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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문재인 정부가 지금 할 수 있는 일

등록 2021-05-11 14:29수정 2021-05-13 20:58

[이진순 칼럼]
아버지의 핸드폰에는 아들의 번호가 ‘삶의 희망’으로 입력되어 있다. “절대로 아빠를 용서하지 마라.”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 죄인이 되었다. 잘나가는 부모를 둔 자녀들이 엄마, 아빠 찬스로 그럴싸한 가짜 스펙을 만드는 동안, 스펙에도 넣지 못할 막노동판으로 나서는 청년들은 안전장치 없는 산업현장에서 하루 일당을 위해 일한다.

이진순 ㅣ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만 23살의 이선호씨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평택항 부두에서 사고가 나던 지난달 22일에도 틈틈이 공부하겠다며 노트북 컴퓨터와 전공책을 가방에 챙겨 갔다. 대학 1학년을 마치고 해군으로 복무한 뒤 복학했지만 코로나로 비대면 수업을 하게 되자 아버지가 일하는 하청업체에 들어가 알바를 해오던 중이었다. 일당을 차곡차곡 모아 학비와 용돈으로 쓰려는 아들이 아버지는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아버지의 핸드폰에는 아들의 번호가 ‘삶의 희망’으로 입력되어 있다.

“아빠가 아직까진 널 뒷바라지할 수 있다. 기술을 배우든가 공무원시험을 준비해라.”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보다 나은 삶을 살기를 소망했지만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쓸 수 있는 아빠 찬스는 자신이 일하는 인력업체에서 알바를 하도록 주선하는 것뿐이었다. 부산에서 이삿짐센터를 하던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하고 2004년 평택항으로 와서 비정규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6년간 떨어져 살다가 2010년에야 가족들을 불러들여 살림을 합쳤다.

비정규직 아버지와 비정규직 아들은 함께 출근하고 같은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고 함께 퇴근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사고가 나기 한 시간 전까지도 함께 있었다. 원래 아들이 맡았던 일은 동식물 검역 하역이었지만 3월부터 원청회사의 요구에 따라 창고업무와 컨테이너 하역 작업에 동원되었다. 사망 당일, 선호씨는 조립식 컨테이너 해체 작업에 처음 투입되었다. 현장에는 안전관리자도 없고, 안전장비도 지급되지 않았다.

아들은 300㎏ 컨테이너 철판에 깔려 숨졌다. 아무도 아버지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물류작업 하러 간 동료들이 돌아오지 않는 게 이상해서 자전거를 타고 컨테이너 현장으로 가는 동안 원청회사 직원들과 마주쳐 인사를 건네는데도 뻘쭘한 표정을 짓는 게 이상하다 생각했을 뿐, 아버지는 그런 끔찍한 사고가 아들을 덮쳤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들은 컨테이너 바닥에 엎드린 채 누워 있었다.

“절대로 아빠를 용서하지 마라.”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 죄인이 되었다. 잘나가는 부모를 둔 자녀들이 엄마, 아빠 찬스로 그럴싸한 가짜 스펙을 만드는 동안, 스펙에도 넣지 못할 막노동판으로 나서는 청년들은 안전장치 없는 산업현장에서 하루 일당을 위해 일한다. 아들의 주검을 아내에게 보여도 될지 아버지는 망설였다. 머리와 가슴까지 철판에 깔려 두개골과 경추, 흉골이 으스러졌다. 장의사는 아들의 얼굴을 조심스레 짜 맞췄지만 바스러진 치골은 차마 손을 댈 수 없어 수건으로 덮어두었다. 며칠 전 암 수술을 받은 큰딸에겐 아직 아들의 사망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선호는 어딨느냐?’고 찾을 때마다 ‘학교 갔다’고 둘러대는 중이다.

선호씨가 참혹하게 생을 마감한 뒤에도 2주가 지나도록 그의 죽음은 언론에 제대로 보도되지 못했다. 지난 6일 ‘고 이선호군 산재사망사고대책위원회’가 주최한 기자회견장에서 만난 기자에게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묻자, 이런 사고가 하루에 7건꼴로 나다 보니 지역 단신으로만 올라오는 보도에 일일이 주목하지 못했다며 젊은 기자는 고개를 떨궜다. 하루 평균 7명씩, 해마다 2000명 이상이 일터에서 떨어져 죽고, 끼어서 죽고, 질식해 죽고, 깔려서 죽는 세상에서 노동자의 죽음은 뉴스도 되지 못한다.

지난달 28일은 세계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이었다. 이날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씨는 “또 다른 용균이들이 일하면서 죽지 않고 다치지 않고 차별받지 않기를” 간절히 염원했지만 또 다른 용균이들의 죽음의 행렬은 그칠 줄 모르고 이어진다. 김용균 어머니와 산재 사망자 유족들의 목숨을 건 단식 끝에 어렵사리 지난 1월 제정된 중대재해처벌법은 차 떼고 포 떼고 처벌 대상마저 두루뭉술해진 채 내년 1월에야 효력이 발생한다. 그나마도 중대 재해의 80%를 차지하는 50인 미만 사업장은 2024년까지 시행이 유예된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동하다 죽기 좋은 나라’를 묵인하는 게 정의인가?

“공무원들이 문젭니다. 사업주가 인건비 아낀다고 이렇게 야비하게 돈을 벌면서 사람을 죽이는데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몰랐다면 직무유기고, 알고도 방치했다면 공범입니다.” 선호씨의 아버지 이재훈씨가 핏발 선 눈빛으로 말했다. 문재인 정부 남은 1년간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그러나 마음만 먹으면 오늘, 또 내일, 꽃잎처럼 스러져갈 생명을 하나라도 살릴 순 있다. 누더기가 된 중대재해처벌법의 시행령이라도 제대로 만들어라. 더이상 금쪽같은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더이상 죽지 않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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