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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여성은 버리고 간다

등록 2021-07-21 14:18수정 2021-07-22 02:39

[세상읽기]

손아람|작가

국민의힘 대선경선준비위원회가 출범한 바로 다음날이다. 유승민 전 의원은 누구보다 기민하게 공약을 발표했다. ‘여성가족부 폐지.’ 여성가족부 주관 사업을 다른 부처에서 더 잘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경선 1호 공약이나 다름없었다. 즉각 동의를 표한 하태경 의원은 출마 선언과 동시에 ‘남녀 공동 복무제’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작은정부론 차원에서 여성가족부를 없애자”며 거들었고, 언론은 앞다퉈 “여성가족부 폐지에 동의하십니까?”라는 설문을 돌린 뒤 결과를 내놓았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더 의미 있는 질문은 이것이다. 여성가족부 폐지는 대통령 선거 1호 공약이 될 만한 의제인가?

국민의힘발 여성가족부 폐지론은 철저하게 정부 효율성에 초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이 문제를 대통령 선거 의제로 논쟁하는 것 자체가 효율적인지부터 의문이다. 2021년 배정 예산이 전체의 0.2%인 1조2천억원에 불과한 여성가족부는 올해뿐만 아니라 지난 수십년간 재정적인 존재감이 전무하다시피 한 정부부처였다. 이준석 대표가 지향하는 ‘작은정부론’을 누구보다 충실하게 수행해왔다고도 평가할 수 있겠다. 정부예산안의 다른 항목과 비교하면, 여성가족부 전체 예산은 환경부의 스마트상수도 관리체계 및 상수도 위생관리 지원사업(1조1천억원)보다는 조금 크고 행정안전부의 지역사랑상품권 할인지원금(1조3천억원)보다는 조금 작은 규모다. 상수도 위생과 지역경제 활성화가 사소한 문제는 아니지만, 디지털 수도계량기나 지역화폐 앱의 인터페이스를 더 효율적인 방향으로 전면 개편하겠다는 대선 공약을 내거는 후보를 유권자가 만날 일은 대통령 선거가 끝나는 날까지 없을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통령 후보에게 그 정도 규모 예산의 효율적인 집행을 최우선으로 요구하는 유권자는 없기 때문이다. 법무부 폐지를 공언한 하태경 의원의 또 다른 공약과 통일부 폐지를 세트로 끼워 넣은 이준석 대표의 발언은 여성가족부 존치 논쟁에 가려 아예 화두로 오르지도 못했다. 여성가족부 논쟁의 타오르는 온도는 조직의 효율성이나 정치적 위상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내용보다 순서가 더 의미를 갖는 순간이 있다. 국민의힘 대통령 경선의 첫번째 의제로 여성가족부 폐지가 돌출한 것은 두가지 사실을 드러낸다. 첫째로 젊은 세대 남성들이 느끼는 여성가족부의 ‘적대적 위상’이 마침내 끝판왕의 단계에 도달했다는 것. 둘째로 그 근간이 되는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이 제1야당을 먹여 살리는 정치적 금광이 됐다는 것. 무슨 고정금리처럼 5% 근처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 20대 여성 지지율과 불과 1년 만에 20% 이상이 대이동 해온 20대 남성 지지율을 동시에 목격한 국민의힘으로서는 눈앞에 놓인 위험한 선택지의 유혹을 거부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국민의힘이 가는 길은 막다른 길, 그것도 되돌아오기 어려운 막다른 길이다.

정치는 유권자의 삶을 개선하겠다는 약속의 대가로 생명을 얻는다. 이것은 정치의 정의에 다름없다. 삶을 약속하지 않고 카타르시스만을 충족시키는 정치는 결코 지속가능하지 않다.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겠다. 여성을 군대에 보내겠다. 국민의힘 대선 후보들이 청년 남성을 겨눠 내세운 공약에는 정작 남성이 등장하질 않는다. 청년 남성의 경제적 박탈감을 해소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보다는 여성의 권익을 함께 박탈하는 쪽이, 병역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모병제 전환을 논의하는 것보다는 여성을 몽땅 군대에 보내버리는 편이 더 손쉬운 접근이기 때문이다. 기성 지지자들에게 좌표 혼란을 일으키는 것보다는, 그간 뭘 해도 응답하지 않았던 여성표를 내다 버리는 게 낫다는 셈법이다.

정서적 이슈는 휘발한다. 정당 정체성으로 축적될 수 있는 자산이 아니다. 적의로 결집한 지지자들은 단 한번의 충돌로도 지지를 거둬들일 수 있다. 지지자들을 묶어두려면 끊임없이 먹잇감을 던질 수밖에.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고, 여성을 군대에 보낸 다음은? 하태경 의원이 인터뷰에서 암시했던 것처럼, 여성 중심 커뮤니티 활동자의 취업을 제한하고 남성혐오표현을 사용하는 여성을 처벌하게 될까? 여성의 자리를 조정하겠다는 약속만으로 가득한 ‘남성 정책’이 청년 남성들에게 당장 얼마나 큰 희열을 안길지 나로서는 가늠할 수 없다. 국민의힘 소속 정치인들은 밤마다 성실하게 기도하길 바란다. 그 기쁨이 여성 유권자들의 기억보다 오래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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