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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한국판 골드만삭스’라는 헛된 꿈 / 박현

등록 2020-02-23 18:17수정 2020-02-24 09:32

박현 ㅣ 경제팀 기자

2006년 2월 정부는 사모펀드를 활성화하고, 대형 투자은행(IB)을 만들겠다며 금융의 칸막이를 없애는 ‘자본시장통합법’ 제정안을 냈다. 정부는 당시 미국의 골드만삭스 같은 한국판 투자은행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라고 홍보했다. 법안은 우여곡절 끝에 2009년 통과됐고, 그 후속조처로 종합금융투자사, 헤지펀드 등을 잇따라 허용했다. 외환위기 당시 마치 하이에나처럼 냉혹했던 외국계 금융기관들에 휘둘렸던 쓰라린 경험을 한 터라 거의 모든 언론들이 이를 환영했다.

10여년이 지난 지금, 과연 제대로 된 투자은행이나 헤지펀드, 사모펀드가 만들어지고 있을까. 지난해 여름 이후 파생결합펀드(DLF) 손실 사태와 헤지펀드 업계 1위 라임자산운용의 펀드 환매중단 사태를 겪으면서 ‘한국판 골드만삭스’라는 목표는 헛된 꿈이 아니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금융당국은 자본시장을 키우기 위해선 금융회사들의 자율과 창의성에 맡기는 게 중요하다며 정부 개입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설계도를 그렸다. 대신에 사모펀드 운용사의 등록 요건을 풀어주면서, 대형 증권사들에 ‘프라임 브로커’ 자격을 부여해 이 운용사들에 자금 대출뿐 아니라 위험관리를 하도록 했다. 또한 은행들은 판매사로서 고객을 대신해 상품 리스크를 점검하도록 했다. 그런 자율 속에서 대형 금융회사들로 성장하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한국형 헤지펀드 설계에 관여했던 한 전문가는 “대형 증권사에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헤지펀드 운용사들을 인큐베이팅하면서 동시에 위험도 관리하는 사회적 기능을 부여했는데 이게 작동하지 않았다”며 전형적인 ‘시장의 실패’라고 지적했다. 대형 은행들은 파생상품의 위험성을 거의 모르는 고령층에게 고수익을 남겨주겠다고 유혹해 외국 금리 연계 상품을 팔아먹었다. 이번 사태들을 들여다볼수록, 운용사와 증권사, 은행이 모두 한통속이었다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금융회사들은 수수료를 챙기려는 탐욕에 눈이 멀어 정작 가장 중요한 고객 이익은 뒷전으로 미뤘다.

더 큰 문제는 금융당국이 시장의 이런 일탈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디엘에프는 상품이 모두 팔리고 피해 고객들이 민원을 신청하고서도 몇달이 지나서야 대응에 나섰다. 라임 사건은 지난해 6월 운용사의 이상징후를 포착하고도 이어지는 편법·불법적 행위를 막지 못했다. 금융당국의 무능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장면들이다.

그런데도 당국자들은 사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보다는 축소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는 데 급급하다. 금융위원회는 상당수 언론들이 이번 사태를 2015년 대대적인 사모펀드 규제 완화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한 데 대해, “모든 규제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후에 발생한 사고로 제도 개선의 적정성 여부를 재단하기 어렵다”며 정책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다만 “일부 미비점이 발견되어 보완한다”고만 밝혔다. 이런 당당한 설명을 듣다 보면, 금융당국이 금융회사의 일탈을 알면서도 자본시장 육성이라는 ‘대의’를 위해 일부러 눈을 감았을 수도 있다는 의심마저 든다.

이 분야의 전문가들도 우리나라 사모펀드 규제가 금융 선진국에 견줘서도 미흡했다고 지적한다. 미국의 경우만 해도 헤지펀드의 레버리지(차입) 유형이나 비율 같은 정보들을 금융당국에 상세히 보고하도록 돼 있으나,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 자율을 보장하되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는 최소한 알 수 있도록 안전장치를 뒀어야 했는데, 그마저도 풀어버린 게 문제였던 셈이다.

금융에서 신뢰는 생명수나 마찬가지다. 고객은 금융회사가 믿을 만하다고 생각해야 소중한 재산을 맡길 수 있기 때문이다. 금융회사들이 자신들의 이익만 탐하고, 심지어 사기까지 친다는 이미지가 각인된다면 자본시장 육성의 꿈은 요원할 것이다. 금융당국은 자본시장을 속성 재배하겠다는 과욕을 부릴 게 아니라, 잃어버린 고객의 신뢰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지부터 더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hy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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