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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최재봉의 문학으로] 문학으로 무얼 할 수 있을까

등록 2014-12-04 18:44수정 2015-08-04 00:47

최재봉 문화부 선임기자
최재봉 문화부 선임기자
‘문학으로’ 무얼 할 수 있을까. 새로 시작하는 칼럼 제목을 정하고 나니 문학의 쓰임이랄까 구실에 대한 새삼스러운 궁금증이 생겨났다. 문학의 위상과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것은 더 이상 뉴스가 아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문학작품을 쓰고 읽는 까닭은 무엇일까. 문학은 과연 어디에 소용이 닿는 것일까. 고민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 <한겨레> 3일치 ‘녹색삶’ 섹션 머리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경기 군포 여성회관 한글교실에 다니는 할머니들의 시화전 소식이었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한글을 처음 배우기 시작해 그로부터 3년 만에 시집을 내기까지 한 진효임(73) 할머니의 선례가 본보기와 자극이 되었다고 했다. 비록 소박하고 서투를망정 제 삶의 갈피에서 건져올린 시편들이 곡진해서 미뻤다.

하루 전인 2일 밤 <한국방송> 제1텔레비전 특집 ‘세상을 바꾸는 생각, 후마니타스’에서도 비슷한 사연이 소개되었다. 경북 칠곡 어로리 할머니들이 뒤늦게 글을 배우고 내처 시를 쓰기에 이르렀다는 거였다. 전쟁통에 같이 피난 갔던 동네 총각과 결혼해 살고 있는데 팔십이 다 되도록 영감이 좋다는 고백, 자식처럼 키운 고추 값이 “헐해서 파이다”라는 탄식 등 한결같이 절창이었다. “마음에 담고 있던 그림자 같은 말을 공책에 옮겨 적어 놓으니 그게 시도 되고 작품도 되더라”는 오승주(68) 할머니의 말은 문학의 본질에 직핍하는 통찰이 아니겠는가.

신문 기사와 방송 프로그램만이 아니었다. 때맞추어 배달된 책 한 권이 역시 눈길을 끌었다. 경남 밀양 얼음골에 사는 여든다섯살 박시례 할머니의 시문집 <황혼의 오솔길>이었다. 진주여고 출신 엘리트였으나 전쟁통의 부역 혐의 때문에 감시와 차별에 시달린 할머니는 산속으로 들어가 송진을 벗기고 약초를 캐거나 버섯을 키워 파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야 했다. 지금은 사과 과수원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그 사이 남편과 둘째딸이 먼저 세상을 뜨는 아픔도 겪었다. 할머니에게 문학은 신산한 삶과 화해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우람스런 고목 한 그루/ 하늘 높이 뻗어 올라간 기상/ 연륜은 세월을 잊은 듯/ 의연히 버티고/ 온갖 풍상 다 겪었을 생명!// 너의 뿌리는 얼마나 고되게 살아왔을까?/ 이 많은 가지와 잎들을 먹여 살리느라/ 얼마나 깊은 땅속 파고 들어가/ 지혈과 온갖 자양을 빨아들여/ 저 우람한 나무를 일구었느뇨?”(‘고목과 뿌리’ 부분)

어르신들이 흔히 하는 말 가운데 ‘내 살아온 얘기를 글로 쓰면 책으로 열 권도 넘는다’는 것이 있다. 그만큼 사연이 많고 곡절이 깊다는 뜻이겠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글과 책으로 풀어내야 비로소 쌓인 응어리가 풀리겠다는 뜻으로 새겨지기도 한다. 노인이란 한 사람 한 사람이 이야기보따리이자 문학의 보물창고 아니겠는가.

이와 관련해 문흥술 서울여대 국문과 교수가 <유심> 11월호에 기고한 ‘고령사회와 노인문학의 과제’라는 글이 눈길을 끈다. 문 교수는 이 글에서 “상품물신주의, 물질만능주의, 출세지향주의” 같은 지배 담론에 매몰된 채 평생을 살아온 우리 시대 노인들이 나이가 들어 주변부로 밀려나면서 “지독한 무력감과 공허감에 빠지”게 된다면서 그런 노인들에게 문학이 치유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짚었다. “‘좋은’ 문학작품은 지배 담론에 길들어 비인간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진정 인간다운 삶을 위해 되찾아야 할 타자가 무엇인지를 강렬하게 일깨워준다.” 그 문학의 주체가 꼭 노인일 필요는 없으리라.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가서, 문학으로 무얼 할 수 있을까. 박시례 할머니의 말을 빌리자면 “자신을 속이지 않고 가슴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마음의 소리를 듣고 행하는 것”이 바로 문학이라고 하면 어떨까.

최재봉 문화부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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