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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국회·정당

“비교하면 욕심 끝없어…나이 들어 안 물러나는 건 헛짓”

등록 2020-06-06 07:06수정 2020-06-06 10:57

[토요판] 커버스토리
원혜영과 남승우의 아름다운 은퇴

‘국회의장 유력’에도 은퇴한 원혜영
“국회의장 하면 또 대통령 바랄지도
한번도 당선 안 된 사람 많은데
시장까지 일곱차례, 뭘 더 바라요”

“더 긴 것과 비교하면 욕심 끝없어
언제든 시민으로 돌아갈 때 대비해
내려놓기 연습을 맘속으로 했죠”

전문경영인을 후계자 만든 남승우
“자녀에게 돈 물려주는 건 몰라도
경영권 세습하는 건 촌놈이죠
이재용도 약속 지킬 수밖에 없어”

“글로벌 기업은 65살 은퇴가 당연
기업의 업무량과 성격이 바뀌어
늙어서는 제대로 대응 못해요”
국회의원과 부천시장 등 30년 동안 7선의 선출직 공직생활을 지내고 은퇴한 원혜영 전 의원(오른쪽)과 2년 전 전문경영인에게 ㈜풀무원의 경영권을 물려준 남승우 풀무원재단 상임고문이 지난달 19일 서울 강남구 수서동에 있는 풀무원재단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마친 뒤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국회의원과 부천시장 등 30년 동안 7선의 선출직 공직생활을 지내고 은퇴한 원혜영 전 의원(오른쪽)과 2년 전 전문경영인에게 ㈜풀무원의 경영권을 물려준 남승우 풀무원재단 상임고문이 지난달 19일 서울 강남구 수서동에 있는 풀무원재단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마친 뒤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 대개의 우정은 아름답다. 그것이 정의 등 사회적 가치에 바탕을 둔 우정임에야. 원혜영 전 의원과 남승우 풀무원재단 고문은 고교 때 만났다. 민주화운동가와 산업일꾼으로 각자 걷는 길은 달랐지만, 공정과 정의에 대한 생각은 같았다. 5선을 지낸 원 전 의원은 기부와 깨끗한 정치의 대표주자로 손꼽히며, 식품기업 풀무원을 이끌었던 남 고문은 윤리경영의 대표적 실천가로 평가받는다. 30대 초반에 동업하면서 새겼던 ‘풀무원 정신’이 삶의 바탕이 됐다. 두 사람은 각자가 이룬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왔다. 남 고문은 2년 전 전문경영인에게 후계 자리를 물려줬으며, 원 전 의원은 국회의장직이 눈앞에 있음에도 정계 은퇴를 선택했다. 끝자락마저 아름다운 삶이다. 남 고문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 일체 언론을 만나지 않았지만, 50년 지기를 위해 기꺼이 “찬조출연” 했다. 지난달 19일 서울 강남구 수서동 풀무원재단 사무실에서 두 사람에 대한 1차 인터뷰를 했으며, 의원 임기 종료 하루 전인 28일 오후 국회도서관에서 원 의원을 별도로 만났다.

“어서 와. 국회의원 임기가 열흘밖에 안 남았네.”

“비가 그치니까 하늘이 깨끗해. 도시 공기가 매일 이래야 하는데.”

오랜 친구는 말을 건너뛰어도 대화가 부드럽다. 2년 전 기업 경영에서 은퇴한 남승우(68) 풀무원재단 고문이 정계은퇴를 앞둔 50년 지기 원혜영(68·이하 호칭 생략) 의원을 반갑게 맞았다.

“품격 있는 의원들이 별로 없는데 그나마 원 의원조차 사라지면 더 없어진다고 아쉽다는 사람도 더러 있지만, 그의 은퇴에 대해 다들 훌륭하다고 해요. 정말 잘한 거죠.”(남승우, 이하 남)

“남 사장이 2년 전에 물러나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자극받은 면이 있어요. 한다더니 진짜 은퇴하는구나 했죠, 그때.”(원혜영, 이하 원)

30여년 동안 정계와 재계에서 활동했던 두 친구는 각자의 정점에서 스스로 내려왔다. 원혜영은 최다선 의원(6선)이 될 수 있는 21대 국회를 앞두고 지난해 12월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평소 의정활동이나 유권자들의 평가, 지역구(부천시 정) 특성 등을 고려할 때 당선은 확실했다. 게다가 차기 국회의장에 가장 가까이 가 있는 정치인이었다.

