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공소권 남용’ 첫 판결과 ‘고발 사주’ / 박용현

등록 2021-10-20 15:28수정 2021-10-20 19:09

“검사가 수사권 가지고 보복하면 그게 깡패지, 검사입니까?”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유명한 발언이다. ‘보복 수사란 있을 수 없는 일’임을 강조한 말이었는데, 현실은 반대였다. 지난 2014년 탈북민 유우성씨를 간첩으로 조작한 게 밝혀져 국정원 요원이 구속기소되고(3월31일) 관여 검사들이 징계를 받자(5월1일) 검찰은 4년 전 기소유예 처분했던 다른 사건을 끄집어내 유씨를 재기소했다(5월9일). 이에 대해 서울고법은 “(재기소에) 어떠한 의도가 있다고 보여지므로 공소권을 자의적으로 행사한 것으로 위법하다고 평가함이 상당하다”고 판결했다(2016년 9월1일). 그리고 대법원이 지난 14일 이 판결을 확정하며 검찰의 권한 남용을 이유로 공소를 기각하는 첫 판례를 남겼다.

여기에 책임이 있는 검사들의 면면도 눈길을 끈다. 유씨를 재기소한 이는 안동완 당시 서울중앙지검 형사2부 검사(현 서울동부지검 형사1부장)이고 당시 부장검사는 이두봉 현 인천지검장이었다. 이 지검장은 ‘정부 정책을 수사 대상으로 삼는 건 검찰권의 범위를 넘어선 정치적 수사’라는 비판에도 윤석열 검찰총장이 밀어붙였던 월성원전 사건 수사를 진두지휘했다. ‘보복 기소’의 장본인인 이 지검장이 이른바 ‘윤석열 라인’이란 점은 아이러니다. 또 유씨 재기소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이었던 김수남 전 검찰총장은 대장동 의혹의 화천대유 자문단에 이름을 올려 여론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다.

그런데 검찰 조직과 당사자들은 뉘우치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김오수 검찰총장은 지난 18일 국정감사에서 사과 요구를 받자 “검찰의 기소와 수사로 인해 (피해자가) 긴 시간 어려운 과정을 겪은 데 대해 유감을 표하고, 진정한 사과는 아직은 좀 이른 것 같지만, (피해자의) 아픈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말했다. 명확한 사과를 피해 가는 모호한 답변이었다. 이두봉 지검장도 대법원 판결 당일인 14일 국정감사를 받았는데 사과 요구에 “성찰해 보겠다”고만 답했다.

검찰이 의도를 갖고 한 시민을 콕 집어 수사·기소 대상으로 삼는 것은 검찰권의 가장 위험한 남용 행태다. 미국 연방 검찰총장과 대법관을 지낸 로버트 잭슨은 일찍이 “검사가 싫어하거나 괴롭히고 싶은 사람 또는 사회적 혐오 대상을 선택하고 그들의 범죄 혐의를 찾는 방식이야말로 검찰권의 가장 큰 남용 위험이 도사린 지점”이라고 지적했다. 마치 유우성씨 재기소 사건을 염두에 두고 한 말처럼 지금의 현실과 맞아 떨어지는 혜안이다. 기소 여부를 시민 배심원들이 결정하는 미국의 대배심은 이런 위험성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다. “검사가 정치적 혹은 개인적인 이유로 무고한 사람을 괴롭힐 수도 있으며 (중략) 편견이 없는 공정한 시민 집단이 비윤리적인 검사로부터 시민을 보호할 수 있다.”(<미국의 사법제도>, 미국 국무부 펴냄) 재기소된 유우성씨의 1심 재판이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됐는데, 배심원 과반이 공소권 남용이라고 판단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1심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검찰의 공소권 남용에 대해 법원이 감시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할 뿐만 아니라,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민주적 통제 제도의 도입도 고려할 만하다. 국민이 위임한 막강한 공권력을 사적 감정과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민주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행위에 대한 개별적 책임도 철저히 물어야 마땅하다.

검찰의 공소권 남용은 유우성씨 사건에 그치지 않는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고발 사주’ 사건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검찰이 검찰총장과 그 가족·측근의 비위 의혹을 제기한 정치인·언론인들을 콕 집어 고발장을 쓰고 이를 야당에 전달해 고발하도록 하는 것은 유우성씨 재기소와 닮은꼴의 수사·기소권 남용이다. 검찰의 수뇌부인 대검찰청이 그런 일을 주도했다면 검찰의 존재 기반을 흔드는 엄중한 사안이다. 고발 사주 사건에 등장하는 고발장과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실제 고발이 실행되고 기소까지 이뤄진 최강욱 열린민주당 대표의 항소심 재판에서 법원은 “고발 사주 사건의 사실관계가 확인된 다음에 판단을 내리겠다”며 공판을 미뤘다. 수사·기소 과정의 부적절성을 살펴보겠다는 뜻이다. 이 사건이 제2의 공소권 남용 인정 판결로 이어질지 지켜볼 일이다.

박용현 논설위원 piao@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과 박근혜, 그 불길한 도돌이표 1.

윤석열과 박근혜, 그 불길한 도돌이표

[사설] 해병대 수사 외압, 대통령실 언제까지 숨길 순 없다 2.

[사설] 해병대 수사 외압, 대통령실 언제까지 숨길 순 없다

[사설] 공수처장 공백 방치 윤 대통령, 지명 않는 이유가 뭔가 3.

[사설] 공수처장 공백 방치 윤 대통령, 지명 않는 이유가 뭔가

“1919년 대한민국 건립” 외친 이승만이 ‘건국의 아버지’라니 [왜냐면] 4.

“1919년 대한민국 건립” 외친 이승만이 ‘건국의 아버지’라니 [왜냐면]

한동훈과 게임의 법칙 [뉴스룸에서] 5.

한동훈과 게임의 법칙 [뉴스룸에서]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