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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읽기] 어덜츠플레인 / 전상진

등록 2020-02-23 18:22수정 2020-02-24 02:39

전상진 ㅣ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

어덜츠플레인(adultsplain): 성인(adult)과 설명(explain)의 합성어.

칼럼의 제목과 시작을 영어로, 그것도 신조어로 시작하는 게 부담스럽다. 그러나 가장 큰 두 정당이 발표한 제1호 총선 공약을 보니 그렇게 시작할 수밖에 없다.

어덜츠플레인은 맨스플레인을 변주한 것이다. 원저자를 언급할 필요 없이 많은 시민의 단어장에 이미 수록된 맨스플레인은 ‘어떤 사안에 대해 여성들은 잘 모를 것이라 지레짐작하는 남성들이 아는 체하면서 설명하려는 행위’, 말하자면 남성우월주의에 근거해서 여성을 차별하는 행위다. 어덜츠플레인은 맨스플레인의 구조를 그대로 따르지만 주체와 대상을 다음과 같이 변주한다. ‘어떤 사안에 대해 아이들(청소년과 청년을 포함해서)은 잘 모를 것이라 지레짐작하는 성인들이 아는 체하면서 설명하려는 행위’, 말하자면 성인우월주의에 근거해서 아이를 차별하는 행위다.

더불어민주당의 제1호 총선 공약은 ‘무료 와이파이의 확대’다. 와이파이를 공공재로 만들어 ‘사회 취약계층의 정보격차 해소와 20~30대 청년층의 통신비 절감을 골자’로 한다. 일단 와이파이를 공짜로 쓸 수 있으니 좋은 일이긴 한데 그것으로 청년층의 표심을 사로잡을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미래통합당의 제1호 총선 공약은 더 선명하다. 새로운 보수층이랄 수 있는 20대 남성을 겨냥해서 ‘군인 장병에게 한달에 2박3일 외박’할 수 있도록 하겠다. 참으로 먹음직하다.

두 당의 지금껏 행태를 보면 서로 달랐다. 가령 18살 선거권, 그러니까 선거권 연령 하향 조정을 민주당은 추진했고 통합당은 끝까지 반대했다. 물론 젊은이가 미워서 그런 건 아니겠지. 배움에 힘써야 할 아이들이 애먼 데 관심을 둘 수 있다는 걱정, 더불어 추한 정치판으로부터 순수한 아이들을 보호하겠다는 당혹스러운 배려심도 있었을 거다. 아무튼 두 당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 가지 점에서 의기투합한다. 와이파이 공짜로 쓸 수 있게 해주거나 외박을 늘려주면 청년들이 우리에게 투표해주겠지. 정말이지 청년들을 참 쉽게 본다.

아이들을 쉽게 보는 행태가 정치권만의 풍토병은 아니다. 온 나라에 퍼진 국가적 풍토병이다. 이를테면 ‘가족 동반자살’은 가족 안에서 벌어질 수 있는 성인우월주의의 범죄적 절정이다. 사실 가족 동반자살은, 백종우 경희대병원 교수가 <서울신문> 칼럼에서 말한 바처럼, 잘못된 표현이다. 그것은 ‘자녀를 살해한 뒤 자살’하는 “살인이며 최악의 아동학대” 범죄다. 물론 성인 가해자가 ‘자식을 걱정하는 마음’이 슬쩍 엿보인다. 부모 없이 거칠고 험한 세상을 어찌 살아낼 수 있을까. 그런 면에서 사회안전망이 부실하다는 고발일 수도 있고 부모에 의해서 많은 것이 결정되는 신분 사회를 비판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당신 생각이지. ‘살해 후 자살’에는 어덜츠플레인, 즉 아이가 자신의 소유물이나 부속물이라는 지레짐작이 깔려 있다.

아이들을 성인의 소유물, 부속물, 대리인(내가 못한 걸 네가 이뤄내야 해)으로 간주하는 성인우월주의는 가족, 학교, 회사, 지역사회, 사회 전체의 모든 일상과 궤적에 스며 있다. 우리 성인보다 어리고 젊은 아이들은 부족한 존재이기에 그들의 요구나 욕망이나 의견 따위에 귀 기울일 필요 없다. 우리도 예전에 그런 거 다 겪었잖아. 그렇지만 우리는 이제 알지. 그것이 한때라는 걸. 잠깐만 참으면 되는데 그걸 못해? 어른이 되면 다 할 수 있다고.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게 얼마나 많은데. 공부라는 게 다 때가 있는 거잖아. 그걸 놓치면 계속 후회해. 정말로 아이들을 위한다면 삿된 요구나 욕망에 휩쓸리지 않도록 계도하고 보호해줘야 하는 거야.

아이들에 대해 성인들이 느끼는 근거 없는 우월감, 그에 공명하는 규범과 제도는 아이들의 성장 기회를, ‘이제껏’과 구별되는 변화와 혁신의 가능성을 위축시킨다. 물론 아이들 스스로 나름의 길을 꾀하는 성장이, 그들이 이뤄낼 변화가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니겠지. 그래서 아슬아슬하다. 그러나 우리가 해온 것, 해놓은 것도 마찬가지다. 좋은 면이 있으면 나쁜 면도 있는 것이다. 좋은 건 이어가고 나쁜 건 끝내는 게 마땅하다. 이를 위해 아이들을 파트너로 인정해야 한다. 서로 대화하고 협상하면서 좋은 면은 잇고 더하며, 나쁜 면은 자르고 빼는 절충을 해야 한다. 어덜츠플레인의 문제를 자각하는 건 그로 향하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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