“국회의장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두고 얼마나 아쉽냐고 많이 얘기하는데 그렇게 보면 그럴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런 식이라면 국회의장을 하면 대통령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할 것이고, 한국 대통령을 하면 미국 대통령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할 거예요.(웃음) 자꾸 나보다 더 긴 것과 비교하면 끝이 없어요. 4년 전 선거 때 나와 맞붙은 새누리당(미래통합당의 전신) 후보가 내건 공식 현수막의 문구가 ‘누구는 일곱번(부천시장 재선 포함) 하고 누구는 한번도 못합니까’였어요.(웃음) 그 사람 처지에서 보면 ‘저 사람은 별로 잘난 것도 없는데 일곱번이나 하냐’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그처럼 한번도 당선이 안 돼 평생 애를 쓴 사람이 훨씬 많은데 더 이상 뭘 더 바라겠어요.”(원)

“나보다 더 큰 것이나 긴 것과 비교하면 끝이 없어요. 일곱번이나 선출직 공무원을 했는데 더 이상 뭘 더 바라겠어요?” 원혜영 전 의원이 지난달 19일 서울 수서동 풀무원재단 사무실에서 &lt;한겨레&gt;와 인터뷰하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나보다 더 큰 것이나 긴 것과 비교하면 끝이 없어요. 일곱번이나 선출직 공무원을 했는데 더 이상 뭘 더 바라겠어요?” 원혜영 전 의원이 지난달 19일 서울 수서동 풀무원재단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아들에게 물려주려면 가족기업 해야”

정치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보통 ‘내가 조국과 민족을 위해 할 일이 더 남았고, 남보다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는 사실 2012년 19대 총선이 끝난 뒤에 늦어도 20대 국회로 끝마치겠다는 생각을 혼자 했어요. 정치는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하기 때문에 적절한 때에 물러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죠. 내가 대표한 분들에게 누가 되지 않고,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잖아요. 선거에 안 떨어지고 그만둘 기회가 있는데 왜 기어코 떨어지고 그만둡니까.(웃음) 제가 이 얘기를 했을 때 아내가 제일 재밌어했어요. 저보다 남 사장의 경우 훨씬 결단하기가 어렵죠. 사업하는 사람은 망하거나 죽거나 또는 죽기에 가까울 정도로 건강이 나빠지기 전에는 그만두지 않잖아요.”(원)

2년 전인 2018년 1월 남승우는 ㈜풀무원의 대표이사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연 매출 2조원이 넘는 회사의 창업자이자 대주주(51.84%)다. 은퇴할 때 회사가 어려운 상황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대주주의 건강 등 신상에도 전혀 이상이 없었다. 1남2녀의 혈육이 아니라 전문경영인(이효율)을 후계자로 내세웠다.

“예전에는 중간에 물러나는 게 이상한 사람이고 안 물러나는 게 당연한 거였어요. 왕이나 기업의 창업주는 죽을 때까지 했잖아요. 그러나 지금은 업무량이나 업무 성격을 보면 그건 말도 안 되는 헛짓입니다. 늙어서는 제대로 할 수가 없어요. 글로벌 기업에서는 전부 65살에 물러납니다.”(남)

현재 풀무원에서는 최고경영자 임기가 끝나면 대주주가 아니라 전문경영인이 자신의 후계자를 뽑아서 시이오 후보추천위원회에 올리게 된다. 전문경영인 체제의 작동 방식이다. 남승우가 퇴임 전 확립한 시스템이다.

“전문경영인을 후계자로 뽑은 것도 대단한 것이 아니에요. 외국의 공개 상장기업을 보면 안 그러는 게 이상합니다. 물론 과거에는 통상적으로 아버지 자리를 아들이 물려받는 것이 보편적이었어요. 그러나 기업 경영에서는 이미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 충분히 증명이 됐거든요. 그래서 외국도 처음에는 자식들한테 물려주다가 지금은 가족기업 빼고는 아무도 아들한테 안 물려줍니다. 아들한테 물려주려면 패밀리 비즈니스 하면 돼요. 상장해서 퍼블릭이 된 기업이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겁니다. 퍼블릭 기업이 된 뒤에 글로비스를 만들고, 에버랜드를 통해 괴상한 짓을 하다가 회사 임원들이 범죄에 연루되는 것을 우리가 다 봤잖아요. 돈을 물려주는 것이야 문제없지만, 경영권을 물려주겠다는 것은 촌놈입니다. 얼마 전 이재용 삼성 부회장이 아들에게 경영권을 안 물려주겠다고 했는데 그것은 너무 당연한 거예요. 그렇게 갈 수밖에 없어요. 삼성이 변하면 다른 회사도 따라가겠죠.”

