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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숨&결] 후배권력이라 말하지 않겠다 / 김선기

등록 2020-08-05 16:08수정 2020-08-06 02:41

김선기ㅣ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연구원

2002년 ‘노풍’의 주역으로 386세대가 지목되었을 때, 2004년 탄핵 역풍을 타고 그 세대가 대거 국회에 진출했을 때, 윗세대는 ‘386세대’라는 말에 필적할 만한 신조어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했다. ‘낀세대’라는 직관적인 표현에서부터, ‘475세대’(40대, 70년대 학번, 50대), ‘와인(WINE)세대’라는 말(Well-Integrated New Elder의 줄임말로, 와인처럼 잘 숙성된 어른 세대를 지칭함)까지. 386세대에 동일시할 수 없는 나이의 ‘기성세대’를 부당하게 밀려난 어른으로 다시 호명하면서, 그들의 불안 정동을 정치적 자원으로 활용하려 시도했다. 부당하게 밀려났다는, 늙은이들 이야기는 들어주는 이 없다는 마음은 여전히 태극기 집회와 같은 장소에 남아 있지만, 86세대가 세상의 주류로 떠오르는 커다란 흐름을 막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하지는 못했다.

이런 역사 하나를 알고 있어서일까. 최근 화제가 된 ‘후배권력’이라는 말을 보고, 화가 난다기보다는 조금 슬픈 마음이 들었다. 한 언론사의 고참 기자가 개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에 “후배권력의 전횡”을 주장했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후배권력이라는 단어에 공명하고 있었다. 이 공명은 한 조직의 내부 문제 그 이상의 ‘세대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정치권에서도 ‘청년’만 너무 대우해주고 선배세대의 경력이나 경험을 너무 무시한다는 ‘비판’이 연일 나오고, 왜 청년정책만 있고 중년정책은 없느냐는 볼멘소리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90년대생에 맞추어 가자’는 목소리는 점차 ‘90년대생이 뭔데 따라야 하느냐’는 쪽으로 트렌드가 바뀌고 있다.

후배권력이라는 의아한 조어는 소위 ‘민주화세대’가 어떤 성격을 가진 시민인지를 잘 드러낸다. 평생을 부당한 권력과 싸워왔고, 지금도 ‘언론권력’, ‘검찰권력’ 등과 싸우고 있는 그들의 운동 전략은 언제나 적을 ‘권력’으로 규정해왔다. 그 반대편에 있는 ‘우리’를 무결한 피해자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항하는 능동적인 주체로 위치 지을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전략이다. 독재정권이라는 조건 속에서 당시의 시민들이 발휘할 수 있었던 놀라운 역량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역량이 동시에 한계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점차 인식된다. 의견이나 성향이 다른 모든 세력에게 ‘권력’이라는 표현을 덧씌울 때 특히 그렇다. 독재권력에 저항하기는 시민 대다수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지만, 이를테면 ‘후배권력’, ‘소수자권력’, ‘대중권력’에 대한 저항은 그렇지 않다. 편 내부에서는 세력을 다지는 계기로 쓸 수 있겠지만, 바깥으로 나가면 우스움을 사거나 애잔한 마음의 대상이 될 뿐이다.

누군가 쓴 댓글을 봤다. 너희도 20년 뒤에 후배권력에 의해 밀려나는 아픔을 똑같이 겪어보라고. 역사는 반복되고 인간의 수명은 짧으니까, 분명 그날이 아주 빨리, 분명하게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모든 반복에는 차이가 있으며, 내가 더 쉽게 바꿀 수 있는 건 언제나 남이 아니라 나다. 그래서 스스로 이렇게 다짐하겠다. 나에게 세대적 동질성을 느낄 동료 시민들에게 미리 보내는 제안이기도 하다. 이제 내가 ‘기성’, ‘나이 든 사람’으로 여겨진다는 걸 알고 불안해질 날이 분명 올 것이다. 다른 가치관을 역설하는 미래세대가 떠오르기 시작할 것이고, 뭘 모르고 말하는 ‘애들’처럼 보일는지도 모르겠다. 쉽게 물러서지는 않겠다. 그러나 그들을 ‘어린애’ 취급하거나(‘구상유취’) 이상한 조어로 싸잡지(‘후배권력’) 않겠다. 논리를 먼저 내려놓으면 스스로 패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선배, 동료, 후배 모두를 나이와 경력 이전에 동등한 동료 시민으로서 대우하겠다. 이 판에 내가 20년, 30년 있었는데 ‘내가 내 소개를 해야 해?’ ‘아직도 다과를 내가 준비해야 해?’ 하는 생각이 들더라도, 나를 모르는 사람에게 먼저 인사하겠다. 다과 준비와 행정 실무도 함께 하겠다. 하지 않으면 세계가 돌아가지 않는 중요한 업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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