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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 읽기] 디지털 성범죄에 올리는 반성문 / 류영재

등록 2020-03-29 11:18수정 2020-03-30 14:56

[세상읽기]

류영재 ㅣ 대구지방법원 판사

‘디지털 성범죄’라는 표현이 많이 들린다. 아동·청소년을 포함한 피해자들을 성적으로 학대하고 착취한 불법영상이 디지털 매체를 통해 제작·유포되었고, 이를 수만명이 즐겼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자행된 성착취의 수위가 높고 인권유린을 실시간으로 즐긴 자들의 수가 많아 사회 전체가 충격과 공포에 질려 있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충격과 공포에 질릴 자격조차 없을지 모른다. 특히 판사인 나는 더욱 그렇다.

디지털 성범죄라는 표현은 어제오늘 갑자기 등장하지 않았다. 수년 전부터 여성들은 온라인에서 퍼지는 성착취 및 불법촬영물 제작·유포·재생·소지의 위험에 대해 목소리를 높여왔다. 이에 대해 법원을 비롯한 공권력은 이렇게 답해왔다. ‘국외 서버를 통하기 때문에 추적이 불가능하고 유포된 영상을 삭제하기도 어렵다, 음란물을 즐길 사생활의 자유를 규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젊은 날의 치기 어린 실수에 불과하다, 강간이나 강제추행만큼 심각한 범죄는 아니지 않은가.’ 부실하게 입법하고 가볍게 기소했으며 약하게 처벌했다. 피해 회복엔 소극적이었고 피해자의 목소리는 듣지 않았다. 이처럼 공권력이 디지털 성폭력을 ‘가벼운 음란물 유포죄’인 양 취급한 기간 피해자들은 성적 대상으로 물화되며 고통받았다. 더러는 삶을 포기했다. 그런 피해자들과 연대하고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표현이 ‘디지털 성범죄’다.

디지털 성범죄는 가상 공간에서 가상의 캐릭터에게 가상의 해를 입히는 가상의 범죄가 아니다. 현실 공간에서의 가해와 디지털 공간에서의 가해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고, 디지털 공간에서의 가해가 현실 공간에서의 피해로 즉시 이어진다. 계정 해킹 등을 통한 신상정보 유출, 디지털 매체를 통한 각종 협박·유인·기망, 현실 공간에서의 각종 성학대 및 불법 촬영, 디지털 공간에서의 성착취 결과물 판매·유포·재생·소지가 연속적으로 일어난다. 피해는 한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성착취의 결과물이 유포되고 확산되기 때문에 피해자들은 언제 어디서 그 결과물이 자신의 삶에 나타나게 될지 몰라 고통받게 된다. 이 모든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인권은 극도로 유린된다. 지극히 ‘현실적인’ 피해와 고통이다.

따라서 디지털 성범죄는 단순히 ‘야한 동영상을 뿌리고 돌려 보는’ 차원의 범죄가 아니다. 성착취 결과물과 ‘야한 동영상’은 구분되어야 한다. 치기 어린 실수, 주체 못할 성욕의 결과도 아니다. 디지털 성범죄의 본질은 ‘음란’이 아니라 ‘지배와 폭력’이기 때문이다. 강간 등 신체접촉 성범죄에 비해 가벼운 범죄도 아니다. 성착취 과정에서 가상과 현실은 분리되지 않고, 피해자의 인격권은 현실적으로 심각하게 침해되기 때문이다. 디지털 성범죄는 신체접촉 성범죄에 비견되는 별도 유형의 중대한 성범죄로 인식되어야 한다.

인식의 전환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피해자의 목소리다. 지금껏 범죄가 인지되는 순간 그 중심엔 가해자가 들어섰다. 피해자는 범죄를 설명하는 등장인물 또는 증인이라는 입증의 수단으로 전락하여 형사사법 절차에서 소외되었다. 그들의 삶은 납작하게 그려지고 피해 회복 및 지원은 뒷전으로 밀렸다. 사람들은 ‘피해자다움’을 제멋대로 상상하고 급기야 피해자가 그 상상에 맞춰질 것을 요구하게 되었다. 피해자 품성·행실론, 피해자의 동의론 등이 나오게 된 원인 중 하나다.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모든 형태의 주장은 잘못되었다. ‘성착취를 당해도 싼 행실’이란 존재하지 않고, 노예제도를 극복한 지금 인권유린에 대한 동의나 계약은 유효하지 않기 때문이다(나아가 디지털 성범죄 과정을 살펴보면 동의나 계약은 모두 협박과 기망에 따른 것에 불과하다). 즉, 피해자는 피해자일 뿐이다.

지금껏 법원은 디지털 성범죄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낮은 양형에 대해 법정형을 형해화하고 디지털 성범죄를 경범죄로 만들었다는 비판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안이한 인식과 형사재판 절차에서의 피해자 소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판사인 나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동안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인식 전환 내지 피해자의 형사재판 참여 실질화를 위해 노력하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반성문이다. 사실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을 보면서 내내 판사로서 사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심으로 사죄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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