삼성은 이건희→이재용 경영권 승계를 위해 에버랜드의 전환사채 발행이라는 불법행위를 했으며, 현대차는 정몽구→정의선으로의 3세 승계를 위해 글로비스를 만들어 내부거래를 해왔다. 남 고문의 아들(남성윤)도 ㈜풀무원 관계사 중 하나인 올가홀푸드의 대주주(94.95%)여서 승계 포석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도 한다.

“그러려면 글로비스나 에버랜드처럼 내부거래를 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런 게 하나도 없어요. 올가홀푸드가 풀무원 지분을 전혀 안 갖고 있고요. 원 의원이 39년 전에 시작했던 ‘풀무원 무공해 농산물 직판장’에 뿌리를 둔 회사라는 상징성 때문에 매년 적자를 보면서도 유지해왔어요. 그런데 그동안 자본금 174억원을 다 까먹고, 제가 개인적으로 보증을 서서 빌린 차입금으로 겨우 운영하고 있는데 곧 정리가 될 것으로 알고 있어요.”

“아들에게 경영권을 넘겨주는 것은 촌놈이죠. 외국의 상장기업은 모두 전문경영인에게 물려줍니다. 우리나라도 곧 그렇게 될 겁니다.” 남승우 풀무원재단 고문이 지난달 19일 서울 수서동 재단 사무실에서 &lt;한겨레&gt;와 인터뷰하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아들에게 경영권을 넘겨주는 것은 촌놈이죠. 외국의 상장기업은 모두 전문경영인에게 물려줍니다. 우리나라도 곧 그렇게 될 겁니다.” 남승우 풀무원재단 고문이 지난달 19일 서울 수서동 재단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꼴찌 하다가 서울법대 합격한 남승우

원혜영과 남승우의 만남은 10대 중반인 고교(경복고) 때 시작됐다. 1학년과 3학년 때 같은 반을 했지만, 둘은 ‘노는 물’이 달랐다. 가난한 이웃들과 공동체생활을 하며 컸던 원혜영은 모범생에 속했다. 우열반으로 나뉘어 있을 때 원혜영은 열반(연고대반)의 반장(3학년)을 맡았으며, 성적도 반에서 상위권이었다. 신문과 시사잡지를 섭렵했던 원혜영은 박정희의 3선 개헌(1969년)에 반대하는 서울시내 고교의 연합시위를 준비하다가 발각되기도 하는 등 일찍부터 정치의식이 강했다. 반면에 중산층 출신의 남승우는 학교보다 만화방을 더 자주 가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는 ‘날라리’ 과였다. 조건부로 3학년에 겨우 가진급했을 정도로 성적은 꼴찌그룹에 속했다. 그러나 그는 3학년 2학기 첫 시험에서 전교 2등을 한 데 이어 서울대 법대에 합격해 친구들을 놀라게 했다.

두 사람의 대학시절은 더 달랐다. 재수 끝에 서울대 사범대 역사교육과에 입학(1971년)한 원혜영은 교양과정부(1학년) 학생회장을 맡아 교련 반대 운동을 주도하는 등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로 인해 강제징집과 두번의 구속, 세번의 제적 등 숱한 고초를 겪었다. 반면 남승우는 대학에서도 공부 대신 여행과 연애 등 낭만적인 시간을 보냈다. 졸업할 즈음부터 뒤늦게 사법시험에 여러 차례 도전했으나 실패하자, 1978년 당시 재계 순위 2~3위였던 현대건설에 취업했다. 건설 붐이 한창이던 중동에 1년 동안 파견을 다녀오기도 하는 등 직장에서도 잘나갔다.

민주투사와 산업일꾼으로 제 갈 길을 걷던 두 사람이 운명적으로 만난 것은 1980년 초겨울이었다.

