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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도전보다 어려운 단어, 단념

등록 2021-04-14 18:17수정 2021-04-15 02:34

<미나리> 바로 전 개봉한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의 배우 윤여정씨. 그는 당시 시사회에서 “60살이 되면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하고만 (작품을) 하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영화 스틸컷
<미나리> 바로 전 개봉한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의 배우 윤여정씨. 그는 당시 시사회에서 “60살이 되면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하고만 (작품을) 하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영화 스틸컷

김은형ㅣ문화기획에디터

1970년대 초 일본에서 출간돼 스테디셀러가 된 <계로록>(戒老錄)의 저자 소노 아야코는 잘 나이 드는 비결의 주제어를 몇 가지 제시했는데 그중 하나가 ‘단념’이다. 최근 나온 에세이 <무인도에 살 수도 없고>에서도 그는 단념을 “인생에서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예술이라고까지 생각한다. 지혜로운 어른만이 할 수 있는 행위”라고 적었다.

‘단념’. 품었던 생각을 아주 끊어 버림(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포기와 단념은 비슷하게 쓰이지만 엄연히 다른 단어다. 포기는 행위의 중단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단념은 포기한 다음에도 머릿속에 남는 미련이나 집착 같은 것까지 비워버리는 결심 또는 자각에 가깝다.

지난달, 몇년 전 은퇴한 기업인을 오랜만에 만났다. 은퇴한 직후에도 초빙교수와 사외이사 등으로 활발히 활동하던 분이었는데 친구들의 부탁으로 떠맡게 된 소소한 일 말고는 공식적인 직함을 한참 전에 다 정리했다고 했다. 건강이 안 좋으시냐 물었더니 아니란다. “더 이상 예우받는 일을 하면 안 될 거 같아서”라는 게 그가 말한 이유였다. “와, 멋지네요”라고 대꾸했더니 쉽지 않았던 ‘단념’의 여정에 대해 털어놓았다. 더 나이 들어 언젠가 밀려나듯 내려오기보다는 스스로 내려오겠다는 결단은 단호했지만 막상 공적 활동을 접고 나니 수입의 단절부터 몰려오는 외로움까지 완전한 ‘자유인’의 생활에 적응하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는 거다.

일전에 나이가 드니 새해결심 같은 걸 안 해도 죄책감이 안 생겨서 좋다고 썼는데 ‘단념’은 그와는 또 다른 문제다. 사실은 정반대의 문제다. 새로운 도전, 발전의 계기, 이런 것들은 포기가 어렵지 않다. 그 노력의 효용성이 젊은 시절보다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던 것들, 누리고 있던 것을 내려놓기란 쉽지 않다. 대표적인 게 사회적 인정과 자식 문제, 바꿔 말하면 아랫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력 같은 게 아닐까 싶다.

은퇴한 기업인이 말한 “예우”란 사회적 인정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기사 딸린 차나 비서가 정리해주는 스케줄보다 누군가 나를 불러줘야 스스로의 존재가치가 확인되는 상황 말이다. 사회성 발달 이론으로 알려진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도 강조했듯이 사회적 성취는 성인의 심리적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돈을 벌기 위해 직장을 구하지만 우리가 회사에서 바라는 건 오로지 월급만이 아니다. 내가 조직에 기여한다는 걸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승진은 월급 인상과 똑같은 말이 아니다. 하지만 대개의 사람에게 승진도 어느 시점에 가면 멈추듯이 사회적 성취도 잦아들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를 스스로 받아들이기, 즉 단념하기란 정말이지 쉽지 않아 보인다. 어느 정권에서도 예외 없이 쏟아지는 낙하산 인사만 봐도 그렇다. 아마 당사자들 중 ‘월급도둑이 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직 사회적으로 기여하고 성취할 것이 남아 있다고 생각해서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지만 결국 끝은 사회적 폐해일 뿐이다.

이달 초 <뉴욕 타임스>는 배우 윤여정 인터뷰를 실으면서 그가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시사회에서 밝혔던 소감을 기사의 첫머리로 썼다. 윤 배우는 “60살이 되면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하고만 (작품을) 하겠다, 돈 상관없이 하겠다고 결심했다”고 했다. 이 영화는 그의 이런 결심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가 연기한 인물은 평범한 주인집 할머니라는 조연으로 주가 높은 배우가 선뜻 선택할 만한 캐릭터는 아니었다. 게다가 노 개런티로 출연했다. 그의 결심의 행간에는 ‘단념’이 읽힌다. 배우의 사회적 성취라고 할 만한 지표들, 막대한 제작비를 쏟아부은 대작이라거나 스타 감독, 높은 개런티에 대한 미련을 버리겠다는 의지다. 이후 윤여정은 흥행이 쉽지 않은 이른바 작은 작품들에 많이 출연했는데 역시 신진 감독의 저예산 영화인 <미나리>로 전세계가 주목하는 사회적 성취를 이룬 결과는 아이러니하면서 극적이다.

단념이 쉽지 않은 또 하나는 아마도 자식 문제일 거다. 사춘기 아들이 수학학원 중단을 선언하자 머릿속으로는 ‘긴 인생에서 그깟 수학학원’이라고 외치면서도 가출 청소년에게 귀가를 독려하듯 수학학원에 돌아가야 할 이유를 만들어내는 나만 봐도 그렇다. 부모가 어린 자식을 염려하며 ‘바른길’로 인도하고자 하는 마음이야 당연도 하다. 하지만 자식이 성인이 된 뒤에도 부모가 생각하는 ‘바른길’을 단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널리고 널렸다. 우리 각자의 존재가 부모 바람의 실패자라는 걸 웅변하는데도 말이다.

최근 보궐선거가 끝난 뒤 윗세대와 다른 선택을 한 20대를 바라보는 심정에도 물가에 내놓은 자식을 ‘바른길’로 인도하고자 하는 욕구가 꽤나 많이 섞여 있는 것 같다. 그중 가장 실소가 나온 건 아직 뭣도 모르는 20대에게 투표권을 주는 걸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어느 온라인 댓글이었다. 이걸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야 없겠지만 제때 제대로 단념하지 못할 때 우리가 얼마나 형편없는 노화과정을 겪게 되는지 알려주는 경고 스티커처럼 보인다. 더 나이 들기 전에 안나푸르나 등정을 준비하는 심정으로 단념을 훈련해야 할 거 같다. 일단 마을 뒷산 수학학원 문제부터 해결하고.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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