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대 서울 근무기자 회상으로
“다양한 형태로 황민화 정책이 추진됐지만 <아사히신문>은 그것을 비판하지 못했다.”
일본의 <아사히신문>은 30일 1940년대 경성(서울) 지국에 소속된 기자들의 활동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당시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비판하고 자사의 무비판적 보도태도를 반성하는 기획기사를 게재했다. ‘신문과 전쟁’이란 주제로 한 면을 털었다.
1941년 1월부터 2년 간 <아사히신문>의 경성지국 기자로 활동했던 무라카미 간지(91)는 당시 한국 서울을 방문해 남산에 ‘조선신궁’을 세웠던 것을 상기하면서 “궁을 세우고 참배하게 한 것은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고 말했다. 무라카미는 경성지국에 재직하면서 검열에 걸릴 만한 비판적인 기사는 쓰지 못했다고 한다. 단 한번 조선 총독부의 ‘배포금지’를 받은 기사를 쓴 적이 있지만, 그것도 사무적 실수로 엠바고(특정일까지 보도통제) 약속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머릿속에서 검열을 하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무라카마와 비슷한 시기 경성지국에서 조선에 주둔하던 일본군 사령부를 담당하며 일제의 주문대로 기사를 썼던 나라 히로미(87)의 사례도 소개됐다.
1942년 10월 평양 부근에서 열린 가을철 군사연습에 ‘보도반원’으로 참가해 취재한 그의 조선 할아버지 인터뷰 기사는 ‘숙소의 노인, 황군 신뢰의 숭고한 모습’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됐다. 그는 “보도반원은 군의 명령으로 움직인다. 군이 자기 입맛대로 발표하려고 만든 제도”라고 설명했다. “지금이야 ‘전쟁은 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시는 어쨌든 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군국주의의 선전을 하고 있다는 인식은 없었다.”
<아사히신문>은 1945년 3월 기준으로 ‘조선판’ 신문을 12만부 이상을 판매했으며, 경성지국에 기자만 20여명이나 파견할 정도로 조선은 큰 판매시장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도쿄/김도형 특파원 aip20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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