“최규하의 체육관 대통령 선출을 막고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기 위해 벌였던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위장결혼식’ 사건(1979년 11월)으로 수배당해 장기 도피 생활을 할 때였어요. 서울 신촌 부근을 지나다가 우연히 승우를 만났죠. ‘다음에 한잔하자’고 인사성 말을 하고 돌아서는데 이 친구가 ‘다음에 하자는 것은 보지 말자는 소리다’ 하며 인근 술집으로 데려갔어요.”(원)

“저는 학교 다닐 때 데모를 싫어했어요.(웃음) 이상돈 의원이 법대 동기인데 2학년 때 학생회의 학년 대의원으로 추천하길래 그마저 거부했을 정도였죠. 군대도 보안사에서 근무했고요. 그러나 민주화운동 하는 친구들한테 미안하고 빚진 마음은 늘 있었어요. 그래서 고생하는 친구에게 따뜻한 밥 한끼 먹이고 싶었겠죠.”(남)

그와 만난 지 얼마 안 돼 원혜영은 생계를 위해 사업에 나서야 했다. 1년여 전에 결혼한 아내 안정숙마저 기자(당시 <한국일보>)로 일하다 전두환 신군부의 언론탄압 과정에서 해직당했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그는 아버지 원경선(2013년 작고)이 경기도 양주에서 운영하던 ‘풀무원 농원’에서 나오는 유기농산물을 가져다 파는 가게(풀무원 무공해 농산물 직판장)를 1981년 5월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열었다. 국산콩으로 두부와 콩나물도 직접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식품’을 제공한다는 기업 철학을 처음부터 분명히 세웠다. 서른살 때였다.

하지만 유기농산물은 수급이 불규칙한데다 원재료 값으로 인해 두부와 콩나물 가격이 기존 제품보다 3배나 비싸다 보니 사업이 어려웠다. 긴급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주변 친척들에게 손을 벌리던 그는 “언제든 찾아오라”던 남승우를 떠올렸다. 남승우는 원혜영에게 기꺼이 돈을 빌려줬을 뿐 아니라 사업이 안정적이려면 제조업을 해야 한다고 조언을 했다.

“아내가 부천 집에서 콩나물을 직접 키우는 등 온 가족이 달라붙었지만, 경험 없이 뛰어든 일이어서 초기에는 정말 힘들었어요. 승우의 조언도 있고 해서 당시 유행하던 현미효소를 유기농으로 시도해서 1982년 개발에 성공했어요. 이때 승우는 첫 투자까지 했죠. 그래서 두부와 콩나물을 중심으로 하는 ‘풀무원 유기식품’과 별도로, 현미효소에 집중하는 ‘풀무원 건강식품’이란 회사를 만들었어요. 풀무원 유기식품은 제 개인회사였고, 건강식품은 저랑 승우가 공동대표를 맡았어요.”(원)

두 사람은 고교 때 같은 반 친구
원혜영은 민주화운동에 매진
남승우는 연애·놀기 등에 열중
1980년 우연한 운명적 만남 뒤
‘풀무원 창업과 계승’의 우정

원, “대세보다 옳은 정치” 한길
겸손한 ‘여의도 신사’ 자리매김
남, “이웃사랑 생명존중” 정신으로
기업의 윤리경영 모범 만들어

오랜 친구인 원혜영 전 의원(왼쪽)과 남승우 풀무원재단 고문이 지난달 19일 서울 강남구 수서동에 있는 풀무원재단 사무실에서 &lt;한겨레&gt;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오랜 친구인 원혜영 전 의원(왼쪽)과 남승우 풀무원재단 고문이 지난달 19일 서울 강남구 수서동에 있는 풀무원재단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원혜영은 종류가 다른 사람이죠”

그러나 효소식품에 대한 언론의 부정적인 보도로 인해 당시 엄청난 붐이 일었던 효소식품 시장 자체가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말았다.

“총판과 대리점까지 다 모집해 놓았는데 언론 보도로 돈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등 난리가 났어요. 제가 당시 1억원을 빌려서 일단 부도를 막았어요. 한달에 40만원인 제 월급을 모아서 그 돈을 갚으려면 한푼도 쓰지 않아도 20년이 넘게 걸리겠더라고요. 또 낮에는 사무실에 나가 회사 일을 하고, 밤에는 효소 사업 일을 하는 이중생활을 더 지속할 수가 없었고요. 그래서 1984년 1월 현대건설에 사표를 내고, 풀무원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죠. 원대한 계획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코너에 몰려서 그랬죠. 대부분의 인생이 그런 것 같아요. 수영장 옆을 지나다가 물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셈이죠. 그럴 때 포기하고 마는 게 아니라 스스로 개헤엄부터 배우면서 헤쳐나가는 거죠.”(남)

평탄한 직장생활을 두고 앞날이 불확실한 사업에 뛰어든 남승우는 방문판매에 관한 책을 쌓아놓고 마케팅 공부부터 시작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주부 등으로 구성된 판매원 조직을 만들어 유기농 현미효소 시장을 다시 살려냈으며, 그해 가을에는 빚도 완전히 털어냈다. 걸출한 경영자를 만나 풀무원이 이내 자리를 잡아가자, 원혜영은 자신이 탄생시킨 기업을 도리어 떠났다.

