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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자수서’ 한장이 가로막은 살아생전 귀국길 / 홍성규

등록 :2021-04-07 16:15수정 :2021-04-08 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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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규ㅣ‘국가보안법 폐지 국민행동’ 공동대변인·화성노동인권센터 소장

지난 4월2일, 마석 모란공원묘지에서 ‘분단시대의 망명객 고 정경모 선생 유해봉안식’이 엄수되었다. 그나마 마지막 가시는 길에 <한겨레>를 비롯하여 몇몇에서 고인의 생애를 기리는 소식을 전했기에 자세한 소개는 생략한다.

1970년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조국의 통일을 위해 열정적으로 활동하던 선생은, 1989년 3월 문익환 목사의 방북길에 동행한다.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당시 허담 조국평화통일위원장과 4·2공동성명의 초안을 작성해 발표했다. 바로 이 건으로 문익환 목사는 귀국 즉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고, 고인 역시 귀국길이 막혔다. 그로부터 한 세대가 흐르는 동안, 고인이 타국 땅에서 열렬히 구명운동을 벌였던 김대중씨도 마침내 대통령 자리에 올라 남북정상회담으로 노벨평화상까지 받았고, 노무현 정권을 거쳐 긴 구비를 돌아 촛불혁명을 넘어 문재인 대통령 시절까지 왔음에도 고인의 귀국길은 풀리지 않았다.

‘구시대적 유물’이라던 국가보안법은 토씨 하나 수정되지 않은 채 여전히 건재하고, 인권변호사 출신이라던 문재인 정권에서도 ‘기본적 조사와 자수서 작성’을 귀국 허가 조건으로 내세웠다. 나고 자란 산천이, 보고 싶은 사람들의 얼굴이, 타국에서까지 온 생애를 다 바쳐 사모했던 조국 땅이 얼마나 그리웠겠느냐마는, 선생은 마지막 순간까지 국가보안법에 맞서 ‘자수서 타협’을 거부했다. “내가 못 가는 게 아니잖소, 안 가는 것이오!”라고 일갈하던 선생은 결국, 장장 반세기 만에 끝내 유골로 고향땅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 국가보안법은 바로 이런 법이다.

혹자는 ‘그깟 자수서 한장 쓰고 말지!’라며 안타깝게 마음을 표출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디 ‘사람’이 그런가. ‘배부르고 등 따시다고 만사 오케이’가 아닌 것이 바로 사람이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옳은 것은 옳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오늘 당장 죽음의 문턱 앞에 선다고 해도 기본적인 존엄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 또 사람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우리 민주주의의 역사가 이를 웅변해주고 있지 않은가! ‘전향서’와 ‘자수서’는, 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스스로 짓뭉개도록, 짓밟도록 하는 야만적 폭력에 다름 아니다. 국가보안법은 이런 법이다.

‘철 지난 녹슨 칼, 역사의 박물관으로 가야 할 구시대적 유물’, 국가보안법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표현들이다. 그러나 알고 있는가? 녹슬어도 칼은 여전히 사람들을 보란 듯이 베고 있고, 구시대적 유물이라면서 지금 이 순간에도 억울한 피해자들을 실시간으로 양산해내고 있다는 끔찍한 사실을! 21세기도 한참 넘어선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법원이 공식적으로 판단한 ‘이적 도서’와 ‘이적 표현물’들이 도처에 널려 있고, 그 곁에 다가서는 순간 언제든 국가보안법 위반자가 되어 무시무시한 ‘간첩’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없어지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쉴 새 없이 ‘열일’하고 있는 악법, 그것이 바로 국가보안법이다.

1948년 제정되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갈망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끈질기게 한목소리로 ‘폐지’를 외쳐왔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제 이 ‘질식’으로부터 벗어날 때도 되지 않았나. 아니, 늦어도 한참, 너무 많이 늦었다.

지난 3월4일, 다시 ‘국가보안법 폐지 국민행동’이 출범했다. 민변, 민교협,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인권센터, 원불교인권위원회, 예총, 민예총,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한국와이엠시에이(YMCA), 민주노총, 전농, 정의당, 진보당 등 법조계와 학계, 종교, 문화예술, 시민사회, 민중진보단체들이 다시 모두 함께 힘을 모았다. “상반기 내 10만 국민입법청원을 추진하여 이번 21대 국회 내에서는 반드시 폐지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국회의원 300명 중 151명만 찬성하면 없어지는 법이다. 집권여당인 민주당의 결심만으로도 능히 가능하다는 말이다. 촛불혁명 후 압도적인 힘을 실어줬던 국민들의 요구가 과연 어디에 있는지 직시하길 바란다. 아직 한참 남은 ‘21대 국회 임기 내’가 아니라,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 내에 매듭짓길 충언한다. ‘인권변호사 출신’이란 타이틀에 더는 부끄럽지 않으려거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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