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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홍세화 칼럼] 내 아버지는 아나키스트였다

등록 2020-09-17 15:38수정 2020-09-18 02:39

소고기에 특1등급, 1·2등급이 매겨지듯, ‘전교 1등’ ‘1등급’ ‘9등급’으로 매겨지고 서열화된 대학과 학과 입학에 따라 자기 위치를 스스로 규정한다. 이렇게 과거 봉건시대의 신분제처럼 세습 질서가 자리 잡은 곳에 청년의 설렘과 떨림이, 이상과 열정이 설 자리가 있겠는가.

내 아버지는 아나키스트였다. 백년 전인 1920년에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난 청년은 아나키즘에 의식세계가 흔들리는 경험을 했다. 도쿄 부두 잡역부로 하루 일해 이틀 살면서 크로폿킨의 <청년에게 고함> <상호부조론>을 일본어로 읽었다. 반지배주의자, 평화주의자로서 신념은 해방 후 결혼해 얻은 첫아들의 이름을 세계평화를 줄여 ‘세화’라고 짓게 했다. 마침 자식 항렬의 돌림자가 ‘화(和)’자였다. 아나키스트는 전쟁과 분단의 거친 회오리바람 속에서 패배자의 삶을 살았다. 세월이 흐른 뒤 한 출판사 편집자가 아들에게 <청년에게 고함>을 한국어로 번역해달라고 요청했다. <청년에게 고함>은 크로폿킨이 애당초 프랑스어로 썼던 팸플릿이다. “아니, 이젠 추종세력도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인물이 19세기 말에 유럽 청년들에게 던졌던 발언을 지금 여기서 누가 관심을 가지겠는가?” 의아해하는 아들의 반문에 편집자는 “역사성을 가진 책은 한국어 번역본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아들이 번역을 마치고 책이 출간된 2014년, 아흔네 살 아버지는 아나키스트였던 젊은 시절의 증거물인 아들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독자는 칼럼 서두에 사적인 이야기를 펼친 것을 용서해주기 바란다. 왜였을까, 느닷없이 <청년에게 고함>이 아나키스트 아버지의 젊은 모습과 함께 떠오른 것은? 대중의 무관심 또는 능멸의 대상이 된 사회주의에 대한 애달픔에,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늦어진 전교조 합법화와 의사들의 집단진료거부 사태가 뇌리에서 뒤엉긴 탓일까. 가장 강력한 상념은 삶이라는 거대한 도전 앞에서 설레고 떨리고 흔들리는 청년 정신의 소멸에 대한 것이었다. ‘아빠 찬스’ ‘엄마 찬스’의 수혜자에서 방황과 번민의 젊은 시절을 욕망 소비로 대체한 채 ‘아빠 찬스’ ‘엄마 찬스’의 제공자로 대물림하는 사회가 돼버린 게 아닌가라는 물음이다.

내 우려대로 별 반응을 얻지 못해 출판사에 손해를 입혔을 <청년에게 고함>은 아나키즘보다 사회주의를 강조한 책이다. 크로폿킨은 이 작은 책자에서 노동자는 물론이고 교사, 의사를 지망하는 청년들에게도 왜 사회주의자가 되어야 하는지 역설했다. <동의보감>이 “지금 의사는 오직 사람의 병만 다스리고 마음은 고칠 줄 모르니 이는 근본을 버리고 말단만 쫓는 격이며, 그 근원을 캐지 않고 말류만 손질하는 것이다”라고 썼다면, 크로폿킨은 “사람의 병만 다스리고 사회는 고칠 줄 모르니…”라면서 사회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식이다.

나는 언감생심, 오늘 이 땅의 의사와 교사에게 사회주의자를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청년은 청년이어야 하지 않는가. 당시 유럽 청년들이 크로폿킨의 말에 귀 기울였다면, 지금 여기는 사회주의는 물론 그 어떤 이상(理想)도 들을 청년이 없지 않으냐고 말하려는 것이다. “나는 이 사회 안에서 어떻게 자아를 실현할 것인가”의 물음 앞에서 잠 못 이루고, 쳇바퀴 도는 일상 속에서도 불현듯 “과연 이렇게 사는 게 최선인가?”라고 고민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밤이 없다면 젊음이라고 할 수 없다.

