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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유럽

“구급차 불러 달려갔더니, 러시아군 덫이었다” [2분 현지영상]

등록 2022-06-16 10:20수정 2022-06-21 09:48

우크라이나를 다시 가다 (7)
간호사 루드밀라·주유소 직원 발레리이가 증언한 부차의 한 달
15일(현지시각) 낮 발레리이(46)씨가 일했던 우크라이나 부차의 한 주유소에 러시아군의 공격으로 생긴 약 3m 깊이의 구덩이가 그대로 남아있다. 러군의 공격으로 일터가 무너진 뒤 발레리이씨는 여전히 실직상태다. 부차/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15일(현지시각) 낮 발레리이(46)씨가 일했던 우크라이나 부차의 한 주유소에 러시아군의 공격으로 생긴 약 3m 깊이의 구덩이가 그대로 남아있다. 러군의 공격으로 일터가 무너진 뒤 발레리이씨는 여전히 실직상태다. 부차/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2022년 2월24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곧바로 수도인 키이우를 향해 진격했다. 러시아군의 수도 포위 계획이 성공하려면 키이우로 가는 길목인 작은 도시 ‘부차’(Bucha)를 지나야 했다. 3월3일 부차를 점령한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군의 반격으로 키이우 일대에서 물러나기까지 한 달 가량 이 도시에 머물렀다.

러시아군이 퇴각하고 나고 난 뒤 부차에서는 수백구의 시신이 한꺼번에 발견됐다. 러시아군이 ‘민간인 대학살’을 저질렀다는 비판이 잇따랐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전범’으로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세워야 한다는 여론도 거세졌다. <한겨레>는 이곳에서 발생한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평범한 시민들의 증언을 듣고 이를 기록한다. 부차 시청 직원인 드미트로 합첸코에 이어 간호사 루드밀라(47)와 주유소 직원이었던 발레리이(46)를 만났다.

그날도 루드밀라 스카칼로바(47)는 평범한 하루를 시작했다. 미국에 있는 친구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 “전쟁이 났다”고 했지만 믿을 수 없었다. “무슨 소리야. 난 그냥 얼른 출근이나 해야겠어.” 지난 2월24일 러시아가 전쟁을 시작한 날이었다.

■어디선가 들려온 총성…밀려드는 부상자들

우크라이나 부차에서 간호사로 일하다 러시아군이 침략한 다음 피난 가거나 집에서 대피하지 않고 병원에서 일했던 루드밀라(49)가 14일(현지시각) 오전 한 구급차 이동본부에서 &lt;한겨레&gt;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부차/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우크라이나 부차에서 간호사로 일하다 러시아군이 침략한 다음 피난 가거나 집에서 대피하지 않고 병원에서 일했던 루드밀라(49)가 14일(현지시각) 오전 한 구급차 이동본부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부차/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루드밀라는 부차 시립 병원 간호사다. 한창 일을 하는데 총소리와 무언가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인근 도시인 호스토멜에서 벌어진 러시아군과 우크라이나군이 충돌했다는 것은 나중에 안 사실이다. 그때 호스토멜 공항에서 터진 폭발로 루드밀라의 동료 할르나 드보이니첸코(73)의 아들이 죽었다.

이튿날 아침이 밝았다. 루드밀라는 여느 때처럼 병원으로 출근했다. 아침부터 바빴다. 누군가가 구급차를 호출해 신고가 들어온 주소로 달려가는데 우크라이나군이 차를 멈춰 세웠다. “다친 군인이 있습니다. 도와주세요!” 다친 군인은 3명이었다. 부상이 심각해 보였다. 이들을 태우고 병원으로 돌아갔다. 병원에 도착한 뒤로 우크라이나군 부상자들이 물밀듯 들어왔다. 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갔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눈을 붙이려 했지만 좀처럼 잠이 들 수 없었다. 어딘가에서 폭발 소리, 총격 소리가 들려왔다.

