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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읽기] 흔들려선 안 되는 것들 / 류영재

등록 2020-05-24 18:22수정 2020-05-25 13:32

류영재 ㅣ 대구지방법원 판사

법관으로 임용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법원은 큰 비판에 직면했다. 영화 <도가니>에서는 아동 대상 성범죄자들에게 가벼운 형을 선고한 이유로 판사들의 부패를 꼽았지만, 실제 사안에서 문제가 된 지점은 따로 있었다. 바로 ‘중범죄의 경우 피해자와의 금전 합의를 이유로 형을 얼마나 낮출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다. 법원은 피해자와의 금전 합의를 감형의 중요한 요소로 인식하고 있으며 중범죄에 있어서도 종종 가벼운 형을 선고한다.

형사사법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피해자의 정의 획득, 즉 진상규명과 공적 책임추궁이다.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피해자가 피고인의 처벌을 원하지 않을 경우 피고인을 처벌해야 할 필요성이 낮아진다. 한편, 우리 형사사법 체계에서는 피해자의 처벌불원이 주로 ‘금전 합의’와 동일시된다. 피해자가 피해를 금전적으로 보상받는 대신 피고인에 대한 처벌불원 의사를 재판부에 알려 주는 것이다.

위 두 가지 상황이 결합된다. 피해자와의 금전 합의는 피해자의 처벌불원 의사표시가 되고, 피해자가 처벌을 불원하니 가해자에 대한 처벌 필요성이 낮아진다. 그 결과 가벼운 형이 선고된다. 이러한 양형 관행은 법원에서 정책적으로 유도되기도 했다. “피해자에게는 금전적 보상이 필요하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피해자가 가해자로부터 금전적 보상을 받기는 어렵다. 그러니 피해자와의 금전 합의를 양형에 크게 반영하여 가해자로부터 즉각적인 금전적 보상을 이끌어내자. 이것이 진정으로 피해자를 위하는 형사사법이다.”

위 정책적 의도가 악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당 부분 수긍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년간 ‘법원이 피해자와의 금전 합의를 이유로 가벼운 형을 선고하는 관행’은 비판받고 있다. 선한 의도가 생각지 못한 부작용을 양산했기 때문이다.

일단 금전 합의와 처벌불원 의사가 동일시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피해자는 금전적 보상을 받은 권리를 처벌불원, 즉 용서할 권리와는 별개로 가져야 한다. 그러나 ‘금전 합의=처벌불원’의 공식하에서는 피해자의 모든 권리가 금전적 보상을 받을 권리 하나로 수렴된다. 용서가 금전적 합의로만 여겨지다 보니 피고인들도 억울하다. “판사님, 피해자와 합의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피해자가 합의 기회를 주지 않거나 너무 많은 합의금을 원합니다.” 피해자가 돈독 오른 심술쟁이로 둔갑하게 되는 순간이다. 일부 피해자는 처벌불원하지 않으면 금전보상을 받지 못할 줄 알라며 협박당하고, 일부 피해자는 모두를 위해 합의를 하라고 강요당한다.

더 큰 문제는 중범죄에 있어서도 피해자와의 금전 합의 및 처벌불원을 이유로 가벼운 형을 선고하다 보니 우리 사회에 중범죄를 경범죄로 가리키는 시그널을 주게 된다는 점이다. 범죄에 대한 감각은 범죄 당사자들만이 전유하지 않는다. 공동체에서 어떠한 인권침해가 일어나는가, 피해를 어떻게 회복시킬 것인가, 어느 정도의 인권침해가 중범죄로서 예방되어야 하는가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일일 수밖에 없다. 처벌 수위는 공동체 내에서 특정 범죄를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대한 중요한 가늠자가 된다. 중범죄로 다룰수록 공동체 내 경각심은 높아지고 재발 방지에 집중하게 된다.

피해자의 권리를 금전배상에 대한 것으로 좁히고, 중범죄의 경우에도 피해자가 처벌불원한다는 이유만으로 가벼운 형을 선고하는 것이 타당한가.

이러한 문제의식은 비단 국가 내 사인 간 범죄에서만 유효하지 않다. 국가 단위로 벌어지는 대규모 인권침해에 있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2005년 유엔 회원국이 만장일치로 채택한 피해자 권리 기본원칙에 따르면 피해자의 권리 중 금전배상에 대한 부분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한편, 대규모 전시성 범죄에 해당하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인류 공동체가 직면하고 재발을 금지해야 할 중대한 인권침해 사안이다. 중대한 인권침해는 중대한 인권침해처럼 다루어져야 한다. “진상규명, 공적 사죄 및 책임, 공적 기록의 보존과 역사 왜곡·은폐의 금지, 올바른 교육, 이를 통한 진정한 용서와 화해의 과정”이 피해자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포기할 수 없는 가치가 되는 까닭이다.

“피해자의 경제적 피해 회복의 길이 현실적으로 요원하니 중범죄를 경범죄로 다루어서라도 신속한 금전보상을 꾀하자”는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돌이켜볼 시점이다. 흔들려선 안 되는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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