“남 사장이 와서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원래 하던 민주화운동으로 돌아가도 되겠다는 판단이 들었죠. 오랫동안 동지였던 김근태 선배도 저한테 빨리 돌아오라고 몇번 요청하기도 했었고요. 그래서 남 사장한테 유기식품과 건강식품을 통합해서 실질적인 오너를 네가 맡아서 운영하라고 줄기차게 설득했죠. 1984년 말에 그렇게 하기로 합의하고, 대신 사업이 안정될 때까지 2년간 더 남아 있어 달라는 요청을 제가 수용해서 86년 말까지 풀무원에서 일했죠.”(원)

1981년 서른살의 청년 원혜영이 만든 ‘풀무원 무공해 농산물 직판장’에서 시작한 ㈜풀무원은 1982년 유기농 현미효소를 개발함으로써 사업의 영역을 한 차원 높였다. 당시 현미효소의 시제품을 시음하는 모습. 오른쪽 끝은 당시 현대건설 구매과 직원이던 남승우 풀무원재단 고문, 그 옆은 원혜영 전 의원. ㈜풀무원 제공
1981년 서른살의 청년 원혜영이 만든 ‘풀무원 무공해 농산물 직판장’에서 시작한 ㈜풀무원은 1982년 유기농 현미효소를 개발함으로써 사업의 영역을 한 차원 높였다. 당시 현미효소의 시제품을 시음하는 모습. 오른쪽 끝은 당시 현대건설 구매과 직원이던 남승우 풀무원재단 고문, 그 옆은 원혜영 전 의원. ㈜풀무원 제공

1986년 새로운 두부공장을 세운 뒤 풀무원식품직판장에서 직원들이 고사를 지내고 있다. 뒤편 맨 오른쪽에 서 있는 이가 원혜영 전 의원, 그 옆 검은색 양복 차림이 남승우 풀무원재단 고문. ㈜풀무원 제공
1986년 새로운 두부공장을 세운 뒤 풀무원식품직판장에서 직원들이 고사를 지내고 있다. 뒤편 맨 오른쪽에 서 있는 이가 원혜영 전 의원, 그 옆 검은색 양복 차림이 남승우 풀무원재단 고문. ㈜풀무원 제공

원혜영이 떠난 1987년 풀무원은 연 매출이 100억원에 이를 정도로 성장했고, 미래 전망도 밝았다. 반면 민주화에 대한 전망은 전혀 안 보일 때였다. 게다가 그는 2명의 어린 아들을 둔 36살의 가장이었다. 하지만 원혜영은 상표권만 빼고 모든 지분을 남승우에게 넘겼다. 1996년 상표권을 일정 지분으로 되돌려받으려 했으나, 세금 문제 등 상황이 복잡하자 원혜영은 20억원 전액을 들여 장학재단(부천육영재단)을 만들었다.

“특별하게 고민하고 그런 것은 전혀 없었어요. 가족들도 제 선택을 존중해줬고요. 친구 덕분에 제 꿈이었던 민주화운동으로 복귀하는 날을 앞당길 수 있어서 다행이었죠. 풀무원에서 손 떼는 느낌은 시원섭섭했던 것 같아요.”(원)