또 날이 밝았다. 그날은 루드밀라가 쉬는 날이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병원이었다. “다른 직원들이 전투 상황 때문에 병원에 못 나오고 있어요. 나와줄 수 있나요?” 부차시 북쪽 동네에 사는 직원들이 바깥으로 못 나오는 상황이라고 했다. 이날은 병원에서 3km 거리에 있는 응급차 대기 장소로 출근했다. 전날보다 총성과 폭발음이 더 가깝게 들렸다. 루드밀라는 응급대원들과 병원으로 이동했다. 응급차량 대기소에는 지하 대피소가 없었고 병원에 부상자가 너무 많아 손이 부족했다.

■러시아군이 구급차 호출…“우크라인 죽이려고 놓은 덫”

응급 구조를 요청하는 사람들 상당수는 인근에 사는 주민들이나 군인이었다. 하지만 가끔은 러시아군이 전화하는 경우도 있었다. 루드밀라의 동료는 구조 요청을 받고 구급차에 자기 아들과 국토방위군(우크라이나 예비군·시민군) 남성을 태우고 출동했다. 구급차가 막상 도착하니 러시아군이 총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러시아군은 국토방위군인 남성을 죽였다. 루드밀라의 동료인 운전사와 아들은 납치해 갔다. 비슷한 일은 반복됐다. “우크라이나 사람을 죽이려고 덫을 놓는 것 같았어요.” 루드밀라가 말했다.

열흘 정도 지났을까. 포위망은 점점 좁혀졌다. 3월3일 러시아군이 부차를 장악했다. 그때부턴 거리에 한 번 나가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3월11일 병원 인력들 대부분도 부차시를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루드밀라와 가족들은 마을을 떠나지 못했다. “남동생에게 다섯 살짜리 딸이 있는데, 그 애가 집을 떠나고 싶지 않다고 했어요. 가족 모두 남기로 했습니다.” 루드밀라가 말했다. 루드밀라와 같이 간호사로 일하는 엄마와 남편, 남동생과 시누이, 조카까지 일가족은 러시아군 퇴각 때까지 마을에 남은 3000명에 속한다.

루드밀라의 남편 므콜라(49)는 시청 경비원인데 15일 러시아군에 납치됐다. 남편이 집에 들어오지 않고 연락도 되지 않아 밤새 울기만 했다. 므콜라는 그날 시청 직원 드미트로 합첸코(44)와 함께 납치됐다 풀려난 6명 중 하나다. “남편을 만나자마자 그냥 껴안았어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14일(현지시각) 부차시 응급차 대기소에서 만난 루드밀라는 자신이 ‘원래 수술실을 싫어했다’고 했다. 피를 보는 게 힘들어서다. 피할 수 있으면 항상 피했다. 하지만 지난 3개월 동안은 정신없이 수술실에 들어갔다. 다친 병사들, 주민들은 대부분 총에 맞거나 폭탄 파편이 튀어 피를 흘렸다.

“일단 사람들을 빨리 치료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어요. 그다음부터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어요.”

3월25일 병원에 실려 온 군인은 폭탄 파편에 다리가 부러졌고, 어떤 한 사람은 팔과 배에 총이 박혀 병원으로 실려 왔다. 같은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가 러시아군이 놓은 지뢰를 밟아 다치기도 했다. 의료 인력과 장비 모두 점점 부족해졌다.

■총알 지나간 허벅지엔 피가 흥건…병원은 비었다

지난 3월 30일 러시아군이 쏜 총을 맞고 왼쪽 허벅다리에 총상을 입은 발레리이(46)가 15일(현지시각) 낮 우크라이나 부차 시청 들머리에서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부차/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지난 3월 30일 러시아군이 쏜 총을 맞고 왼쪽 허벅다리에 총상을 입은 발레리이(46)가 15일(현지시각) 낮 우크라이나 부차 시청 들머리에서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부차/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다리에 총을 맞았는데 병원은 텅 비었어요. 치료를 받을 수 없어서 그냥 붕대를 칭칭 감았어요.”