의대생들이 국가시험을 집단거부했다. 그것은 이른바 4대 의료정책(의대 정원 확대, 공공의대 설립, 한방첩약 급여화 시범사업, 비대면 진료 육성)에 대한 문제점을 공화국의 출발 정신인 공공성의 시각에서 비판한 게 아니라, ‘전교 1등’들이 누리는 특권에 작은 변화도 용납할 수 없다는 집단의지의 표현이었다. 대한의협 산하 의료정책연구소는 ‘A=전교1등 의사’와 ‘B=성적이 모자란 공공의대 출신 의사’ 중에서 누구를 선택할 것이냐고 물었다. 내가 ‘B=성적이 모자란 공공의대 의사’를 택하는 것은 오기 때문이 아니다. “의술(醫術)은 인술(仁術)”이기 때문이며,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기를 기대할 수 있는 쪽은 A보다 B이기 때문이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물음에 의대생들이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이 더 절망적이었다. 그들에게서 젊음을 느낄 수 없었다. ‘휴거’ ‘임대충’ ‘이백충’이라고 놀리고 ‘조물주 위 건물주’를 지망하는 초등학생한테서 어린이를 느낄 수 없듯이.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네 자식이 피부색이 아닌 캐릭터의 내용으로 평가되는 나라에서 사는 꿈이 있습니다.” 마틴 루서 킹 목사의 꿈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캐릭터에는 관심이 없다. 높은 구매력을 보증하는 부모의 문화자본과 경제력에 기대어 획득한 학위와 자격증이 가장 값지다. 각광받는 분야는 의료, 법률, 경영 컨설팅, 금융, 아이티(IT) 분야다. 그리하여, 청년들의 꿈과 열정은 부모 역량에 힘입은 성적순의 배치 앞에서 무산되었다. 이과 ‘전교 1등’은 의사, 문과 ‘전교 1등’은 법률가, 그다음 경영, 금융, 아이티 분야가 선점되고, 교사도 1등급이 아니면 꿈꾸지 못한다. 소고기에 특1등급, 1·2등급이 매겨지듯, ‘전교 1등’ ‘1등급’ ‘9등급’으로 매겨지고 서열화된 대학과 학과 입학에 따라 자기 위치를 스스로 규정한다. 이렇게 과거 봉건시대의 신분제처럼 세습 질서가 자리 잡은 곳에 청년의 설렘과 떨림이, 이상과 열정이 설 자리가 있겠는가. 불평등 세습에 공모했다면서 자신을 고발한 매슈 스튜어트는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귀족 계층인 능력자 계층은 다른 사람들의 자녀를 희생양 삼아 부를 축적하고 특권을 대물림하는 오래된 술책을 터득했다. (줄임) 하지만 우리가 벌이고 있는 이런 종류의 게임에서는 결국 모두가 처참하게 패배한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명백한 사실이다.”

전교조에 법외노조의 굴레를 푸는 길은 아주 간단했다. 문재인 정권이 ‘노조 아님 통보’를 직권으로 취소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전교조는 법률가 집단, 의사 집단에 비해 힘이 없다. ‘전교 1등’ 출신이 아닌데다 감히 노동조합이기 때문이다. 이젠 ‘1등급’ 출신 교사들이 충원되지 않아 생물학적으로 젊음을 잃었다. 3, 4년 전부터 민주시민교육이 운위되고 있는데, 정작 교사에겐 정치적 시민권이 없다. 역대 기득권 세력은 분단체제 아래 “철학은 프롤레타리아한테서 물질적 무기를 발견한다면, 프롤레타리아는 철학에서 정신적 무기를 발견한다”는 마르크스의 말에 담긴 정신적 무기의 아주 작은 가능성도 용납하려 들지 않았다. 176석의 민주당은 국제노동기구(ILO)의 요구대로 공무원과 교사들에게 정치적 시민권을 주어야 마땅하다. 그러면 이 사회의 청년은, 그리고 정신은 꿈틀댈 수 있을 것이다.

(뱀발: 아나키스트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이름을 민족평화를 줄여 ‘민화’라고 지었다. 곧 6·25 전쟁이 터졌고 첫돌 전에 병들어 죽었다. 아나키스트 아버지가 남겨준 이름, 그것은 나에게 버거우면서 기꺼운 짐으로 작용했다.)

홍세화 l 장발장은행장·‘소박한 자유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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