“사람들이 물어보니까 시원섭섭했다고 하는 거지 실은 전혀 아니에요. 그때도 자기 꿈과 생각이 확실했거든요. 원 의원은 보통사람과는 영 다른 사람이에요. 나중에 장학사업 하는 것을 봐도 그렇고, 지금도 다르잖아요. 아버지인 원경선 원장님을 꼭 닮은 사람이거든요.”(남)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원경선은 해방 이후 잠시 토목업에 종사하기도 했지만, 1949년 사업을 접고 농부의 길을 택했다. 경기도 부천군 오정면의 미개간지 1만여평을 사서 논밭을 일궜다. 나중에 풀무원 농원이라고 이름 붙인 이곳은 원경선 가족의 삶터이기에 앞서 전쟁고아와 가난한 사람들이 함께 일하고 생활하는 공동체의 터전이었다. 원경선은 1974년 우연히 일본 잡지 <애농>(愛農)을 보고, 생명과 지구 환경을 살리는 유기농에 눈떴다. 1976년 그는 부천을 떠나 경기도 양주군으로 풀무원 농원을 옮겨 한국에서 최초로 유기농업을 시작했다. 또 1988년부터 국제기아대책기구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생을 마칠 때까지 평화주의를 실천했다. 이러한 ‘이웃사랑 생명존중’이라는 원경선의 정신은 풀무원의 브랜드 정신이 됐다. 원경선은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원혜영이 대학 1학년 때 시위에 앞장서자, 지도교수가 부천 집으로 찾아가 ‘이러다가 아들이 제적되거나 감옥에 갈 수 있다’면서 단속을 주문했다. ‘아들이 정의롭지 못한 일을 하면 말리겠지만, 정의로운 일을 하는데 어떻게 말리겠느냐. 오셨으니 딸기나 드시고 가라’고 했다는 일화는 원경선의 인물됨을 잘 보여준다.

영광의 정치인 시절은 부천시장 때”

풀무원을 떠난 원혜영은 박원순, 서중석, 이이화, 임헌영 등이 중심이 된 재야 학술단체인 ‘역사문제연구소’에 1987년 1월 초 합류해 계간지인 <역사비평> 발행을 맡았다.

“정치를 하려고 풀무원을 관둔 게 아니었어요. 민주화운동을 하러 나왔는데 6월항쟁으로 합법적인 정치 공간이 열렸던 거죠. 그때도 바로 정치를 시작한 게 아니었어요. 당시 민주화를 바라던 시민들은 양김(김대중·김영삼)이 힘을 합쳐서 민주정부를 수립하기를 원했죠. 저 역시 단일화를 촉구하는 일에 참여했고, 그것이 깨진 뒤인 1988년 13대 총선 때 정치에 참여하게 됐죠. 단일화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와이에스(김영삼)나 디제이(김대중) 쪽으로 많이 흡수돼 갔지만, 제정구, 유인태, 저, 김부겸 등은 외롭고 현실적으로는 가장 전망이 없는 독자노선을 택했어요. 양김을 극복하는 새정치를 내걸고 기호 5번인 한겨레민주당을 만들어 출마했지만, 당연히 떨어졌죠.”

첫 출마 때 원경선은 아들에게 ‘돈의 유혹을 이길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보시기에 바르게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원혜영은 “돈을 벌려면 잘되는 사업을 하지 왜 정치를 하겠습니까. 자신 있습니다”, “하나님 기준은 몰라도 인간의 기준으로는 바르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부정부패에 자신이 없으면 애초부터 안 하는 게 맞다고 봐요. 뒤돌아보면,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상식적인 기준에서는 바르게 했다고 자부할 수 있어서 다행이죠.”

원혜영은 1992년 14대 총선 때 통합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부천 중구에서 당선돼 여의도에 첫발을 디뎠다. 그러나 그해 말 대선 패배 직후 정계은퇴를 했던 김대중이 1995년 복귀하면서 민주당을 깨고 새정치국민회의를 만들어 나가자, 원혜영은 이를 반대하면서 민주당에 남았고 이듬해 총선에서 다시 떨어졌다.

“나는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라 옳은 게 좋은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이런 믿음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정치를 하는 것이 목적이지 국회의원이 목적이 아니었다. 낙선은 했지만 대세를 따르지 않고 대의를 지킴으로써 내 방식의 정치를 하고 있다는 자긍심도 있었다.”(<아버지, 참 좋았다>, 원혜영)

지난달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원혜영 국회의원 정치마무리 기념출판회’가 열렸다. 이날 행사의 하나로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오른쪽부터), 유인태 국회 사무총장, 원 의원, 우상호 의원이 토크쇼를 하고 있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지난달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원혜영 국회의원 정치마무리 기념출판회’가 열렸다. 이날 행사의 하나로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오른쪽부터), 유인태 국회 사무총장, 원 의원, 우상호 의원이 토크쇼를 하고 있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원혜영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정권교체를 위해 김대중의 국민회의에 다시 합류한 뒤 민주당 계열 정당에서 부천시장(1998~2003년)을 거쳐 17대 총선(2004년)부터 내리 4선을 했다. 당 사무총장과 정책위의장, 원내대표를 지냈으며, 매너 좋은 의원들에게 주는 백봉신사상을 세차례나 받았다. 이번 21대 총선 때는 민주당의 공천관리위원장을 맡아 총선 승리에 기여하기도 했다.

