가 키프러스 섬으로 이동했고 페르시아만에는 해병대가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이 위기는 미국의 반대와 유엔 안보리의 중재로 파국을 막았다. 1952년 모사데크는 또다시 수상으로 선출되었고 영국은 미국과 함께 이란 석유수출을 봉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조치로 모사데크 수상은 심각한 경제위기를 맞게 된다. 또한 사파비는 이슬람법을 즉각적으로 수용하라고 압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모사데크는 이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투데당과 연합하게 되었고 사파비는 모사데크 정부를 더 이상 지지하기 않게 되었다. 1953년 8월 15일 무함마드 레자 샤는 모사데크 수상을 해임시켰지만 거리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이에 놀란 무함마드 레자 샤는 비행기를 타고 이란을 떠나서 로마로 망명하게 되었다. 세계 언론은 ‘이란 왕정의 종언’이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미국은 이란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직접 개입을 시도했다. 미국의 CIA와 영국의 MI6는 모사데크 민족주의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아작스 작전(Operation Ajax)을 실시한다. 이 작전은 CIA에 근무하는 육군 소령 케르미트 루즈벨트(Kermit Roosevelt)의 지휘 아래 진행되었다. 그는 시오도어 루즈벨트 제 26대 미 대통령의 손자였다. 8월 19일 자헤디(Zahedi) 장군은 군부쿠데타를 일으켜 모사데크 민족주의 정부를 전복하고 팔레비 왕정을 복원시켰다. 무함마드 레자 샤는 테헤란으로 돌아와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제까지의 나는 아버지로부터 권력을 물려받았을 뿐이다. 이제 나는 국민에게 뽑힌 샤이다. 그대들 국민이 나에게 보여준 모습 덕분에 국민이 나를 선택했다고 확신할 수 있다.”
이 사건으로 국민전선의 지도자, 투데당의 간부 및 당원들이 다수 체포, 투옥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 사건을 통해 이란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점차 강화되었고 팔레비 왕정은 친미 국가로 탈바꿈한다. 1954년 12월 15일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은 루즈벨트에게 모사데크 정권 전복 성공을 치하하며 국가안보메달을 수여했다. 1955년 미국은 영국, 이란, 이라크, 파키스탄 및 터키 5개국으로 구성된 바그다드조약기구(Baghdad Pact)을 체결했고 이 기구는 1958년 CENTO(Central Treaty Organization)로 개명했다. 이 기구의 전략목표는 중동에서 소련의 남하정책을 저지하고 장기적으로는 유럽의 북대서양기구와 아시아의 동남아조약기구를 연결함으로서 대 소련 방어망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1956년 제2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을 아랍은 수에즈 전쟁, 이스라엘은 시나이 전쟁이라고 부른다. 1952년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이집트의 나세르는 국가 건설을 위해 아스완 하이댐 건설 사업을 결정하고 미국과 서구로부터 재정 지원을 약속받았다. 또한 그는 군대 증설을 추진했지만 이스라엘과의 대치 상황에서 미국과 서구로부터 원조를 받지 못했다. 이에 따라 이집트는 소련과 무기구입 비밀협정을 체결하고 체코슬로바키아를 통해 소련제 무기를 비밀리에 들여왔다. 미국과 서구는 소련과의 무기협정을 빌미로 이집트의 아스와 하이댐 건설을 위한 재정 지원을 철회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시켜 그 수입으로 아스완 하이댐을 건설하겠다고 주장했다.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에 반발하여 영국, 프랑스 및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와 수에즈 운하를 침공했다. 미국과 소련의 반대 및 세계 여론의 반대에 부딪쳐 영국, 프랑스 및 이스라엘은 점령지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중동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강화되었다.
이러한 사태에 직면하여 미국은 1957년 의회에서 아이젠하워 독트린을 발표했다. 덜레스(J. F. Dulles) 미 국무장관은 중동의 중요성과 위험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많은 국가가 중동의 천연자원과 무역로에 의존하고 있으며 3대 종교의 성지가 있다. 만약 그 지역이 공산주의에 의해 지배된다면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위험이 눈 앞에 있다.” 아이젠하워 독트린은 두 가지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첫째, 만약 소련이 중동을 침략할 경우 대통령에게 의회는 군대 출동 권한을 부여할 것, 둘째, 2년간 4억 달러를 중동국가들의 경제 원조로서 대통령 특별기금에서 지출할 것. 미국은 아이젠하워 독트린을 통해서 중동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2006년 5월 8일 아흐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은 외교 단절 이후 27년 만에 부시 미 대통령에게 18쪽 분량의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그는 미국의 국수주의적 태도를 비판하면서 1953년 쿠데타와 합법적 정부를 붕괴시킨 것에 대해서 이란 국민들이 많은 의문과 증오심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1953년 쿠데타는 이란 국민들에게 반미 감정의 뿌리가 되었고 향후 미국과 이란의 관계를 규정하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무함마드 모사데크의 거리 연설.
무함마드 레자 샤와 자헤디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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