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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인생에서 가장 불행한 나이는 몇살일까

등록 2020-09-23 15:14수정 2020-09-24 02:08

미국 경제학자 데이비드 블랜치플라워 교수가 제시한 인생의 행복곡선. 47~48살을 최저점 삼아 반등한다.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미국 경제학자 데이비드 블랜치플라워 교수가 제시한 인생의 행복곡선. 47~48살을 최저점 삼아 반등한다.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누가 누가 제일 불행할까? 그 유명한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처럼 저마다 각기 다른 자신의 불행을 어필하겠지만 승자는 아마도 나일 것이다. 공신력 있는 석학이 들어준 손이다. 미국 경제학자 데이비드 블랜치플라워 다트머스대 교수가 올해 초 내놓은 연구결과에 따르면 인생의 행복곡선에서 가장 바닥을 치는 때는 선진국의 경우 47.2살, 개발도상국은 48.2살이란다. 내 나이다.

콕 집어 가장 불행한 나이를 알려준 건 처음 봤지만 이미 여러 연구자료들이 40대에서 50대까지 걸치는 일정 시기를 생애주기별 ‘U자형 행복곡선’의 바닥으로 지목했다. 개인의 특수한 경험에 따라 예외는 있고 처한 상황에 따라 바닥의 높이는 다를 수 있겠지만 평균적으로는 부와 건강, 결혼 여부 등과 상관없이 이 시기의 불행감이 가장 크다고 한다. 2015년 현대경제연구원이 발표한 ‘경제적 행복 추이’ 보고서에서도 가장 불행한 한국사람은 ‘40대의 대졸 자영업 이혼남’으로 나왔다.

자영업 이혼남은 아니지만 인생의 가장 비참한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 이유는 석학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8시간 강의가 가능하다. 얼마 전 가까운 친구의 형제상 소식을 들었다. 그것도 동생. 몇달 전에는 다른 ‘베프’의 암 투병이 시작됐다. 비유적인 표현으로만 쓰던 ‘지뢰밭’이 생생한 실체로 눈앞에 펼쳐지는 느낌이다. 부모상을 당한 친구와 끌어안고 울던 30대는 소꿉장난하던 시절로 느껴진다. 또 이 나이에는 칠순을 넘어 팔순으로 가는 부모에게 어린 시절 받았던 돌봄노동을 돌려줄 시간이 시작된다. “어린애는 귀엽기나 하지.”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서 늙음을 자조하며 김혜자가 말하는 것처럼 부모를 부양하는 돌봄노동에는 육아 돌봄노동과 비교할 수 없는 어떤 막막함이 있다.

그리고 한때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천사였지만 어느 순간 나의 품성 파괴자와 돈 먹는 하마로 변신한 자식이 있다. 이와 관련해 발달심리학에서 자주 인용되는 재밌는 통계가 있다. 우리는 보통 아이가 삶의 행복이고 결혼생활을 단단하게 묶어주는 매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가족의 생애주기를 단계별로 나눠 부부의 결혼만족도를 조사한 결과를 보면 만족도는 아이가 태어나면서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해 자녀가 초등 학령기일 때 바닥을 치고 미세하게 올라가다가 자식이 성인이 되면서 급상승한다. 일견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결과지만 아이가 삶의 기쁨이라는 건 기억의 재가공을 통해 ‘조작된 행복’이라는 소리다. 내가 아이에게 나중에 자식은 낳지 말라고 하루 세번씩 이야기하는 건 기후변화로 인한 지구의 재앙을 피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은 육아의 고통을 겪지 말라는 무의식의 발로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불안한 노후자금과 직장생활의 진로. 아, 그냥 생각도 하기 싫다. 패스.

결론적으로 성장과 발전은 멈추고, 반전의 마지막 싹까지 꺾이(는 듯하)면서 오로지 해결해야 하는 짐만 쌓이는 나이가 중년인 셈이다.

그렇다면 U자형 행복곡선의 양쪽 끝에는 어떤 연령이 있을까. 통상적으로 왼쪽 끝에는 스무살 언저리가 놓이고 오른쪽 끝에는 60대 중반부터 70대 초반을 아우르는 10여년이 있다.

스무살이야 학교와 부모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된 성인의 삶을 시작한다는 시점이니 그럴 수 있다 치지만 60살이라니. 중년에 들어서면 위와 같은 짐들에 떨어지는 체력과 그보다 떨어지는 기억력까지 보태져 더 불행한데 노년에는 체력과 기억력이 좋아지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목주름은?

노인의학 전문의 루이즈 애런슨은 저서 <나이듦에 관하여>에서 시인 메리 루플을 인용한다. “(늙었다고 남들이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투명인간이 되는 순간 눈앞에는 무한한 자유의 세상이 펼쳐진다. 내게 이래라저래라 할 만한 인물들은 다 사라진 지 오래다. 부모님도 이미 돌아가셨다. 부모의 죽음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해방의 결정적 계기이기도 하다.” 이제 더 이상 나를 주목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대한 객관적 인식, 스타나 벼락부자나 석학의 꿈을 버려야 할 시점이 왔다는 냉철한 감각이 불행의 구렁텅이에서 중년을 구원한다는 말이다.

중년을 벗어나 노년을 향하며 온몸으로 깨닫는 인생의 덧없음, 나는 별거 아닌 존재였다는 겸허한 인정, 이런 것들이 삶을 재정비하게 만든다고 한다. 안정, 성공, 변화, 혁신 등을 향해 질주하던 인생에 브레이크가 걸리면서 가족이나 친구 관계, 일상, 종교 같은 것들의 의미가 중요해지는 것이다. 아직 불행올림픽에 출전 중인 나로서는 이런 연구결과와 석학들의 말이 어느 정도 수긍은 가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다. 특히 보람 있는 노년을 보내기 위해서 순간적 쾌락보다 삶의 의미를 추구해야 한다는 건 술 끊으라는 잔소리로만 들려 거부감이 드는 걸 보니 경기가 끝나려면 먼 것 같다.

김은형 논설위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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