“정치인으로서 가장 영광스러운 시절은 부천시장 때였어요. 하기만 하면 ‘퍼스트무버’이고 ‘뉴프런티어’였어요. 그야말로 펄펄 날았어요. 버스 도착시간 안내시스템(BIS)을 세계 최초로 도입했고, 부천을 만화의 메카로 만드는 등 문화도시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했죠. 국회로 다시 와서는 정치적인 이슈로 싸우기보다는 어떡하면 일하는 국회로 바꿀 수 있을까를 고민했어요. 몸싸움 없는 국회를 구현하기 위한 국회선진화법(2012년 5월)을 만드는 데 일조한 것은 그 일환이었죠. 자랑스러운 성과 중 하나입니다.”

5선 의원에 주요 당직과 국회직을 두루 지내면서도 원혜영은 늘 소탈하고 겸손한 것으로 유명하다. 재벌가의 갑질이 사회문제가 됐던 2018년 4월 그의 전직 비서관이 ‘갑의 역습’이라는 제목의 신문 칼럼에서 원혜영에 관한 일화를 소개했다. 수행비서 대신 운전을 한 적이 있는데 저녁 약속 장소에 가면서 의원이 직접 운전을 하고 비서인 자신은 뒷좌석에 앉아 갔던 일, 지방 출장을 갔다가 3만원짜리 허름한 모텔방 하나에서 의원은 방바닥에 이불을 깔고 자고 침대는 자기에게 내준 일이었다.

“별거 아니에요. 저는 철저한 실용주의자이거든요. 제가 길을 더 잘 알기에 운전을 했고, 적당한 호텔이 없어서 모텔에 들었고, 남자 둘이 방 두개를 쓸 필요가 없어서 그랬던 거죠. 침대를 양보했다지만, 그런 침대가 얼마나 좋겠어요?(웃음) 다만, 내려놓기 연습이랄까 그런 것은 늘 마음속에 있었죠. 국회의원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많은 사람의 도움으로 하는 거다, 좋은 사무실과 보좌진은 국가와 사회가 잠깐 빌려준 거다, 그러니까 4년 계약직을 그만두고 시민으로 돌아갈 때 허전하고 초라하게 느껴진다면 잘못된 거다라는 생각을 했죠. 물론 인품 있는 정치인이 되어야지, 그러려면 즐기고 누리는 것을 참아야지 하면서 도 닦듯이 노력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몸에 맞았어요. 어릴 때 가족의 범위가 확장된 환경에서 자란 영향이 아닐까 싶어요.”

원경선의 불호령이 다진 윤리경영

원혜영이 떠난 뒤 남승우가 홀로 풀무원을 키웠다. 그가 풀무원을 인수한다고 하자, 어머니는 “법대 나온 녀석이 콩나물 장사가 뭐냐. 차라리 메리야스 장사를 하라”며 반대했다. 남승우는 “신라호텔과 여인숙이 모두 숙박업이듯 콩나물·두부 장사도 라면회사와 같은 식품업”이라고 설득했다. 실제로 그는 김치와 고추장, 생수 등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그 결과 풀무원의 매출은 30여년 만에 200배 이상 커졌다. 원경선이 낳고 원혜영이 다듬은 ‘풀무원 정신’을 훼손하지 않고 계승 발전시키면서 이룬 성과였다.

“1989년쯤 고추장 사업에 진출할 때였어요. 창사 이후 풀무원의 원칙은 쌀과 채소는 유기농만 사용하고, 잡곡은 국산을 쓴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고추장 원료인 고추를 유기농으로 키우는 농가가 거의 없어 할 수 없이 국산 고추를 사용해야 했어요. 원경선 원장님한테 보고를 했더니 ‘할 수 없지. 대신 풀무원 이름은 사용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광고를 냈죠. 제품명으로 ‘명가 고추장’이라고 쓰고, 작은 글씨로 ‘풀무원 식품’이라는 회사 이름을 표기했죠. 원장님이 그걸 알고는 ‘나한테 거짓말을 했다. 당장 풀무원 이름을 빼라’고 불호령을 내렸어요. 그때 원장님한테 찍혀서 제가 몇년 동안 신뢰를 회복하느라 고생했어요.(웃음) 그러나 풀무원 정신을 다잡는 좋은 계기가 됐죠.”

