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오키나와현 교직원노조 소속 교사 등이 지난달 29일 나하시의 번화가인 국제거리에서 오키나와전 주민 집단자결과 관련한 당국의 교과서 기술 변경을 규탄하고, 제소당한 노벨문학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를 지원하기 위한 서명운동 펼치고 있다.
오키나와 현지에서 만난 생존자 증언
일본 문부과학성은 지난 3월30일 오키나와전의 가장 처참한 사건인 주민들의 집단자결과 관련해 “일본군에 의한 강제 또는 명령은 단정할 수 없다”며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서 ‘일본군의 강제’라는 기술을 삭제하도록 하는 검정 결과를 발표했다. 오키나와 집단자결은 태평양 전쟁 막바지인 1945년 3월 오키나와현 자마미섬, 도카시키섬, 게류마섬에 미국이 상륙하자 800명이 넘는 주민들이 수류탄과 면도칼 등으로 사랑하는 가족들을 서로 죽인 사건을 말한다. 오키나와 현지취재를 통해 이 사건의 진실과 일본 정부의 교과서 기술 삭제 의도를 추적했다. 편집자
1945년 3월28일 일본 오키나와현 남단 도카시키섬의 한 참호 안. 전날 섬에 상륙한 미군의 함포사격을 피해 밤새 8㎞ 가량을 걸어 마을 뒷산 동굴의 피난처에 도착한 마을 사람 600~800명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참호 밖은 아침부터 잔뜩 찌푸린 채 비구름이 낮게 깔려 이날의 비극을 예고하는 듯 했다.
마을 촌장이 ‘천왕폐하 만세’를 삼창했다. 16살 소년 긴조 시게아키는 죽음의 시간이 다가왔음을 절망적으로 직감했다. 일부 마을사람들과 방위대원들은 각자 가지고 있던 수류탄을 꺼냈고, 그 가족들과 친척들은 빙둘러 앉았다. 여기저기서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아 터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수류탄에 의한 죽음은 극히 적었다. 동굴 안에 모인 사람 수에 비해 수류탄 개수가 적은 데다가 조작을 제대로 못하는 바람에 불발탄이 많았다.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빨리 확실하게 죽을 수 있을지 혼돈상태에 빠졌다. 그때 마을의 지도자격인 50대 남자가 나뭇가지를 잘라 부인과 자식을 마구 때려 죽이는 장면을 어린 긴조는 목격했다. 그 이후 면도칼, 끈, 곤봉, 돌 등 모든 게 사랑하는 가족들을 죽이는 흉기로 변했다. 긴조도 “형과 함께 어머니와 동생에게 손을 댔다”며 “어머니의 목숨이 끊어졌을 때는 돌멩이가 도구가 됐다”고 말했다. 그 동굴에서 329명이 순식간에 사랑하는 가족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지난달 27일 오키나와현 나하시 ‘나하중앙교회’에서 만난 긴조(78) 목사는 62년 전 오키나와 전투 때의 집단자결에 대한 교과서 기술에서 ‘일본군에 의한’이라는 주어가 삭제된 것에 대해 강한 분노를 표시했다. “왜 당시 살아남은 부대장의 의견만 듣고, 당시 체험자나 연구자의 연구결과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하는지 화가 난다.”
당시 살고 있던 도카시키섬에서는 미군이 상륙하기 일주일 전에 군의 병기담당 하사관이 수십명의 마을 사무소 남자 직원들과 청년들에게 수류탄 2개씩을 건넸다고 한다. “한발은 적을 만났을 때 던지고, 나머지 한발은 자결하라.” 그는 “천황으로부터 수여받은 중요한 무기를 군대가 비전투원에게 주는 일은 절대 없다”며 “주민에게 나눠준 수류탄은 일본군이 중대한 결심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주민들의 정신상태도 사태의 비극성을 더했다. 그는 당시 주민들을 지배했던 ‘군관민 공생공사’라는 말이 집단자결을 읽는 주요 열쇳말이라고 말했다. ‘귀축영미’라는 말에서도 나타나듯 당시 미군에게 체포되면 팔다리가 잘리고, 여자들은 ‘욕을 본다’는 강한 공포감이 있었다고 한다. 황민화 교육으로 주민들 온몸에 새겨진 미군에 대한 적개심이 실제 상황이 되자 공포심으로 변한 것이다.
중국전선에서 돌아온 일본군이 저지른 갖가지 만행이 은연중에 퍼지면서 이런 공포심이 배가됐다. 일본군이란 배경이 없었으면 수백명이 한꺼번에 죽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당시 일본군에 끌려온 조선인이 배가 고파 밭에서 고구마를 캐먹다 총살당하고, 오키나와 방언를 사용한 주민들이 스파이 혐의로 처형당하는 등 일본군은 마을의 모든 것을 지배했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고 정상적인 상태가 되자 가족을 죽였다는 고통과 고뇌가 더욱 깊어졌다. 2년쯤 지나 기독교인 선배로부터 받은 성서를 읽고 목숨, 죽음, 영원한 구원이란 말에 강렬한 끌림을 받았다.
그 뒤 오키나와그리스도교대 교수가 된 긴조 목사는 오키나와의 본토 반환(1972) 직전부터 인간을 황폐화시킨 일제 황민화교육의 실상과 전쟁 체험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신에 의해 떠밀리다시피 대중 앞에 증언자로 나섰지만, 마음에 맺힌 이야기를 풀어냄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얻고 집단자결 문제도 객관적으로 파악하게 됐다.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에게 그때의 체험을 이야기해주면서 ‘살아남은 게 두렵다는 것은 체험자 이외에는 모를 것’이라고 하자 학생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감상문에 ‘아무리 전쟁이라고 해도 가족들에게 손을 대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썼다. 그게 정상적인 감각이다. 그때 우리의 상황은 살아남는 게 두려운 이상한 상황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이 회상하기 싫은 과거의 잘못을 지워버리려 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개탄했다. “잊어버리는 것으로 진보하는 것은 없다. 아름다운 나라 운운하지만 과거 어두운 역사에 대해 사죄할 것은 사죄하고 반성할 것은 반성해야 비로소 아름나운 나라가 된다.”
1945년 3월26일 미군이 최초로 상륙한 오키나와 자마미섬의 한 참호 안에서 수류탄 자폭으로 누나를 잃은 미야기 쓰네히코(73)는 ‘일본군에 의한’이란 표현을 삭제한 것은 ‘폭거’라며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당시 마을 군 책임자가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한 것과 관련해 “명령을 내렸는지 여부는 차지하고라도 눈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는데 자신에겐 책임이 없다고 하는 것은 당시 지도자로서 책임있는 자세가 아니다”고 비판했다. 교사 출신인 그는 19년 전부터 매년 오키나와 전쟁 체험자를 한 명씩 선정해 체험담을 담은 소책자를 발행하고 있다.
“전쟁은 인간을 인간이 아니게 만든다. 어머니는 죽어가는 누나를 두고 동굴에서 나와 최후를 보지 못한 것을 죽을 때까지 후회했다. 어머니의 회한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게 하려고 당시의 체험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일본 정부는 교과서 바꿔쓰기를 통해 ‘과거 일본군의 싸움은 아름다운 전투였다, 집단자결은 미담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글·사진/나하(오키나와) 김도형 특파원 aip209@hani.co.kr
오키나와에서 활동 중인 조각가 긴조 미노루(68)가 10년에 걸쳐 제작한 100m 길이의 부조 ‘전쟁과 인간’가운데 집단자살 장면.
오키나와현 나하시 나하중앙교회에서 만난 긴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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