러시아군이 퇴각한 날인 3월30일 오후 5시였다. 루드밀라의 이웃이자 부차시의 주유소 직원 발레리이 마트비엔코(46)는 갑자기 허벅지에 통증을 느꼈다. 인근 도시 장모님 댁으로 몸을 피한 부인과 통화를 하려고 안테나가 있는 건물 지붕 위에 올라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즈음엔 전화가 잘 터지지 않았다. 주민들이 러시아군의 사진을 찍고 이를 우크라이나군과 공유한다는 것을 안 러시아군은 통신선을 찾아 끊어놓기 일쑤였다.

지난 3월 30일 러시아군이 쏜 총에 왼쪽 허벅다리에 총상을 입은 발레리이(46)씨가 15일(현지시각) 낮 우크라이나 부차 시청 들머리에서 총알이 나간 흉터를 보여주고 있다. 이 상처부위에는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정도의 크기였다고 발레리이가 설명했다. 부차/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지난 3월 30일 러시아군이 쏜 총에 왼쪽 허벅다리에 총상을 입은 발레리이(46)씨가 15일(현지시각) 낮 우크라이나 부차 시청 들머리에서 총알이 나간 흉터를 보여주고 있다. 이 상처부위에는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정도의 크기였다고 발레리이가 설명했다. 부차/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발레리이의 왼쪽 다리, 그리고 신발에 피가 흥건했다. 퇴각하던 러시아군이 쏜 총알이 발레리이의 왼쪽 허벅지를 뚫고 지나간 것이었다. “손가락이 들어갈 정도로 큰 구멍이 뚫렸어요.” 15일 부차 시청 앞에서 만난 발레리이가 말했다. “병원에 가려고 했지만 이미 의사들이 다 도시를 떠나 치료를 받을 수가 없었어요. 곧장 친구 집으로 갔는데 붕대를 감아줬어요.”

발레리이는 지난 3월15일 러시아군에 납치됐던 부차 시청 직원 드미트로의 친구다. 병원 치료 없이 매일 붕대를 갈았다. “잘못하면 덧날 수 있으니까요.” 이제 상처는 다 나았다. 허벅지 깊은 곳에 거뭇한 흉터만 남았을 뿐이다. “그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내 집을 지키고 싶었어요. 고양이 두 마리랑 강아지, 그리고 닭 열 마리가 있는데 돌봐야죠. 최근엔 이 닭들이 알을 낳았어요.” 러시아군은 발레리이의 일터인 주유소를 부쉈고 그는 직장을 잃었다. 모아둔 돈도 다 썼다. 지금은 시에서 주는 지원금으로 버틴다. “이제 잘 걸을 수 있으니까 직장을 찾아봐야죠.”

발레리이(46)씨가 일했던 우크라이나 부차의 한 주유소. 러시아군의 공격을 받은 상태 그대로 남아있다. 러군의 공격으로 일터가 무너진 뒤 발레리이씨는 여전히 실직상태다. 부차/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발레리이(46)씨가 일했던 우크라이나 부차의 한 주유소. 러시아군의 공격을 받은 상태 그대로 남아있다. 러군의 공격으로 일터가 무너진 뒤 발레리이씨는 여전히 실직상태다. 부차/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지옥 같았던 3월이 지나고 두 달 반이 흘렀다. 마을은 전쟁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려 애쓰고 있다. 이제 러시아군은 사라졌고 총성도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루드밀라는 공포가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언젠가 집 근처 공장에서 엔진 시동 소리가 ‘웽∼’ 하고 들렸다. 농담을 좋아하는 남편은 “러시아군이 온다!”고 소리쳤다. 루드밀라는 사실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얼른 밖으로 뛰쳐나갔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불안한 눈초리로 주변을 살폈다고 했다.

“주변이 조금이라도 어두우면 항상 손전등을 켜요. 어둠이 무서워요. 러시아군이 마을에 들어왔을 때 우리 집 대문이 부서졌는데 두 달 넘게 못 고쳤어요. 집에 있어도 항상 두렵습니다.”

부차/노지원 기자 z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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