풀무원의 정신이자 뿌리인 원경선 원장(가운데)이 2009년 5월25일 남승우 당시 대표(왼쪽), 원혜영 의원과 함께 충북 괴산에 위치한 풀무원 로하스아카데미 개관식에 참석하고 있다. ㈜풀무원 제공
풀무원의 정신이자 뿌리인 원경선 원장(가운데)이 2009년 5월25일 남승우 당시 대표(왼쪽), 원혜영 의원과 함께 충북 괴산에 위치한 풀무원 로하스아카데미 개관식에 참석하고 있다. ㈜풀무원 제공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등 위기도 몇차례 있었다. 특히 이명박 정부 초인 2009년 중국산 유기농 콩을 수입하는 과정에서 관세를 포탈했다는 혐의는 고비였다. 시민운동가의 사외이사 선임에 대한 탄압 의혹 등 짚이는 데가 있었지만, 소비자 신뢰가 중요한 풀무원으로서는 결과가 중요했다. 관세청과 검찰은 강도 높은 수사 끝에 380억원의 세금 추징을 했다. 풀무원은 받아들일 수 없었고, 결국 소송 끝에 2014년 무혐의 판정과 함께 추징금을 전액 돌려받았다. 풀무원은 공정거래위원회와 한국소비자원으로부터 12년째 ‘소비자중심경영’(CCM) 인증을 받았으며, 한국능률협회컨설팅이 선정하는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에 13년 연속 선정됐다.

“풀무원의 제일 큰 자산은 이름이에요. 이름에서 원경선 정신이 나오거든요. 그것을 잘 지키려면 윤리적이지 않으면 안 돼요. 윤리경영이란 간단합니다. 투명하고 공정하면 됩니다. 우린 비자금이란 걸 모르고, 시이오 차량의 운행일지까지도 세세하게 다 기록합니다.”

남승우는 풀무원재단에 매일 출근해 여러 분야의 책 읽기에 하루 네댓 시간을 투자한다.

“학교 때 공부를 안 했으니 뒤늦게라도 보충해야죠.(웃음) 다음 세대인 아이들을 상대로 한 바른 먹거리 교육, 평화 교육에 관심을 쏟으려고 해요.”

연명의료결정법 제정(2016년)에 앞장섰던 원혜영은 앞으로 ‘웰다잉 운동’에 매진할 계획이다.

“5년 뒤면 우리나라는 65살 이상 노인 인구가 전 인구의 20%가 되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합니다. 이런 사회가 건강하려면 노인들이 자기 삶의 마무리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결정하는 생활문화가 절실합니다. 인생의 막을 내리기 전 20~30년은 인생의 자투리가 아니라, 인생의 당당한 한 막이거든요. 새로운 일을 하려니 마음이 설렙니다. 생활의 리듬을 잘 간직하면서 여유있고 보람있게 지내야죠.”

원혜영에게 사무실과 차에 대해 물어봤다.

“사무실이 왜 필요해요. 그럴 돈도 없고요. 여기(국회도서관) 의원열람실은 전직들도 이용할 수 있다고 해요. 앞으로 여기 자주 와서 책 읽고 공부하려고 해요. 대중교통을 주로 이용하겠지만, 적당한 크기의 차를 샀어요. 당연히 제가 몰고 다니죠.”

원혜영과 남승우는 지인 몇사람과 함께 책 읽고 토론하는 모임을 하고 있다. 두 사람의 인생 2막도 1막처럼 ‘따로 또 같이’ 가고 있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만화 발전을 지원한 원혜영 전 의원을 위해 신문수 만화가가 그린 그림. &lt;원혜영이 그린 만화도시 이야기&gt;
만화 발전을 지원한 원혜영 전 의원을 위해 신문수 만화가가 그린 그림. <원혜영이 그린 만화도시 이야기>

원혜영 전 의원은 부천시장 시절 부천시를 만화의 메카로 만드는 등 만화계 발전에 앞장섰다. 이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이두호 만화가가 그린 그림. &lt;원혜영이 그린 만화도시 이야기&gt;
원혜영 전 의원은 부천시장 시절 부천시를 만화의 메카로 만드는 등 만화계 발전에 앞장섰다. 이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이두호 만화가가 그린 그림. <원혜영이 그린 만화도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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